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생아 실에서. ⓒ배은주

처음이라는 말은 누구에게나 적잖은 부담감을 주게 된다. 그에 반해 두 번째라는 말은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무언가가 있는 것 같다. 출산에 있어서도 예의는 아닌 것 같다. 두렵고 떨리기만 했던 첫 번째 출산과는 달리 설렘과 기대감으로 둘째를 출산하게 되었다.

병원 측에 세심한 배려 또한 내가 빨리 회복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던 것 같다. 철저한 관리로 운영되는 수유실에 휠체어를 타고 들어가는 것을 찝찝해 하고 있는 나의 마음을 알기라도 한 듯 휠체어를 소독해주라는 담당 의사선생님의 지시로 인해 나는 편안한 마음으로 수유실 안에서 다른 임산부들과 똑같이 수유를 할 수 있었다. 생각해보면 작은 배려지만 그 배려는 내게 힘이 되었다.

뱃속에서부터 씩씩 했던 둘째 아기는 태어나서도 무척이나 씩씩했다. 분유 맛에 먼저 길들여지는 것이 두려워 모유가 나올 때가지 꼬박 24시간을 물만 먹이기로 결정 했지만, 아기는 잘 참아내 주었고 그 덕분에 아기와 나는 아무런 고생 없이 모유수유에 성공 할 수 있었다. 모유수유에 대해 아무런 안내도 받지 못해서 그 귀한 초유를 모두 흘러 보냈었던 기억을 떠올려 둘째 때는 입원 할 때부터 젖병과 수유 기구를 준비해 놓고 모유가 나오기를 기다렸다. 수술 하고 이틀 후에 모유가 나오자 나는 모유를 젖병에 담아 신생아실로 보냈다. 이것 역시 첫 번째 출산때 겪었던 시행착오의 결과였다. 돌이켜 보니 실패란 꼭 나쁜 것만은 아니었다. 보다 나은 성공을 위해 꼭 한번은 거쳐야 하는 과정임을 알게 되었다.

“둘째를 낳고 난후에는 산후조리가 제일 중요해! 나는 둘째 낳고 나서 산후조리를 제대로 못해서 지금도 찬바람이 뼛속으로부터 불어온다니까.”

내가 둘째를 가졌다는 소리를 듣자마자 이웃 아줌마들이 내게 와서 입이 마르도록 산후조리의 중요성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주었다. 나 역시 둘째를 낳고나서 산후조리만큼은 철저하게 하고 싶었다. 장애인들은 어쩔 수 없이 아기를 출산한 후 회복하는 시간이 비장애인들에 비해 오래 걸릴 수밖에 없으며 가장 기본적인 신변처리도 힘이 든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때 마침 정부에서 아기를 출산한 장애여성에게 산후 도우미를 파견한다는 기사를 접하게 되었다. 그 순간 나의 가슴에 환한 햇빛이 비추는 듯 했다. 나는 곧바로 신청을 했고 다행히 처음 시행 하는 사업이어서 바로 혜택을 볼 수 있었다.

회복이 빨라서 예정보다 일찍 퇴원을 하고 보니, 중개기관에서 보낸 산후도우미분이 먼저 도착해서 나와 아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산후도우미분은 아기를 보자 감탄사를 연발하기 시작했다.

“아이 이뽀라!”

다행이 그분은 아기를 몹시 좋아 하셨다. 하지만 아기를 좋아만 할뿐 돌보지는 못하셨다. 아기를 키운 지가 너무 오래 되서 육아의 관한 모든 것을 잊어버리셨다고 했다. 더군다나 도우미분의 집이 거리가 멀어 이동하는데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렸다. 중개기관에서 한 달 동안 파견해주는 시간은 하루 8시간이었지만, 이동 하는데 걸리는 시간까지 포함해서 8시간이라는 사실을 나는 나중에서야 알 수 있었다. 모든 과정을 전문 산후도우미처럼 교육을 시킨 후에 파견한다는 기사와는 다르게 실제적인 서비스를 나는 받지 못했다.

신생아 돌보기 중에서 가장 힘든 목욕은 퇴근 후에 아빠 몫으로 돌아갔고, 나는 낮이고 밤이고 아기를 돌보느라 몸조리는 고사하고 잠잘 시간도 부족했다. 뒤늦게 라도 산후조리원에 들어가야겠다는 생각으로 산후조리원을 알아보았으나 장애인이 생활하기에는 불가능한 곳이 많았다. 장애여성은 임신도 출산도 두 배로 힘이 들지만 산후조리 역시 제대로 할 수 없다고 생각하니, 초여름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뼈 속 깊이 찬바람이 부는 듯 했다.

결국 도우미분의 개인적인 사정으로 그나마 받았던 서비스는 15일 만에 중지되었다. 나는 산후조리를 한 것도 아니고 안 한 것도 아닌 어정쩡한 신세가 되어버렸다.

그로부터 몇 개월 후 중개기관에서 한통의 전화가 걸려 왔다.

"저 지난번 산후 도우미를 파견한 곳인데요. 만족도 조사 좀 하려구요."

"만족도요 무슨 만족도요?"

"서비스 받으시면서 어떠셨는지 말씀 해주시면 되요. 사업결과를 보고 해야 하거든요."

"글쎄요. 저가 기억 할 수 있는 건 '이뽀라' 이 말 밖에는 없는데요."

끓어버린 수화기속에서 '쌔~앵' 하는 바람 소리가 났다. 그 소리는 이내 내 가슴속에서 불어 대개 시작했다. 시린 초겨울 바람처럼.

3살 때 앓은 소아마비로 인해서 장애인이 됐으며 초·중·고교 과정을 독학으로 검정고시에 합격했다. 96년도에 제1회 KBS 장애인가요제에서 은상을 수상하면서 노래를 시작하게 됐고 97년도에 옴니버스 음반을 발표하기도 했다. 2001년 ‘한국장애인고용촉진공단 작품현상공모’에서 장려상을, 2006년 우정사업본부 주최 ‘국민편지쓰기대회’ 일반부 금상을 수상하고 같은 해에 ‘2006 전국장애인근로자문화제’ 소설부분 가작에 당선되었다. 현재 CCM가수로도 활동 중이며 남녀 혼성 중창단 희망새의 리더로, 희망방송의 구성작가로도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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