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수 애양재활병원에서. ⓒ배은주

나는 늘 사람이 두려웠다. 우정이라는 이름으로 다가오는 사람도 두려웠고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다가오는 사람도 두려웠다. 그들이 내게 베푸는 우정이나 사랑은 결국엔 동정일꺼라고 생각하며 나는 마음에 겹겹의 벽을 쌓으며 24살을 살았다. 그러므로 이성교제나 결혼 같은 단어는 TV나 소설책에서나 등장하는 단어로 생각하며 지냈었다.

혹독한 사춘기를 지나 내가 나를 구원하는 수단으로 삼은 것이 독학이였고, 학교를 다닐 수 없었던 나에게 검정고시를 통해서 졸업장을 취득 할 수 있다는 사실은 온 세상을 얻은 것과 같은 희망이 되었다.

하얀 칼라의 교복을 입고서 놀러오는 친구를 보면서 나는 드러내지 않게 가슴으로 울곤 했었다. 그만큼 배움에 대한 열정이 내안에 깊게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처절하게 나의 건강을 망가트려 가면서까지 독학을 했다. 말 그대로 독하게 마음먹고 나 자신을 학대하다시피 공부해 나갔다. 그렇게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로 공부해서 고등학교 졸업장까지 따냈지만, 90년대 그 시절에는 휠체어를 탄 나를 받아주는 대학은 한군데도 없었다.

내가 절망했던 깊이는 죽음 같은 것이었다. 아니 나는 죽음 보다 더 깊은 절망을 했었다. 땅 끝까지 추락하여 더 이상 추락할 곳이 없을 만큼 쓰러져 갔을 때 신앙의 힘으로 나는 다시 시작할 용기를 얻을 수 있었다. 그 용기를 가지고 나는 수술을 결심했다.

"휠체어로 안 된다면 목발을 짚고서 걸어서라도 대학에 들어 가리라."

굳은 결심을 하고서 수술을 받았지만 나를 기다리고 있는 수술 과정은 내가 상상한 것 이상으로 고통스러웠다. 피가 흥건히 묻어나는 침대시트를 바라보면서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아프다고 소리치며 우는 것이었다.

사람의 정신력이 강하다고 누가 말했던가. 아무리 강한 정신력의 소유자도 육체가 약해지면 함께 나약해지고 마는 것을 나는 점점 나 자신을 일으켜 세우는 일을 포기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없이 추락해가고 있는 내게 어느 날 한 사람이 다가왔다

“배가야! 많이 아프냐?"

나는 대답할 힘도 없었던 터라 그저 묵묵부답 할 수밖에 없었다. 그 사람은 하루에 한차례씩 환자들에게 자신의 치료 경험과 앞으로의 치료 일정을 이야기 해주곤 했다.

내가 수술한 여수 야양재활병은 아름다운 곳이었다. 병원 뒤뜰에서는 바다가 보였고 병원 앞마당에는 큰 솔나무가 있었다. 그 큰 솔나무 밑을 환자들은 '솔다방'이라고 불렀다.

어느 날 그 사람은 나의 침대를 끌고서 나를 그 솔다방으로 데리고 가주었다. 오랜만에 보는 넓은 하늘과 솔나무 냄새가 그 어떤 진통제보다도 강한 진통효과를 주었고 사람이 다가오면 무조건 동정이라고 여기던 나의 생각을 조금씩 마비시키기 시작했다.

나의 장애는 내 생각까지도 자유롭지 못하게 가두어 두는 부분이 많았었고, 내 마음속은 사람에 대한 온갖 장애물들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스스로 만든 마음의 장애가 육체적 고통으로 인해 강하게 버티고 있던 정신력을 허물어 버리더니 급기야는 내안에 쌓아놓은 사람에 대한 벽까지도 허물기 시작했다.

사람과 사람의 만남에 있어서 장애는 더 이상 장애가 될 수 없다는 것을 나는 조금씩 깨달아 가기 시작했으며, 아프기만 하던 수술상처가 아물어 갈 즈음 내 마음에도 조금씩 사랑이라는 것이 스며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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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살 때 앓은 소아마비로 인해서 장애인이 됐으며 초·중·고교 과정을 독학으로 검정고시에 합격했다. 96년도에 제1회 KBS 장애인가요제에서 은상을 수상하면서 노래를 시작하게 됐고 97년도에 옴니버스 음반을 발표하기도 했다. 2001년 ‘한국장애인고용촉진공단 작품현상공모’에서 장려상을, 2006년 우정사업본부 주최 ‘국민편지쓰기대회’ 일반부 금상을 수상하고 같은 해에 ‘2006 전국장애인근로자문화제’ 소설부분 가작에 당선되었다. 현재 CCM가수로도 활동 중이며 남녀 혼성 중창단 희망새의 리더로, 희망방송의 구성작가로도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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