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는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키워지는 것이다.'
요즘 흔히들 하는 말이다.
장애여성에게도 해당되는 말일까 의심스럽다. 이미 만들어져버린 장애라는 굴레는 여성이기도 키워지는 대상이기도 어렵다. 사회에 만연해 있는 '장애인' 과‘수혜자’란 멍에는 아름답게 가꾸어지기를 소망하지 않는다.
어려서 우리 주위에서 많이 들었던 이야기일 것이다.
'여자는 얌전해야 돼.'
'남자가 씩씩해야지 울긴 왜 울어.'
시골에서 자란 나는 2Km를 걸어서 초등학교를 다녔다. 크고 작은 여섯 개 마을이 모여서 학교를 다녔고 교문을 나서면 좌우로 여섯 개의 마을 아이들은 오랜 인사들을 하고 각자의 마을로 간다. 우리 마을로 오는 길엔 학교에서 50m정도를 가면 다시 두 마을로 나뉘어져서 집으로 간다. 내가 친구들과 같이 다닐 수 있는 길은 그 50m정도 되는 길이다.
그 길을 지나면 약속이라도 한 듯 우리 동네로 가는 애들은 한명씩 뛰어간다. 마지막 한명이 내 눈치를 보며 뛰어 가버리면 2Km나 되는 길을 난 혼자서 걸어간다. 혼자서 걸어가는 길에 익숙해진 나는 늘 심심하지 않게 들꽃들과 이야기도 하고 혼자서 소꿈놀이도 한다. 때론 언니가, 그 언니가 졸업하고 난 뒤 동생이 길을 같이 가기도 했었다.
늘 장애동생을, 장애누나를 둔 우리 가족들은 그들조차도 친구들과 어울리기 보다는 나를 보호해주는 길을 선택했다. 물론 그 시간이 그들의 시간의 일부분이었겠지만 난 어른이 된 지금에도 늘 빚진 기분으로 살아간다.
어느 누구하나 내게 얌전해야 된다, 예쁘게 자라야 된다, 라고 말을 한 적이 없다. 넘어지지 말아야지, 아프지 말아야지, 뛰어가지 말아야지, 등등 내게 는 특별한 단어로 대우를 해줬다.
한참 멋을 부려야 할 때도 넘어지기 일쑤였던 나는 치마보다는 바지를 입었었다. 어머니의 안쓰러운 마음이 그러했고 나 자신도 싫었다. 하루도 성할 날이 없었던 내 무릎을 감추고 싶었다. 어른이 된 지금도 그 상처들은 훈장처럼 남아있다.
양성평등교육을 받으면서 과연 나는 어느 성을 갖고 있을까 생각해 봤다. 태어나면서 성별이 가려지고 때가되면 여자가 된다. 아내가 되고 아이를 낳고 며느리가 된다. 2중 3중고의 역할로 많은 고통을 받으면서도 제대로인 성을 갖지 못하는 것이 지금의 장애여성의 현실이다.
강원도에서 대전을 가다보면 고속도로에서 '죽암' 휴게소를 만난다. 휴게소 치곤 아주 큰 휴게소에 속할 것이다. 화장실 개수가 아마도 50개는 족히 되어 보였다. 그런데 장애인화장실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커튼으로 시작되는 장애인 화장실! 잠깐만 스쳐도 커튼이 스르르 밀린다. 그렇다고 화장실 안이 신체를 보호할 만한 구조도 아니다. 과연 그들에게 장애여성은 어떤 눈으로 비쳤는가? 물어보고 싶다.
거기에는 적어도 장애여성의 성은 존재하지 않았다. 양성평등의 핵심은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것이다. 차별을 하는 게 아니라 차이를 인정하는 것이다. 장애인화장실을 만드는 것은 장애여성이 장애인이기를, 수혜자이기를 대우해 달라는 게 아니다. 다소 불편하므로 조금 넓게 그리고 시간이 많이 걸리므로 따로 만들어 이용하게 해달라는 것이다.
요즘엔 성별영양평가를 통한 여성과 남성의 신체구조상 화장실을 이용하는 시간이 다르므로 화장실 개수를 여성과 남성이 아닌 화장실을 이용하는 시간에 맞춰 설치하고 있는 형편이다.
여성과 남성의 차이는 여성은 엄마가 되는 것이고 남성은 아빠가 되는 것이라고 한다. 그 외의 모든 것은 차이가 아니라 차별이라는 것이다. 예쁘게 자라라, 씩씩해야지, 얌전해야지, 라는 것은 분명 차별인데 그 차별조차도 받지 못하는 장애여성의 성은 어디에 있는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