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상에 앉아 있는 한 남자가 사과가 그려진 카드를 맞은 편에 앉은 여자에게 보여주고 있음. 밑에는 What we think about therapies라는 문구가 있고 바로 밑에는 Reframing Autism 문구가 있음. ⓒReframing Autism

나란 사람, 참 많이 변했다. 겉모습은 예전과 크게 달라지지 않았지만, 나는 더 이상 10년 전의 내가 아니다. ‘사람은 고쳐 쓰는 게 아니다.’란 말이 자주 회자되는 걸 보면 사람은 잘 변하지 않는 듯 하지만, 가끔은 예상치 못한 계기를 만나 얼마든지 다른 사람으로 거듭 나기도 한다. 그 강력한 계기가 나에게는 자폐인 아들이고, 매일의 동행 과정 자체가 ‘자폐의 맛’이자 ‘인생의 맛’이 되었다, 적어도 나에게는.

공식 진단을 받기 전, 벤을 우리 부부는 ‘아스퍼거 증후군’이라 자가 진단을 내렸고 그렇게 불렀다(만약 ‘아스퍼거 증후군’이란 용어에 트리거가 작동하는 자폐 당사자가 있다면 용서를 구한다).

2014~2015년 사이에 막 내가 발달 장애의 세계에 입문했을 때, 인터넷과 한국어로 번역된 전문 서적들을 찾아보면 거의 모두가 그렇게 명명하고 있었으니 나의 잘못만은 아니다.

미국 정신의학협회에서 발행한DSM(Diagnostic and Statistical Manual of Mental Disorders, 정신장애 기준과 편람) 5차 개정판에서 아스퍼거 증후군과 서번트 증후군 등을 ‘자폐성 장애(Autism Spectrum Disorder)’로 통합한 것은 2013년의 일이다.

2016년, 호주에 왔더니 한국과는 상이하게 아스퍼거 증후군이란 용어는 이미 오래된 화석과 같은 용어 취급을 받고 있었다. 물론 2013년 이전에 진단을 받고 본인의 정체성을 ‘아스피(아스퍼거 증후군 사람들을 일컫는 말)’라 받아들인 사람들의 입장은 그대로 존중하면서 새로운 진단은 “자폐성 장애”로 통합시키고 있었다.

“나는 아스피도, 고기능 자폐도 아닌 그냥 자폐인이야.”

성인이 되어서 진단 받은 로컬 지인이 이런 말을 할 때는 많이 혼란스러웠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게 아들의 자폐를 꽁꽁 감추고 싶던 시절이었다. 호주에 와서 “아스퍼거 증후군 = 자폐”란 사실을 알게 되고도 나는 한동안 아들을 아스퍼거 증후군이라 불렀다. 솔직히 고백하면 그렇게 부르고 불리고 싶었다. 그만큼 자폐는 너무 무서웠다.

비장애인들의 세계에서 ‘능력주의(에이블리즘)’가 판을 치고 다양한 사회적 문제를 야기한다면, 그에 못지 않게 아니 어쩌면 더 심하게 능력주의의 직격탄을 받는 곳이 장애계, 그 중에서도 으뜸은 자폐계가 아닐까 싶다. 다른 장애와는 다르게 자폐계에 헤아릴 수도 없이 난무하는 수 많은 치료와 그 부작용들을 생각해 보면 된다.

경험상, 자폐계에 능력주의가 만연한 이유는 장애가 쉽게 드러나지 않는 경우가 흔하기 때문이다. 신체 장애나 다운증후군처럼 한 눈에 장애가 구별되지 않는 경우가 많으니 가장 먼저 부모가 장애를 인식하는 일도 받아들이는 일도 비자폐인 아이에게나 맞는 기대를 내려 놓는 일이 지독하게도 어렵다.

무슨 말이냐면, 다운 증후군 아이를 앞에 놓고 다운증후군을 부정하기는 쉽지 않으나, 자폐 아이를 두고 부모가 자폐를 부정하는 일은 비일비재하다는 뜻이다.

다운 증후군 아동이 중등이나 성인이 되어서 진단을 받는다거나, 또는 죽을 때까지 진단받지 않고 살아갈 일은 거의 없겠지만, 자폐계에서는 흔하고 흔한 일이다.

내 주변엔 중등이나 성인이 되어서 자폐 진단 받은 사람, 아이와 함께 진단을 받으려는 부모, 아직 공식적인 진단은 받지 않았으나 본인이 이미 자가 진단을 내린 사람, 아직 본인이 자폐인이란 자각을 하지 못하고 사는 사람 등 너무나 다양한 사람들이 있다.

“내 아이가 자폐인 이에요” vs “내 아이가 아스퍼거 증후군이에요.”

위 두 문장이 주는 임팩트는 상당히 다르다. 앞 문장은 상대를 당황시키고 압도하기 충분하고 때론 뭐라고 답해야 하는지 어디에 눈길을 둬야 할지도 몰라 허둥대는 사람들을 만날 가능성이 높다면, 뒷문장은 뭔가 시크한 맛이 있고 내 아이의 장애를 감추거나 가벼운 증상 쯤으로 포장하기에 안성맞춤일 때도 많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내가 자폐를 잘 이해하지 못한 만큼, 내가 지닌 자폐에 대한 오해와 편견과 혐오 만큼 비례해서 ‘아스퍼거 증후군’이란 용어에 집착했다.

언어는 막강한 파워를 지닌다. 그래서 소수자와 약자의 세계는 곧 언어와의 투쟁이 되기도 한다. 하이데거가 말했던가,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고. 인간이 언어를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언어가 인간의 사유를 지배한다는 뜻인데 자폐인들의 세계는 대부분 비자폐인들에 의해 규정된 수동적이고 부정적인 언어들로 점철되어 있고, 결과적으로 이 언어들이 다시 긴 시대를 관통하며 사회 구성원들이 자폐를 낙인과 혐오의 대상으로 박제하는 역할을 지지한다.

자폐인들의 관점에서 정립된 건강하고 올바른 언어가 부재하는 주된 이유는 이들이 사유할 줄 모르고, 언어를 모르고, 표현할 줄 몰라서라기 보다 적절한 기회와 교육, 장소를 제공받지 못한 이유가 크다.

국가를 불문하고 수 많은 자폐 당사자들이 기존의 오염된 언어들을 당사자들의 주체적인 언어로 고치려는 의욕적인 시도들, 충분히 이해가 가고도 남는다. 심지어 호주의 자폐 당사자 기관에서는 자폐 당사자들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치료의 정의, 좋은 치료와 나쁜 치료에 대한 안내집 등을 만들어 자료를 공유하여 부모나 교육자 또는 다양한 치료 기관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 좋은 자료가 되기도 한다.

언어를 빼앗긴 부족은 정체성과 문화를 박탈당하고, 반대로 언어를 확보한 부족은 강력한 부족으로 다시 재건한다. 그래서 두 부족이 사는 우리 집에는 자폐인의 언어와 비자폐인의 언어가 공존한다.

벤의 상동 행동, 반향어, 반복적이고 의례(ritual)를 사랑하는 일, 멜트다운을 자주 겪는 일, 감각 추구와 감각 회피를 동시에 겪는 일, 강렬한 흥미 활동 등 자폐인으로서의 특성들을 다시 긍정의 언어로 재구성하기 위해 노력한다(우리 집에서 엄마인 내가 가장 더디다). 더불어 점점 커가는 아들이 또래 들과는 ‘다른’ 모습의 본인을 부정하지 않고 라디컬(radical)하게 수용하는 법을 함께 일하는 치료사들과 협업으로 가르치고 있다. 그리고 나는 이걸 “치료(therapy)”라 부른다. 본인의 몸과 행동, 감정을 읽어내고 스스로 표현하는 언어를 갖는 일은 자폐인 뿐만 아니라 누구에게나 중요한 자기 옹호의 기술이기도 하여 덕분에 나 또한 내 삶을 스스로 옹호하는 강한 사람으로 변모했다.

“벤은 자폐를 지닌 사람(person with autism)이 아니고, 자폐인(Autistic person)이에요.”

이제는 나도 이렇게 말하는 사람으로 변신했다. 그것도 대문자 “A”로 시작하는 자폐인(영어에서 대문자 “A”로 표기할 때는 정체성과 문화로 규정했다는 뜻이다). ‘자폐를 지닌 사람’과 ‘자폐인’은 큰 차이가 없어 보이지만, 실상 이 두 언어는 어마 어마한 차이를 지닌다.

2016년 Kenny와 그의 동료들이 성인 자폐인들을 대상으로 조사를 한 결과 참여자의 61% 가 ‘자폐인’으로 불려지기를 원했고, 28%만이 ‘자폐를 지닌 사람’으로 불려지기를 선호했다고 한다. 이때 “자폐를 지닌 사람”은 사람 우선 언어(person - first language)이고 “자폐인”은 정체성 우선 언어(identity - first language)다.

대개의 사람들이 ‘자폐를 지닌 사람’이라고 사람 우선 언어를 사용할 때는 ‘자폐’나 ‘장애’보다 사람을 우선에 두겠다는 좋은 의도를 포함한다. 그런데, 이 언어의 함정은 자칫 자폐 뒤에 진짜 모습의 온전한 사람이 존재한다는 오해와 착각을 불러일으켜서 자폐를 당사자와 분리(without) 가능한 것쯤으로 받아들이기 쉽고 따라서 맹목적인 치료에 매달리게 하는 주된 이유가 되기도 한다.

또한 자폐를 정체성으로, 본인의 장애를 사회적 관점에서 받아들인 당사자의 입장에서 본다면, 사람 우선의 언어는 ‘자폐’나 ‘장애’를 이미 열등하거나 부정적인 요인으로 간주한다는 생각에 불쾌한 이유가 되기도 한다.

그래서 나는 벤을 ‘자폐인’이란 정체성 우선 언어로 부른다. 호주에 살아서 약자의 위치로 전락하기 쉬운 내가 ‘한국인’이란 사실이 부끄럽지도 열등하지도 않다면 굳이 ‘한국인’이라 불리기를 꺼려야 할 일이 없는 것과 유사하다. 타인이 나를 뭐라 부르던, 나의 정체성과 문화의 뿌리와 근간은 한국인임을 부정할 수 없는 이치와 같다고나 할까.

이제는 안다. 벤의 머리 끝부터 발끝까지 어느 것 하나 자폐가 관여하지 않는 부분이 없다는 사실, 아들이 세상을 바라보고 느끼고 인지하고 생각하고 표현하는 모든 것들이 자폐의 영향을 받지 않은 것이 없다는 사실, (가능하지도 않지만) 자폐를 거둬내면 이미 내가 이토록 사랑하는 고유한 칼라를 지닌 아들이 더 이상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 그리고 내가 사랑한 아이는 한번도 비자폐인 이었던 적이 없었고, 내가 숨이 멎는 날까지 자폐인으로 살 거라는 사실. 즉 자폐가 아들을 규정하고 자폐가 아들의 정체성이다. 나에게 아들의 자폐는 함께 한 시간들만큼 익숙해져서 이 정도의 다름으로 다가온다.

“당신은 왼손잡이네요.”

이제 가급적 호주의 많은 자폐 당사자들이 극도로 기피하는 구시대적이고 자폐를 계급화하는 능력주의 용어인 ‘아스퍼거 증후군’이나 ‘고기능 자폐인’이란 용어를 사용하지 않는다.

가장 큰 이유는 내 아들이 자폐인이란 사실에 문제가 없기 때문이고, 굳이 내 아들이 속한 부족들이 싫어하는 언어를 써야 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고, 또 하나는 이렇게 하는 일이 자폐를 정확하게 세상에 알리는데 유리하고 그들의 위상을 높이는데 기여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리고 가장 중요하게는 이 방법이 빼앗겼던 우리 가정의 들에 다시 봄이 오는 첩경이었음을 부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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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루나 칼럼니스트 아이 덕분에 통합교육, 특수교육, 발달, 장애, 다름, 비정형인(Neuro Diversity), ADHD, 자폐성 장애(ASD)가 세상을 보는 기준이 되어버린 엄마. 한국에서 교사로 재직하다 아이가 발달이 달라 보여서 바로 호주로 넘어왔습니다. “정보는 나의 힘!” 호주 학교의 특수·통합교육의 속살이 궁금해서 학교 잠입을 노리던 중, 호주 정부가 보조교사 자격증(한국의 특수 실무사) 과정을 무료로 제공한다는 소식을 접하고 냉큼 기회를 잡아 각종 정보를 발굴하고 있는 중입니다. 한국에서 일반 교사로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호주의 교육(통합/특수)을 바라보고, 아이를 지원하는 호주의 국가장애보험 제도(NDIS) 등에 대해 주로 다룰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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