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훈 시인으로부터 사사를 받아 시인이 된 조기섭 교수는 1983년 봄 신학기 개강수업을 하고 곧바로 심한 교통사고를 당했다. 몇 달 동안 수술과 치료를 한 후 회복되어 다시 강의를 하게 되었을 때는 이미 종강 시기였다.

조 교수는 학생들에게 개강과 종강 수업만 하고 강의를 마치는 것에 대하여 미안함을 전하며, “내가 자동차와 충돌한 것은 휴머니즘과 메카니즘의 충돌이었다. 휴머니즘이 메카니즘과 충돌을 하면 휴머니즘만 상처를 입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라고 말하였다.

한 시각장애인이 초등학교 시절 상상화를 그려오라는 미술숙제로 악보를 그려갔다. 점자로 “우리는”이란 글자를 음표로 그린 것이다. 점칸 안에 여러 개의 점이 있으니 악보는 소프라노와 알토가 들어간 화음이 되었다.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조화롭게 소통할 수 있음을 상징한다고 상상한 그림이었다.

음악의 메아리가 다시 돌아와 세상을 행복하게 해 준다는 꿈도 꾸었다. 점 한 칸에 하나의 점만 있는 곳은 2분음표, 좌우 양쪽으로 있는 곳은 4분음표를 그렸다. 그리고 남은 부분은 쉼표를 그렸다. 선생님은 숙제를 장난으로 해 왔느냐며 심하게 꾸중을 하고 그림을 쓰레기통에 넣었고, 시각장애 다빈치 학생은 그 후로 단 한 번도 미술숙제를 하지 않았고, 성적은 항상 ‘가’를 받았다. 그림의 상상력을 인정받았다면 다빈치의 노트처럼 수백억원 가치로 팔렸을지도 모르겠다.

1784년 ‘아위’는 걸인 시각장애인이 던져주는 동전의 소리를 듣고 금전인지, 은전인지 구분을 하는 것을 보고, 교육의 가능성을 깨달아 최초의 특수학교인 파리맹학교를 설립했다.

이 맹학교에서는 글자를 판화처럼 튀어나오게 하여 교육을 하였는데, 이 글자를 선문자(Moon 문자)라고 하였다. 1821년 파리맹학교 봉사활동을 온 찰스 바르비에라는 장교가 군에서 야간에 불빛 없이 만져서 식별하는 암호문자인 야간문자를 전해 주었는데, 학생이었던 루이 브라이유가 이 글자를 쉽게 촉각으로 인지하도록 체계를 갖추어 소노그라피라 하였고, 우리는 이 사람의 이름을 붙여서 점자를 브레일이라고 한다.

처음에는 학교에서 비장애인이 사용하는 글자를 사용하지 않고 이상한 행동을 한다고 점자는 무시를 당했고, 이에 굴하지 않고 브라이유는 지속적으로 연구하여 1829년 나이 20세에 점자를 논문으로 발표하게 된다. 브라이유는 마차 수리를 하던 아버지의 작업장에서 송곳으로 눈을 찔러 시각장애인이 되었으나, 그는 그 송곳으로 점자를 찍어 글자를 익히는 방법을 창안한 것이다.

점자는 특정 위치에 점을 찍든가, 찍지 않든가 하는 방식으로 점을 찍으면 1, 찍지 않으면 0인 2진수로 구성된 기호체계이다. 오늘날 컴퓨터에서 사용되는 바이트를 구성하는 2진수 비트 코드가 바로 시각장애인들이 200년 전 사용한 기호체계였던 것이다.

최초의 컴퓨터는 1946년 미국의 ‘애니악’으로 알고 있으나 사실은 1943년 영국의 ‘콜로서스’이다. 2차 세계대전에서 군사용으로 개발되었다. 퍼스널 모니터는 1973년 ‘제록스 알토’이고, 퍼스널 컴퓨터는 1981년 IBM PC이지만, 시각장애인을 위한 문자판독기는 1960년대에 만들어졌다. 당시 가격이 수 억 원에 해당하였고, 고장이 나면 시각장애 대학생은 한 학기 수업을 포기해야 했다. 스캔하여 문자를 인식하는 OCR 기술이 비장애인 사용보다 20년 앞서 시각장애인을 위해 개발된 기술이다.

이 기술은 스캐너로 발전하였고, 글자를 확대하기 위한 스캔 기술과 확대독서기 카레라 기술이 디지털카메라 기술로 발전하게 된다. 그리고 평면 종이 위에 인쇄 하는 것이 아닌 입체적인 인쇄기술이 점자인쇄를 위해 개발되었고, 이 기술은 후에 3D프린트 기술로까지 발전하게 된다.

우리는 스티브 잡스가 아이폰을 발명하였다고 알고 있는데, 사이먼이 1993년 핸드폰을 개발하였고, 미국재활법에 의해 장애인을 위한 기술개발의 국가지원으로 만들어진 터치스크린과 스크린 온 키도브(화면에 나타나는 자판) 기술을 핸드폰에 추가하여 업그레이드한 것이 스티브 잡스이다.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복지기술은 컴퓨터만이 아니다. 시각장애인의 바느질을 돕기 위해 개발된 바늘꿰기가 노인들에게 효도용 선물로 인기를 얻어서 널리 보급되었고, 양념을 적당량으로 조금씩 나오도록 한 시각장애인 요리기구가 지금은 모든 가정의 주방에 사용되고 있다.

시각장애인은 소리에 의존해 정보를 얻으므로 컴퓨터가 소리를 내어 문자를 읽어주도록 꾸준한 연구가 이루어져 왔다. 미국 국방부 해군청 기밀 기술이 시각장애인을 위한 음성출력기로 개발되어 ‘스피퀄라이저’란 제품이 도스 버전으로 나왔는데, 8만 발음사전이 들어 있어 가격이 4백만원 정도였다. 그 후 저렴한 가격대의 ‘신포닉스’ 등이 출시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1992년 아시아시멘트 계열사인 디지콤에서 ‘가라사대’라는 음성합성기가 만들어졌는데, 건물보안을 위해 고안되었다. 침입자를 음파로 감지하면 음성으로 경고를 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 제품은 음질이 낮은 기계음으로 개발 목적에 거의 사용되지 못하였고, 일기예보와 시보알림 ARS에 사용되다가 시각장애인이 컴퓨터 접근을 위해 사용하면서 매출을 올리게 되었다.

시각장애인이 길을 걸으면서 장애물에 부딪히지 않도록 하기 위해 흰지팡이에 레이저를 부착하였는데, 가격이 너무 비싸 제대로 보급되지 못하였고, 초음파 감지기로 목걸이를 만든 것이 현재는 자동차의 후진시 장애물을 감지하는 백레이더로 사용되고 있다. 번화가에서 지나가는 사람과 동물까지 계속 장애물로 인식하여 신호를 주고 낭떠러지와 같은 위험장소에서는 아무런 신호도 주지 않아 시각장애인은 오히려 이 기구는 방해물이 되었다.

퍼스널 컴퓨터는 사무용과 문서작성, 게임용으로 시작하여 음악과 인터넷으로 발전하였는데, 시각장애인은 컴퓨터에 의해 악보를 그릴 수 있게 되었고, 작곡가나 노래방 음원 파일을 만드는 일로 시각장애인의 새로운 길이 열리는 듯하였다. 하지만 비장애인의 경쟁사회 속에서 살아남기란 매우 힘든 일이었다. 시각장애인이 매킨토시나 IBM 컴퓨터를 다른 장애 유형보다 먼저 사용하여 정보화가 된 것은 따뜻한 기술의 도움이라기보다 시각을 대신해 줄 방안으로 유일한 방법이라고 믿었던 갈증 때문이다.

한컴에서 외국의 기술이 아닌 우리의 한글을 독자적으로 사용하기 위해 ‘아래 한글’을 개발하던 초창기에 사무실을 얻을 비용조차 없었다. 이를 후원한 분이 공병우 박사로 그는 시각장애 재활원을 운영하고 있었고, 그 재활원의 방을 연구실로 제공해 주었다. 그곳에서 자연스럽게 시각장애인과 교류를 하게 되었고 어깨너머로 배운 컴퓨터 프로그램 개발기술로 한컴 이사에까지 오른 시각장애인이 나왔다.

이렇게 장애인을 위해 개발된 정보기술이 비장애인의 원천기술로 전파된 사례가 무수히 많은데 시각장애인들은 그 기술발전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고 소외되고 말았다. 지체장애인이 비장애인과 달리기를 하면 이기기 어렵다. 하지만 비행기를 타고 미국으로 가면 장애인과 비장애인은 도착시간이 같을 것이다. 이러한 비행기 역할을 하는 것이 기술이라고 여겼으나, 가장 불편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고안된 기술은 덜 불편한 사람들이 더욱 편하게 사용되는 기술로만 사용되고 장애인들을 외면하고 말았다.

산업혁명은 인류를 획기적으로 새로운 풍요를 가져다주고, 삶의 양식을 바꾸었는데, 새로운 삶의 양식을 장착한 사회는 오히려 장애를 만드는 사회였던 것이다. 혁명은 초심을 잃고 사업화와 수익, 시장화가 되면서 장애인은 주변인으로 밀려났다. 이는 휴머니즘이 메카니즘을 낳았으나 호랑이 새끼를 키워 배신을 당하고 만 셈이다. 그리고 최소한의 생활을 보장한다면서 부스러기를 던져주고 있다. 언젠가는 이러한 메카니즘은 장애인만이 아니라 비장애인까지 인간 사회 전체를 삼키고 말 것이다.

유엔은 인간이 존중되고 자유와 평등을 동등하게 누리는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어가는 것을 사회개발이라고 한다. 우리는 사회간접자본인 시설물들을 건설하는 것만을 개발이라고 잘못 알고 있다. 인간은 권력과 혜택을 같이 나누는 공존하는 존재이고, 바이러스는 자신이 살기 위해 독을 품고 결국 숙주를 죽이고 자신도 죽고 만다.

제도나 기업이나 정부의 정책이 준법과 도덕성을 정의라고 하지 않고, 공존을 정의라고 바르게 안다면 소통이니 통합이니 하는 문제는 저절로 해결될 것이다. 이제 메카니즘에게 인간이기를 요구해야 한다. “당신은 인간입니까?”라는 질문은 인간이 아닌 메카니즘에게 물어야 한다.

과도한 부담이 되어 장애인을 위한 배려를 할 수 없다고 버티면서 장애인의 희생을 방치할 것이 아니라 우리가 누리는 모든 기술을 가장 불편한 이들을 위해 먼저 사용한다면 그 기술은 모든 이를 위한 원천 기술로서 진정한 혁명 사회를 만들어 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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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인환 칼럼니스트
현재 사단법인 장애인인권센터 회장, 한국장애인고용안정협회 고용안정지원본부장을 맡고 있다. 칼럼을 통해서는 아·태 장애인, 장애인운동 현장의 소식을 전하고 특히, 정부 복지정책 등 장애인들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는 이슈에 대해 가감 없는 평가와 생각을 내비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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