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월 그날은 5월 15일 즉 스승의날이다. 내가 어렸을 때만 해도 군사부일체(君師父一體)라고 배웠다. 임금과 스승과 아버지는 하나라는 뜻이다. 그래서 스승의 그림자도 밟지 않는다고 했다. 스승의 가르침을 받자와 부모보다도 더 위로 알고 존경했었다.

1996년 왼쪽부터 이승화 교장선생님, 이용모 선생님, 정병택 선생님. ⓒ이복남

스승의 날 폐지론까지 주장하는 지금에 와서는 까마득한 옛날이야기이다. 70년대 초반부터 한 해도 거르지 않고 두 분 스승을 만나고 있는 옛날이야기 속으로 한번 들어 가 보자. 나는 부산의 바닷가 한 모퉁이에 있는 송도국민학교를 다녔다. 송도국민학교는 6.25를 지난 후 피난민으로 넘쳐나는 남부민국민학교에서 떨어져 1953년 가교실로 설립이 되었다. 한 학년이 달랑 두학급에 불과하였지만 학생 수는 한 학급당 60명이 넘었다.

당시만 해도 송도는 해수욕장으로 유명세를 떨치던 시절이었기에 바닷가에서 횟집이나 여관 등을 운영하는 사람들은 부유층이었고 천마산 기슭 산동네에는 가난한 사람들이 살았다. 우리 집도 산동네에 있었다. 학교 근처에 ‘축복산’이라는 아동시설이 있었는데 그 아이들은 학용품이나 옷도 미제였고 우리들은 구경도 못한 비스킷 등을 가져 오는 것을 보고 부러웠었다.

1학년 입학 때는 남녀 공학으로 1반 2반으로 나뉘었는데 5.16 이후 무슨 정책이 바꿨대나 어쨌다나 4학년이 되면서 남녀가 분리되어 남학생은 1반 그리고 여학생은 2반이 되었다. 수업시간에 어쩌다 창밖을 내다보면 오후의 햇살에 운동장 한모퉁이가 반짝였는데 풀을 뽑고 계신 이승화 교장 선생님의 머리였다.

1997년, 두 분 선생님과 친구들. ⓒ이복남

5학년이 되자 1반은 정병택 선생님, 2반은 이용모 선생님이 담임을 맡았는데 6학년 때도 두 분은 담임을 그대로 맡으셨다. 이 선생님은 수업시간에 자주 “딸아 들은 키워 봐야 아무 소용없다”는 말씀을 자주 하셨다. 졸업 한 후에 남학생들은 그래도 선생님을 찾아오는데 여학생은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선생님 저희들은 그렇지 않을 거예요.” 우리들은 항변했으나 선생님은 두고 보자 하셨다.

스승의 날은 1958년 당시 충남 강경여고 청소년적십자(JRC.현 RCY) 단원들은 병중에 있는 전.현직 교사들을 방문해 봉사활동을 했는데 이런 선행을 확산시키기 위해 RCY 충남협의회가 63년 9월 21일을 충남도 내 '은사의 날'로 정했다. 64년 RCY 협의회는 명칭을 '스승의 날'로 바꾸고 날짜도 5월 26일로 바꿨다.

그리고 65년에 세종대왕 탄신일인 5월 15일을 스승의 날로 다시 바꿨다. 그 후 박정희 정부에서 국민교육헌장을 발표하면서 73년부터 스승의 날을 폐지했으나 한국교총 등이 강력하게 건의해 82년 5월 국가 지정 기념일로 정식 선포됐다. 그래서 올해 즉 2007년 스승의 날은 44회 또는 25주년이 되기도 한다.

1964년에 스승의 날이 시작되었으니 5월 8일 어머니의 날(현재는 어버이의 날)에 어머니를 학교로 모셔서 카네이션을 달아 드리고 5월 26일 스승의 날도 “선생님 고맙습니다” 하는 카네이션 리본과 함께 스승의 날을 기념 했던 것 같다.

초등학교를 졸업을 하고나서 우리반 담임이셨던 이용모 선생님은 다른 학교로 전근을 가셨는데 “선생님 저희들은 그렇지 않을 거예요.” 하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 친구들 몇몇이 꽃다발을 사들고 선생님을 찾아 갔다. 그게 한 2~3년은 계속되었던 것 같은데 그 후에는 흐지부지 되고 말았다.

그리고 몇 년이 지난 후에야 교대를 다니는 친구와 만나면서 다시 이 선생님을 찾기 시작했다. 그 무렵 이 선생님은 어느 학교 교장으로 계셨는데 꽃다발을 들고 학교로 찾아가면 선생님은 교직원들에게 “봐라, 내가 송도에 있을 때의 제자들이다” 하시면서 자랑하셨다. “교장 쯤 되면 찾아오는 놈 한 놈 없다”면서 우리들이 찾아 주는 것에 무척이나 반가워 하셨다.

2002년, 송도초등학교에서 필자(왼쪽)와 친구 영선이. ⓒ이복남

그로부터 해마다 오월이 되면 이 선생님을 찾아뵙는 게 우리들에게는 약속이었고, 당신께는 기쁨이자 보람이셨다. 선생님께서 다른 학교로 가시면 또 그 학교로 찾아 갔다. 언젠가 이 선생님은 정 교장 즉 남자 반 담임을 만나서 우리들이 찾아온다고 얘기를 했는데 정 선생님을 찾아오는 남자애들은 아무도 없다고 했다. 그래서 다음해부터는 우리가 정 선생님도 찾아뵈었는데 정 선생님은 기쁘고 반가우면서도 쓸쓸해 하셨다.

그리고 몇 해 지나지 않아 두 분 다 정년을 맞으셨고 우리는 약속을 정해 두 분을 선생님을 밖에서 만났다. 그 때는 또 한 친구와 연락이 되어 세 명이 두 분 선생님을 모셨다. 카네이션 꽃다발과 자그마한 선물을 드리고 함께 저녁을 먹었다.

어쩌다 보니 내가 그 연락책을 맡게 되어 해마다 오월이 되면 두 분 선생님께 연락을 드렸는데 정 선생님은 반갑게 참석은 하셨지만 남학생이 하나도 없음에 “내년에는 나는 부르지 말고 이 교장만 모셔라” 하시며 사양하셨지만 그럴 수는 없다고 했다.

몇 년인가 지난 후에 어찌어찌 연락이 되어 남학생이 두어 명 참석을 하자 그제서야 정 선생님의 얼굴에도 웃음꽃이 피었다. 다음해 오월에는 그 친구들이 또 다른 친구들을 데려오곤 해서 한 때는 15~6명이 모이기도 했다. 서울에 사는 친구들이 자기들끼리 연락을 해서 5~6여명이 단체로 내려오기도 했었는데 그러나 15~6명이 모인 것은 한 두 해에 불과했다.

2002년, 선생님이 떠나신 후 친구들끼리. ⓒ이복남

남자들의 경우 친구들에게 내밀 그럴 듯한(?) 명함이라도 있어야 참석하는 것 같았다. 여자들도 일을 하는 친구도 있었고 가정주부도 있었는데 한두 번 왔다가는 발길을 끊기도 했다. 어쨌거나 그러는 사이에 예전의 이승화 교장 선생님도 몇 번 모셨고, 1~2학년 때의 담임선생님을 모시기도 했었다.

언제부터인가 선생님과 헤어질 때면 선생님 두 분 다 “이제 고만하자”고 하셨지만 선생님 살아생전에는 모시고 싶으니 그런 말씀은 마시라고 했다. 그런데 2001년 5월 달 모임에서 정 선생님께서 아들이 있는 서울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며 내년부터는 고만하자고 하셨다. “서울 가시더라도 부산에 따님도 있고 하니 내년에도 와 주세요.”

2002년 다시 오월이 오고, 어쩌면 정 선생님께서 앞으로 오시기가 힘들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모교 즉 송도초등학교에서 만나기로 했다. 오월 어느 토요일 오후 두 분 선생님을 모시고 송도초등학교를 찾았는데 박성강 교장선생님은 처음 있는 일이라며 반갑게 맞아 주셨다. 그동안 모일 때마다 쓰고 남은 약간의 돈이 있어 학교발전기금 50만원을 박 교장 선생님께 드리고 바닷가 횟집에서 세분 선생님을 모시고 지난 이야기로 시간 가는 줄 몰랐다.

두 분 선생님은 아직도 여전하신데 해가 갈수록 참석인원은 점점 줄어들었다. 그리고 2007년 올해 5월의 모임에는 달랑 두 명뿐이었다. 이용모 선생님(83)과 정병택 선생님(82)은 아직은 건강하셨으나 참석 인원이 적은 것에 미안해하시며 이제 올해로써 끝내자고 하신다.

“선생님 살아생전에는 계속하게 해 주세요. 그것도 겨우 1년에 한번 뵙는 시간이니 오히려 저희들이 미안합니다.”

2007년, 왼쪽부터 김기영, 이용모선생님, 정병택선생님, 필자. ⓒ이복남

선생님 두 분 모셔서 꽃다발과 선물을 드리고 함께 저녁 먹으면서 옛날 코흘리개 시절 이야기에서부터 현재의 시국과 교육 이야기 등을 나누고 헤어졌다. 사정이 여의치 못해 참석은 못하지만 멀리 있는 친구들이 10만원~20만원 찬조금은 보내 주니 두 분 선생님을 모시는데 부족함은 없었다.

쑥스러움을 무릅쓰고 이 글을 쓰는 이유는 태어남에는 차례가 있지만 죽음에는 순서가 없다. 누구나 한치 앞을 알 수 없음에 나도 이제 환갑이 내일 모레고, 두 분 선생님은 이미 여든을 넘으셨다. 우리는 코흘리개 시절의 약속을 지키려 함이고 두 분 선생님께는 보람이자 기쁨이셨다.

처음 시작한 이후부터 한해도 거르지 않고 38년을 우리들의 부름에 응해 주신 두 분 선생님, 그리고 그동안 함께 해 준 친구들에게 감사드린다.

“선생님 내년 5월에도 건강하신 모습으로 다시 뵈올 수 있기를 기원 드립니다. 선생님 고맙습니다.”

스승의 은혜

강소천 작사 / 권길상 작곡

1. 스승의 은혜는 하늘같아서

우러러 볼수록 높아만 지네

참되거라 바르거라 가르쳐 주신

스승은 마음의 어버이시다

(후렴) 아아 고마워라 스승의 사랑

아아 보답하리 스승의 은혜

2. 태산 같이 무거운 스승의 사랑

떠나면은 잊기 쉬운 스승의 은혜

어디 간들 언제인들 잊사오리까

마음을 길러주신 스승의 은혜

3. 바다보다 더 깊은 스승의 사랑

갚을 길은 오직 하나 살아생전에

가르치신 그 교훈 마음에 새겨

나라 위해 겨레 위해 일하오리다

(이 내용은 ‘문화저널21’에서도 보실 수 있습니다)

내 이웃이 행복하지 않는 한 나 또한 온전히 행복할 수 없으며 모두 함께 하는 마음이 없는 한 공동체의 건강한 발전은 기대하기 어렵다. 우리는 함께 살아가야 할 운명공동체이기 때문이다. 아름답고 건강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가진 자와 못 가진자,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평등하게 공유할 수 있는 열린사회를 건설해야 한다. 쓸모 없음을 쓸모 있음으로 가꾸어 함께 어우러져 나아갈 수 있도록 서로 사랑으로 용서하고 화합하여 사랑을 나눔으로 실천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이복남 원장은 부산장애인총연합회 사무총장을 역임하였으며 현재 하늘사랑가족상담실을 운영하고 있다. 하사가장애인상담넷www.gktkrk.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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