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장애인대회의 깃발들

2007년 3월26일 또다시 투쟁의 계절이 돌아왔다. 이날은 최옥란 열사가 돌아가신 날이다. 올해로 벌써 5주기가 됐고 3년 전부터 최옥란 열사의 열사정신을 계승하기 위해 전국장애인대회를 열고 있다. 내가 속한 한국사회당은 전날, 서울여성프라자(대방동 소재)에서 한국사회당 장애인위원회를 출범시키고 곧바로 열린 인권캠프를 마친 다음 이날의 대회에 참여했다.

2002년 난 TV화면을 통해서 최 열사의 모습을 처음 보았다. 문화방송의 시사교양프로였는데 당시 여성 앵커로 유명했던 백지연씨가 진행하는 프로였다. 그 당시 나는 철원의 한 장애인시설에 있었고 세상물정 모르던 착한 장애인에서 약간씩 시설에 불만이 생기던 시기였다.

TV속에서 최옥란 열사는 전동스쿠터를 타는 장애여성이었고 초등학교에 다니는 어린 딸의 엄마였지만 남편에게 이혼 당하고 그 딸 역시 장애를 가졌다는 이유로 뺏겨 버린 상처가 많은 엄마였다. 노점을 하다가 감당할 수 없는 약값 때문에 기초생활수급 신청을 했고 수급자로 선정이 됐지만 28만원이라는 생계비에 강력하게 항의하는 모습으로 비춰졌다.

이것을 보고 분노했고 며칠 뒤 같은 프로에서 그녀의 죽음을 접했다. 이동권 집회 때 그녀가 빨간 전동스쿠터에 앉아 쇠사슬을 잡고 울부짖는 모습이 그 프로에서 가장 강렬하게 사로잡았던 모습이었다.

이날 하늘은 우울했다. 해가 날듯 말듯했으며 간간히 비도 뿌렸다. 수많은 깃발들이 서울역 광장의 하늘을 수놓았으며 전국에서 모인 장애인 동료들이 광장의 땅을 빼곡히 매웠다.

우리는 이날부터 420까지 투쟁할 것이다. 활보 투쟁과 장차법 투쟁을 미약하나마 승리로 이끌었지만 아직도 갈 길이 멀다. 그것들의 작은 승리로 인해 조그만 숨통이 트였지만 여전히 장애인들은 시설과 골방에 갇혀 바깥세상을 볼 기회도 배움의 기회도 일할 기회도 갖지 못하는 현실이다. 정부의 기만적인 정책도 여전하다. 이날 대회에 참가한 백 명 남짓한 장애인들, 우리나라 전체 장애인들 수에 비교한다면 몇 백만분의 1에 불과한 인원이다.

요즘 출․퇴근할 때 가끔 어떤 사람들이 나에게 웃으며 세상 많이 좋아졌다고 말한다. 그들 또는 그녀들의 속뜻은 ‘전 같으면 어떻게 나 같은 중증장애인들이 거리를 돌아다닐 수 있었겠냐?’이다. 그랬다. 전 같으면 어림없는 일이다. 전동휠체어도 활동보조인도 지하철 엘리베이터도 그 어떤 편의시설도 없고 근본적으로 장애인 스스로가 열등한 존재로 스스로를 가두었다면 절대로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다. 난 그 소리를 들을 때마다 속이 뒤집어진다. 이 소리는 마치 ‘나라가 발전하고 돈 많이 버니까 너희들에게도 해택이 가는 거야! 그러니까 잠자코 찌그러져 있어’라는 말로 들린다. 그러나 어림없는 소리다.

우리들의 강력한 요구들이 그것들을 만들어냈다. 지하철의 엘리베이터를 놓게 했으며 활동보조인서비스 제도화를 이끌어냈으며, 이동편의증진법과 장애인차별금지법을 입법화시켰다. 우리들의 행동만이 유독 장애인들에게 배타적인 이 혹독한 사회를 변화시켰다. 이런 사실들을 우리는 알고 있다. 이 사회 역시 알고 있다. 그래서 이들은 우리들의 행동 하나하나를 무관심한 척 하면서 주시하고 있다.

이날은 거의 축제 분위기였다. 그 많던 전경들도 없었으며 대회가 끝난 뒤 사회복지사업법 개정을 위한 천막설치도 순조롭게 이뤄졌다. 저녁 때 열린 장애열사 추모문화제도 아무런 사고 없이 진행됐다. 장애열사들과 함께 운동했던 분들도 있었고 앞선 분들도 있었다. 특히 이현준 열사의 기억은 많이 남는다. 그분이 가시기 1년 전 함께 같은 유치장에 들어가 하룻밤을 지낸 적 있다. 그때 기억으론 몸이 많이 안 좋아 경찰에게 통증을 호소했고 병원으로 옮겨졌었다. 비록 짧은 시간이었지만 참 듬직하고 아는 것이 많았던 선배였다. 그리고 박기연 열사와 정정수 열사는 작년 여름과 겨울에 돌아가신 분들이다. 더구나 이들 세분 모두 손 하나 까딱 못하는 중증장애를 가지셨다.

또다시 투쟁의 계절이 돌아왔다. 많은 싸움들이 우리들 앞에 놓여 있다. 우리는 투쟁으로 장차법을 입법화 시켰고 활동보조인서비스도 제도화 시켰지만 여전히 미흡하다. 이동보장법이 통과된 지 한참이 지났지만 여전히 장애인들은 버스타기 어렵고 지하철을 타려면 여전히 넓고 높은 지하철 문턱에 목숨 걸어야 하고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휠체어 리프트를 타야 한다. 그리고 앞으로 더 많은 권리들을 쟁취해내야 할 싸움들이 남아있다. 이날 밤, 열사들에게 하얀 국화를 바치며 앞으로의 싸움들의 승리를 다짐해 봤다.

박정혁 칼럼리스트
현재 하고 있는 인권강사 활동을 위주로 글을 쓰려고 한다. 학교에서 학생들을 상대로 강의를 하며 느꼈던 점, 소통에 대해서도 말해볼까 한다. 그리고 지금까지 장애인자립생활을 하면서 느꼈던 경험들과 장애인이 지역사회 안에서 융화되기 위한 환경을 바꾸는데 필요한 고민들을 함께 글을 통해 나누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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