여수 애양재활병원에서. ⓒ배은주

나무들이 제각기 오색의 옷을 지어 입는 가을을 지나 어느새 매서운 바람이 깁스를 한 다리 속으로 불어 왔다. 바다가 있는 병원은 몹시 추웠다. 수술의 고통과 싸워내야 하는 환자들의 마음은 더욱 추웠다

여수애양재활병원은 환자를 고치는 공장이란 소리를 들을 만큼 많은 장애인들이 수술을 받으러 오는 곳이였다. 매주 월요일이면 진찰을 받기 위해 몰려드는 환자들로 인산인해가 되어버렸다. 그러한 이유로 늘 병실이 부족했고 초진 받고 1, 2년을 기다려야 수술날짜가 잡히곤 했다. 병실이 항상 부족하기 때문에 수술을 받은후 퇴원을 시키면 근처 여인숙 같은 곳에서 생활을 하다가 깁스를 풀 때쯤 제 입원을 해서 물리치료를 받아야 했다.

전국 방방곳곳에서 모여든 환자들은 서로의 치료과정을 이야기하며 치료가 끝난 후에 달라진 자신의 몸을 상상하며 힘든 치료시기를 견디며 지냈다. 나는 척추 수술과 다리 수술을 모두 했기 때문에 누워서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누운 채로 기타를 치며 무료함을 달래곤 했다. 통증이 너무 심할 때는 수술한 걸, 후회하기도 했다

“내가 왜 수술을 했을까 수술해서 걸을 수 있다고는 하지만 뛰어 다닐 수 있는 것도 아닌데 기껏 해봐야 그 무거운 보조기를 착용하고서 목발을 집고 간신히 걷는 것이 고작일 텐데…….”

그 무렵 집안에 큰 문제가 생겨서 간호를 하던 어머니께서 급하게 서울로 가셔야 될 일이 생기고 말았다. 병원근처 마을에 사는 할머니께 간호를 부탁해 보았지만 앞이 잘 안 보이기 때문에, 밥을 지어 줄때마다 벌레가 들어가 있곤 했다.

다시 간호할 사람을 찾고 있던 터에 병원에 찾아와 많은 이야기를 해주던 그 남자가 간호를 자청하고 나섰다. 수술을 받은 후, 모든 치료 일정을 끝내고 서울로 돌아가려던 그 남자는 의사보다도 먼저 회진을 돌고 다녀서 "돌팔이 의사"라는 별명이 붙어 있을 만큼 그 병원에서는 유명한 사람이었다.

나와 엄마는 선택에 여지가 없었다. 추운 겨울 머리를 감고 싶어도 엄마가 힘들까봐 누워서 긁적이며 오랜기간 참으며 지내곤 했었는데, 그 남자는, 간호를 맡자마자 큰 솥단지에 물을 끓이더니, 나의 머리를 감기기 시작했다. 깁스가 너무 무거워서 자세를 바꾸고 싶어도 그저 참고 지내곤 했었는데 하루에도 열두 번씩 내 자세를 바꾸어 주기도 했다. 하루에 세 번씩 따뜻한 밥상을 차려 와서는 누워서 밥을 먹어야 하기 때문에 항상 먹는 것이 고역 이였던 내게 온갖 우스개 소리로 밥 한 공기를 뚝딱 비우게 해주었다.

그러던 어느 날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밥상을 차려 와서 내 숟가락에 총각김치를 올려 주던 그 남자 앞에서 나는 그만 눈물을 보이고 말았다.

“이런 극진한 보살핌과 간호에 길들여지면 어쩌나? 사람이 사람에게 길들여지는 것만큼 두려운 일이 또 있을까”

상처 받는 것이 두려워서 그 누구에 호의나 친절도 거부하며 사람을 가장 무서워하며 지냈었던 나였다. 누군가를 만나기도 전에 헤어질 것이 두려워 언제나 만남 자체를 거부해 왔던 나였다. 그만큼 나의 장애는 나의 감정까지도 지배해 왔으며 나에게 이성에 대한 관심자체를 말살시켜 버렸었다.그러나 나는 점점 씩씩하고 힘센 그 남자의 보살핌에 자꾸만 자꾸만 길들여져 가고 있었다. 그 남자 앞에서는 나의 장애가 조금씩 작아져 가기 시작했다.

[설문]제7회 세계장애인한국대회를 아시나요?

3살 때 앓은 소아마비로 인해서 장애인이 됐으며 초·중·고교 과정을 독학으로 검정고시에 합격했다. 96년도에 제1회 KBS 장애인가요제에서 은상을 수상하면서 노래를 시작하게 됐고 97년도에 옴니버스 음반을 발표하기도 했다. 2001년 ‘한국장애인고용촉진공단 작품현상공모’에서 장려상을, 2006년 우정사업본부 주최 ‘국민편지쓰기대회’ 일반부 금상을 수상하고 같은 해에 ‘2006 전국장애인근로자문화제’ 소설부분 가작에 당선되었다. 현재 CCM가수로도 활동 중이며 남녀 혼성 중창단 희망새의 리더로, 희망방송의 구성작가로도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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