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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의 미로

판타지를 통해 간접조명된 현실

에이블뉴스, 기사작성일 : 2007-03-08 11:40:39
판의 미로. 에이블포토로 보기 판의 미로.
동화는 슬픕니다. 비록 행복한 결말이라 할지라도 말입니다. 어린 시절에 읽었던 동화들을 어른이 된 후 다시 읽었을 때 어린 시절 느꼈던 막연한 슬픔의 실체를 보다 구체적으로 열거할 수 있게 되는 것은 그만큼 세상살이의 신산함을 알아버렸기 때문이겠지요.

'해와 달이 된 남매' 떡을 팔아서 어린 남매를 키우는 어머니가 산을 넘다가 호랑이를 만납니다. "떡 하나 주면 안 잡아먹지~" 로 시작된 호랑이의 협박은 떡을 다 빼앗아 먹고 나서는 어머니의 팔, 다리… 드디어는 어머니를 먹어치워 버립니다. 어머니의 옷을 입고 오누이마저 해하고자 찾아온 호랑이를 피해 나무로 올라간 오누이가 하늘로 올라가 달이 되고 해가 되었다는 이야기, 어린 시절에는 그저 '전래 동화'로 읽었습니다.

어른이 된 지금 생각해보면, 남편 없이 어린 자녀를 키우는 홀로 된 여성의 삶이 얼마나 고단하다 못해 참혹했을까 싶습니다. 호랑이로 그려진 인물들은 끊임없이 여성의 주위를 맴돌며 그녀를 핍박하고 착취했고 결국은 목숨마저 앗아갔으니까요. 어머니마저 잃고 남겨진 남매에게 뻗치는 사악한 손길은 최근 우리 사회에서 어린 소녀가장에게 가해진 공모된 폭력을 떠올리게 합니다.

우리의 전래 동화 뿐 아니라 서구의 동화들 역시 신산스럽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중세 뿐 아니라 근세에 이르기까지도 일반 가정은 물론이고 납치 및 유괴에 의한 어린이 노동의 착취는 특별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납치된 아이들은 깊은 산속의 좁은 갱도에 쪼그리고 앉아 광물을 캐내는 강제 노동에 시달리다가 광맥이 끊어지거나 돌발 상황이 벌어질 경우 그대로 산 속에 방치되어 굶어죽거나 산 속의 동물들에게 희생당하기도 했습니다. 다행히 살아난 아이들도 오랜 시간 좁고 낮은 갱도에서 웅크리고 노동을 하다보니 제대로 성장을 하지 못하여 기형적인 몸을 갖게 되어 곡마단 같은 곳에 다시 팔리기도 했다는 끔찍한 기록도 있습니다. 그러한 기록들을 읽으면서 '백설 공주와 일곱 난쟁이'의 난쟁이들이 떠올랐습니다.

민간에 떠도는 설화나 전설들은 실제 벌어졌던 일들이었지요. 입에서 입으로 전해진 '전래 동화'는 세월이 지나면서 조금씩 윤색되어 전해졌고, 그림 동화는 바로 그런 이야기들을 수집하여 쓴 것들이라고 합니다. 동화 작가들이 너무도 참혹하고 신산스러운 현실을 동화라는 형식이 아니면 도저히 표현하기가 어려워서 동화를 썼던 게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이렇듯 그림 동화 뿐 아니라 동서양을 막론하여 어린 시절 읽었던 동화들 대부분에 바로 그런 신산스러운 삶이 녹아있었음을 어른이 되어서야 알아차리게 되었습니다.

'판의 미로'는 만삭의 어머니와 함께 군인인 새 아버지를 찾아온 소녀 오필리아의 판타지 속 이야기입니다.

스페인 내전의 막바지, 산 속의 게릴라들을 토벌한다는 명목으로 마을 주민마저 잔인하게 살해하는 가부장적인 파시스트 새 아버지와 함께 사는 현실은 오필리아에게 참을 수 없는 두려움을 안겨주고 그런 오필리아 앞에 나타난 요정은 오필리아를 판(그리이스에 등장하는 허리 위쪽은 사람의 모습이고 염소의 다리와 뿔을 가진 반인반수의 목양신)에게로 데려갑니다. 판은 오필리아가 먼 옛날 지하 왕국의 공주였으며 보름달이 뜨기 전에 세 가지의 임무를 완수하면 지하 왕국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 합니다.

동생을 낳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오필리아는 게릴라들을 도왔던 메르세데스와 산으로 도망가려 하지만 새 아버지에게 잡혀서 감금되고 맙니다. 다시금 판의 도움으로 아기를 데리고 미로로 도망친 오필리아는 아기의 피를 요구하는 판의 제안을 거절하고 새 아버지에게 죽임을 당합니다. 동생을 지키기 위해 자신을 희생시킨 오필리아의 몸에서 흘러나온 피는 지하왕국으로 통하는 문을 열리게 하고 오필리아는 먼 옛날 떠나왔던 지하왕국으로 돌아갑니다.

전쟁은 종종 기이하게도 리얼리티와 판타지가 공존하는 동화이기도 합니다. 인간에게 잠재된 폭력성, 남성적 폭력성이 환각처럼 실현되는 전쟁과 그 전쟁을 증오하며 종식시키려하는 나약하지만 자비로운 여성성은 희생을 전제로 구현되기도 합니다.

폭압적인 가부장적 이데올로기로 무장한 사회에서 아들을 낳다가 숨을 거둔 어머니, 그 모든 참혹한 현실로부터 도망치려했으나 동생을 위해 자신을 버린 오필리아의 숭고한 희생('괴물'에서 현서가 어린 남자아이를 구하고자 자신을 버리는 것과 같은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오필리아의 희생으로 살아남은 아기를 품에 안은 메르세데스는 모두 '여성' 속에서 떼어낼 수 없는 동전의 양면과도 같은 인물들입니다.

역사상 가장 처참하고 잔혹했던 한 부분, 스페인 내전의 상흔을 한 어린 소녀의 판타지를 통해 되돌아 본, 견딜 수 없이 고통스러운 현실과 미로와도 같은 판타지의 경계가 너무도 섬세하고 정교하게 마름질된 '판의 미로', 저는 지금껏 이토록 깊고 슬픈 울림을 가진 동화가 이처럼 아름답게 스크린에 구현된 것을 본 적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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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니스트 이서 (pershedo@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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