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림픽 동료 선수들과 함께.

본격적인 칼럼을 쓰기에 앞서 내가 하고 있는 일에 대해 이야기하며 저를 소개해야 할 것 같아 조금은 긴 듯한 이 글을 씁니다. 저는 나름대로 열심히 살았다고 자부했었습니다. 그에 따른 어느 정도의 성과도 거두며 말입니다. 그러나 자립생활 활동을 하기 전 저는 화장지 없이 화장실을 다녀온 사람처럼 왠지 모를 찝찝함과 심한 회의에 빠져 있었습니다. 아무리 열심히 하고 자기가 하는 일에서 성공을 거두어도 이 세상은 나를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생각이 아닌 실생활에서 피부에 와 닿는 느낌이라는 점에서 난 더 이상 부정만 하며 버틸 수 없었습니다.

전 중증장애인입니다. 그것도 남들이 보기엔 최중증이지요. 휠체어 없인 이동이 전혀 불가능하고 그것도 전동휠체어가 아니면 남이 밀어주지 않는 한 꼼짝도 못하니까요. 하지만 전 이 모든 것을 극복할 수 있다고 생각했고 한때는 극복했다고도 생각했었습니다. 전 가정형편과 장애 등으로 인해 정규교육과정을 전혀 거치지 못했습니다. 17살 때까지 흔히 우리가 말하는 재가장애인이었지요. 동생들 어깨너머로 한글을 겨우 깨친 정도의 제가 그나마 시설이라는 곳에 들어가 세상과 접하게 되면서 공부도 하고 운동(스포츠)도 하게 된 것은 어찌 보면 행운이었는지도 모릅니다. 그곳에서 전 처음 꿈이라는 것을 꿀 수 있었으니까요.

돌이켜보면 그 꿈을 향해 전 정말 최선을 다한 것 같습니다. 가끔 게으름도 피긴 했지만 앞 뒤 가리지 않고 앞만 보고 달리는 경주마처럼 비장애인과 같아지려고 그들과의 경쟁에서 이기려고 무진장 노력했었습니다. 그래서 얻은 것이 초중고 검정고시 합격과 방통대 졸업, 그리고 올림픽 금메달을 따서 얻은 대한민국 체육훈장 중 두 번째로 높은 훈장이라는 맹호장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맹호장을 수여받는 순간, 정말 전 이제 다 됐다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이겼다고, 세상과의 싸움에서 이겼고, 장애도 극복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착각이었고 그 착각은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올림픽이 끝난 후 전 대학진학을 준비하게 됐습니다. 당연히 제가 제일 자신 있는 장애인스포츠를 전공하기 위해 그쪽 방면의 과를 선택하였지요. 그 당시 장애인 특례입학까지 있었기 때문에 전 당연히 합격할 줄 알았습니다. 수능도 잘 봐 지원한 과에서 제가 수석이었으니까요. 하지만 면접을 보는 당일 전 불합격이라는 결과가 나오게 되리라는 것을 뼈저리게 느낄 수 있었습니다. 수학능력이 없다는 이유, 장애가 심해 수업을 받을 수 없다는 이유로 전 제가 제일 자신 있는 분야에서조차 인정을 받을 수 없었습니다.

장애인이 장애인스포츠를 배우겠다는데 장애를 이유로 기회마저 주지 않는 현실에서, 그것도 나라에서 장애인스포츠에 이바지한 공로로 최고의 권위를 가진 훈장까지 받은 나를 인정하지 않는 사실을 바라보며 전 제가 지금껏 믿어오고 꿈꿔왔던 것들이 허상임을 실감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도 무슨 미련인지 원하지도 않는 과를 선택해 방통대에 진학해서 졸업까지 한 나를 전 그 당시 허망한 눈빛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출근길에…. 자립생활은 힘들어^^.

그렇게 허망하게 살아지는 삶을 살아가던 제게 주위에서 들려오기 시작하는 새로운 소리들은 저에겐 어찌 보면 새로운 돌파구와도 같았습니다. 당사자, 주체, 자립생활, 동료, 장애해방, IL센터, 등등…. 하지만 다시 한번 생각해보면 이런 말들은 항상 제 주위에 맴돌던 소리들이었습니다. 저도 장애가 장애인지라 그런 쪽에 평소 관심이 많았던 관계로 자주는 아니라도 가끔씩 접할 수 있는 창구를 열어놓고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왠지 모를 두려움과 낯설음으로 인해 쉽게 용기를 낼 수가 없었던 차에 서울DPI(Disabled Peoples International-세계장애인연맹)에서 매년 주최하는 청년학교는 나에게 피할 수 없는 계기를 마련해주었습니다. 그리고 자립생활은 귀동냥이 아니라 심각하고 진지한 고민거리로서 저에게 다가왔습니다.

더럽고 아니꼽지만 그래도 이제껏 이뤄놓은 것이 있기에 조금만 더 버티면 안락한 삶을 보장해줄 것 같은 지금의 나를 버리고 아무 보장도 없는 이 길을 가야 할 것인가?

달콤한 현재의 안락과 피를 끓게 만드는 불안한 도전적 미래. 전 솔직히 어느 쪽도 선택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제가 자립생활 이념을 받아들이고 활동가로서의 삶을 시작한 것은 무엇 때문이었을까요? 그것은 동료들의 힘 덕분이었습니다. 난 먼저 이 일을 시작한 동료들의 눈에서 즐거움을 보았습니다. 신념에 찬 그 눈에는 허망함이 없었습니다. 어렵고 힘들어도 그래서 가끔은 흔들려도 그들의 눈은 항상 반짝거리며 즐거워하고 있었습니다. 때로는 불타기까지 하는 그들의 눈을 보며 난 더 이상 나만을 위해 비장애인의 틈에 끼어 허망한 눈빛을 가지고 살아가고 싶지 않았습니다. 나만을 위한 삶이 아닌 우리를 위한 삶…. 전 그들에게서 힘들지만 희망이 있고 꿈이 있는 미래를 보았던 것입니다.

17년간 재가 장애인으로서 수감생활(?)도 해봤고 시설에 입소도 해봤으며 검정고시로 초중고를 패스하고 방통대를 졸업. 장애인올림픽에서는 금메달까지 3개를 땄던 나. 하지만 세상은 그런 나를 그저 장애인으로만 바라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그러다 알게 된 자립생활! 장애라는 이유로 더 이상 모든 것으로부터 격리, 분리되지 않아도 되는 그런 세상이 꿈꾸는 곳. 장애인이 세상과 더불어 소통하며 살 수 있는 그날을 위해 나는 지금 이곳 사람사랑 양천장애인자립생활센터에서 근무하며 새로운 꿈을 꾸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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