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천장애인 종합복지관에 이어 분당구 야탑동에 건축될 장애인종합복지관이 어려움을 겪고 있다. 시대는 21세기에 들어와서 사회통합과 정상화를 기정사실로 여기고 있다.그러나 아직도 이 시대에 장애인 이용시설을 혐오시설로 규정하고 반대하는 사람들이 존재하고 있다.

장애인이 혐오스러운가? 아니면 장애 자체가 혐오스러운가? 아니면 장애인 시설이 혐오스러운가? 뭐가뭔지 아직도 혼란스럽다.

혐오(嫌惡)란 단어를 사전을 통해서 밝혀보면 "미워아여 싫은"의 뜻을 갖는다. 따라서 혐오스럽다는 것은 무엇인가를 미워하고 싫다는 뜻이다. 장애인 시설을 혐오스럽다고 말하는 것은 장애인 시설을 싫어하고 미워한다는 말이다. 그러면 그렇게 취급받는 당사자인 장애인 시설은 뭐라고 반응하는가? 안타깝게도 장애인 시설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는다. "좋다! 싫다!" 어느 쪽 표현도 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무엇이 혐오스럽다는 것인가?

우리는 이런 이야기를 잘 알고 있다. "부처 눈에는 부처가 보이고, 욕심쟁이 눈에는 욕심쟁이가 보인다." 그렇다.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는 대상을 향하여 혐오스럽다고 규정한다면, 이는 그렇게 규정한 사람의 마음에 "혐오스러움"이 가득하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의 눈도 혐오스러움에 가려져있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혐오는 여기 저기 있는 것이 아니라 혐오스럽다고 말하는 그들에게 있는 것이다.

세상에 사람이 많다보니 이러저러한 마음을 가슴에 담고 있는 것을 누가 막는다 말인가? 결국 혐오스럽다고 규정하고 장애인 시설 건축을 막을 것이 아니라 혐오스러움으로 가득한 자신의 마음을 성찰하거나 혐오스러움이 가득한 그들이 떠나면 간단하게 해결되는 것이 아닌가?

장애를 가진 사람도 아무런 이야기 하지 않는다. 장애를 가진 사람들은 그저 사람이라면 누가 되었든 간에 더불어 살면 좋다고 생각한다. 장애를 가진 사람들은 자신의 장애를 혐오스럽다고 말하지 않는다. 자신의 몸(Body)에 장애가 생겼을 때, 처음에는 당황하고 속상하고, 벗어버리고 싶었던 적이 있었다. 그러나 장애가 자신의 몸의 일부분이 되었다고 인정하고 살아가는 그 후로 부터 장애(障碍)는 더이상 벗어나야 할 장애(障碍)가 아니라 그 무엇보다 사랑해야 할 장애(長愛)가 되었다. 게다가 그러한 장애를 사랑해야 할 사람은 자신만이 아니라 더불어 살아가야 할 이웃임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E따라서 어느 누구도 혐오스럽다는 말을 하지도 않고, 할 생각도 없다. 함께, 더불어 살려고 한다면 언제나 환영하기 때문이다.

분당구 야탑동은 서울의 강남과 같이 새롭게 등장한 중산층 도시라고 알고 있다. 아마도 젊고 배움에 있어서도 모자라지 않은 사람들이 살고 있는 곳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러한 곳에서 장애인 시설을 혐오시설이라고 규정하고 건축을 반대한다는 것은 그들을 향한 사회적 기대를 일시에 무너뜨리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단지 분당구 야탑동의 문제가 아니라 한국의 미래를 가늠하는 기준이 될 수 있기도 하기 때문이다. 사실 이들이 가슴에 "혐오스러움"을 가득 안고 장애인 시설을 멀리하는 어리석음이 하루속히 실수였음을 인정하는 계기가 오기 바란다.

만일 이러한 모습이 사실이라면, 이러한 왜곡된 현실을 바로 잡기 위해서 분당구에 속한 교회들이 나서야 한다고 생각한다. 서울에서 성장한 대형교회들이 대거 이동한 지역이 분당구이다. 특히 야탑동에도 그러한 교회가 몇개 있다. 교회가 장애인 시설을 혐오시설로 규정하는 현실을 팔짱끼고 바라만 본다면 이는 대단히 위험한 일이라고 본다. 왜냐하면 분당구 야탑동에 소재한 교회에는 장애인 부서가 있는 교회도 있고, 동시에 장애인과 가족들이 출석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야탑동에 장애인 복지관이 들어서는 것을 우선 반기는 사람들이 바로 이 교회를 다니는 장애를 가진 교인들이기 때문이다.

더나아가 예수님이 사랑했던 수많은 사람들 중에 가장 먼저 특별히 사랑했던 사람이 누구인가? 바로 장애를 가진 사람들이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정신을 실천에 옮기는 곳이다. 따라서 이 지역 교회는 그러한 심정으로 장애를 가진 사람을 섬기고 있을 뿐 아니라 지역 내의 장애를 가진 사람에게도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 따라서 교회는 장애인 시설을 혐오시설(嫌惡施設)에서 호감시설(好感施設)로 바꾸는 사역을 시작해야 한다. 바로 이것이 교회가 해야 할 일이다. 그것은 간단하다. 장애인 시설을 혐오시설로 규정하고 반대하는 사람들 마음에 그리스도의 사랑을 심는 것이다. 그리고 장애인과 떨어져 살고 싶어하는 사람들을 장애인과 더불어 살고 싶어하는 사람으로 변화시키는 것이다. 그것은 교회가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다가가면 가능하다.

여러 해전에 수서 지역에 정서장애아 학교인 밀알학교가 들어서는 것을 아파트 주민들이 강력하게 반대했던 일이 생각난다. 그들은 일알학교를 짓지 못하도록 고발하여 재판을 통해서 결론을 내려 했지만, 그들을 패소했다. "장애인 시설을 혐오시설로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 법정 판결이었다. 이후 밀알학교는 건축되었다. 정서장애아 학교인 밀알학교가 건립 된 이후 수서지역에 아파트 값이 떨어졌다는 소식을 들을 수 없다. 오히려 아파트 주민들이 법정에서 패하였지만 지금은 모두 승자라는 사실이다. 밀알학교에서 시행하는 음악회, 미술 전시회 등에서 밀알학교에 다니는 장애인, 가족, 그리고 아파트 주민들이 함께 하여 즐거움을 나누고 있기 때문이다.

밀알학교로 인하여 아파트 주민들은 봉사의 기회, 예술감상을 통한 정서적 공감대 형성, 문화예술 참여의 기회, 무엇보다 장애를 이해하고 더불어 사는 사회를 만드는 주역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일이 이루어진 배경에는 밀알학교가 예수 그리스도의 정신으로 주어진 사명을 감당하는 것이다. 어느 누구도 원수로 삼지 않고, 친구로 만드는 아름다운 행보는 지금도 지속되고 있다. 분당구 야탑동에 지어질 장애인 복지관이 이렇게 통합의 계기와 호감이 넘치는 시설이 되기를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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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계윤 목사는 장로회신학대학원을 졸업하고, 숭실대학교 철학과 졸업과 사회사업학과 대학원에서 석·박사과정을 수료하였다. 한국밀알선교단과 세계밀알연합회에서 장애인선교현장경험을 가졌고 장애아전담보육시설 혜림어린이집 원장과 전국장애아보육시설협의회장으로 장애아보육에 전념하고 있다. 저서로는 예수와 장애인, 장애인선교의 이론과 실제, 이삭에서 헨델까지, 재활복지실천의 이론과 실제, 재활복지실천프로그램의 실제, 장애를 통한 하나님의 역사를 펴내어 재활복지실천으로 통한 선교에 이론적 작업을 확충해 나가고 있다. 이 칼럼난을 통하여 재활복지선교와 장애아 보육 그리고 장애인가족의 이야기를 나누면서 독자와 함께 세상을 새롭게 하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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