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1 20대 대통령 후보자 토론회 장면. ⓒKBS 캡처

나는 대한민국 국민이며, 한국수화언어(이하 한국수어)를 제1언어로 사용하는 농인이다.

어제(3일) 20대 대통령선거 후보자 4명이 모두 참여하는 TV 토론회가 처음으로 열렸다. 나도 유권자 중의 한 사람으로 후보자들의 공약과 정책이 궁금해서 기대 반 걱정 반으로 TV를 켰다.

여러 명의 후보자 발언을 한 명의 수어 통역사가 일일이 전달하고 있는 이번 TV 토론회는 후보자의 공약이나 내용을 보기 전에 ‘지금 저 발언은 누구의 발언일까? 이걸 맞추기 위해 작은 원형의 수어 통역 화면을 뚫어지라 보고 나면 모든 힘이 빠져버렸다.

지난 TV 토론회 이후 국가인권위원회에서도 “2인 이상 수어 통역사를 배치하라”라는 권고가 내려진 만큼 ‘이번에는 바뀌었겠지’하는 기대감으로 TV를 켠 지 30분 만에 나는 다시 ‘오징어게임 드라마 속의 징검다리 게임’을 하고 있었다.

후보자 두 사람 중에 누가 발언하고 있는 거지? 오른쪽? 왼쪽? 그러다가 갑자기 화면이 바뀌며 4명이 동시에 나오면 내 눈동자는 쉴 새 없이 움직였다. ‘갑자기 왜 4명이 동시에 나오지?’ 그렇게 나는 TV 토론회가 진행되는 120분 동안 어느 쪽일까를 맞추는 ‘징검다리 게임’만 하다 끝나버렸다.

그렇게 별 소득 없이 끝나버린 TV 토론회를 마무리하며 나온 뉴스 화면에서는 때마침 오늘이 ‘한국수어의 날’이라며 앵커와 수어 통역사가 일대일로 나타나 수어 인사를 하는 장면이 연출되었다.

토론회의 작은 수어 통역 화면만 보다가 갑자기 커다랗게 나타난 훈훈한 장면에서 씁쓸함을 감출 수 없었다. 물론 좋은 취지로 보여준 장면이지만 앞서 보았던 TV 토론회에서도 이런 배려가 돋보였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들었다.

맞다. 어제는 2월 3일‘한국수어의 날이었다. 지난 2016년 2월 3일 한국수어가 국어와 동등한 자격을 가진 언어로 인정하고 한국수어를 사용하는 농인의 언어권보장과 삶의 향상을 위해 “한국수화언어법”이 제정되었다. 이를 기념하고 한국수어에 대한 국민 인식을 개선하고 농인의 권리 확대를 기여하고자 ‘한국수어의 날’이 2021년부터 시행되고 있다.

하지만 이건 그냥 법일 뿐이다. 법에 있는 수어를 제 1언어로 사용하는 농인인 나는 여전히 ‘오징어게임’보다 더 힘들게 대통령선거 후보자 TV토론회를 볼 수 밖에 없는 게 현실이다.

단 하루, 보여주기식의 이벤트나 문서 속에 고스란히 잠들어 있는 법이 아닌, 정말 나의 언어권을 제대로 보장받고 싶다. 내 삶을 바꿀 수 있는 대통령을 제대로 선택할 수 있도록 ‘후보자 1명에 수어통역사 1명’ 배치가 빨리 이루어져 이 ‘오징어게임’에서 하루빨리 벗어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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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샛별 칼럼리스트
경도농아인협회 미디어접근지원센터에서 농인(청각장애인)을 위한 보이는 뉴스를 제작하며, 틈날 때마다 글을 쓴다. 다수 매체 인터뷰 출연 등 농인에 대한 인식개선을 위해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농인 엄마가 소리를 알아가는 아이를 키우면서 겪는 일상의 이야기를 풀어내면서 수어와 음성 언어 사이에서 어떤 차별과 어려움이 있는지, 그리고 그 어려움을 일상 속에서 잘 풀어내는 과정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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