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사가 재판에서 증거를 입증하는 모습을 상징적으로 그린 그림. ⓒPixabay

장애계 단체와 함께 UN장애인권리협약 민간보고서를 작성할 시 국가 보고서 내용을 볼 때가 있었다. 보고서 내용 중 거짓인 내용이 있을 시 이에 대해 통계로 입증할만한 자료를 찾지 못할 때가 있었다. 정황상으론 거짓임을 알지만 말이다. 그럴 땐 거짓이라는 걸 확실히 입증하지 못하니 조금은 답답했다.

만약 사람들로부터 관련 자료가 어디 있는지에 대해 조언과 힌트를 얻은 후, 입증할만한 자료를 스스로 찾아, 그 내용을 쓰고 장애계와의 논의를 통해 이게 민간보고서에 반영된다면 뿌듯할 거란 생각은 해봤다. 정부의 거짓된 보고를 아무런 거리낌 없이 확실히 반박하고, 장애인 인권에 도움이 될 테니까.

또한, 일일드라마에서 가해자가 피해자를 해친 다음, 피해자에게 증거 있냐고 조소하면서 증거를 인멸하려고 노력하지만, 피해자나 피해자 측 변호사가 확실히 가해 당했음을 입증하는 빼도박도 못한 증거들을 내세워 입증하고, 그 결과 판사가 가해자에게 유죄 선고하는 장면을 보면 고소하면서도 통쾌한 감정 등의 긍정적 감정들이 나오게 된다.

그런데 9월 25일, 새 주말드라마 <신사와 아가씨>가 시작하면서 이런 내용이 나온다. 26년 전, 박단단이란 아기를 안은 박수철(이종원 분)과 같이 사는 게 답답하다 해서 그의 아내 김지영(이후 애나킴으로 개명, 강세정 분)은 단단, 수철을 버리며 택시를 탔다.

마음이 힘들었지만, 그래도 박수철은 김지영을 사랑했다. 지영에게 디자이너가 되고픈 꿈이 있음을 잘 안 박수철은 미국으로 떠나는 그녀를 응원하러 자신의 마음을 담은 편지와 돈을 가지고 공항으로 갔다. 하지만, 공항에서 지영이 다른 남자와 함께 나타난 걸 본 박수철은 배신감이 든 채 아기와 함께 힘든 마음을 삭이려 했다.

박단단이란 아기를 안고 있는 박수철(이종원 분)이 동사무소 직원으로부터 혼외자 출생신고에 대한 사항을 들으며 화나 있는 듯한 모습. ⓒKBS드라마 동영상 캡처

이후 출생신고를 하러, 박수철은 동사무소로 간다. 그런데 동사무소 직원으로부터 혼인 외 출생자 출생신고는 엄마만 할 수 있다는 말을 듣는다. 박수철과 김지영이 혼인신고, 출생신고를 하지 않았던 게다. 배신의 충격 때문인지, 박수철은 단단 엄마가 죽었고, 엄마 없는 애는 출생신고 못 하는 거냐면서, 자신이 단단의 아빠라고 직원에게 말한다.

이에 직원은 내 마음대로 할 수 없고 법이 그렇다며, 수철이 단단의 아빠란 증거가 어디 있냐고 따져 묻는다. 이 말을 들은 박수철은 어이가 없는 나머지, 내 딸인데 무슨 증거가 필요하냐며 직원의 멱살을 잡는다.

이 장면을 보며 조금은 화가 났다. 출생신고 하지 않으면 건강보험 적용되지 않음은 물론, 양육비 지원 등의 사회복지서비스를 받지 못한다. 이런 경우 혼외 출생자는 인간다운 삶을 살기 어려워지는 거다. 드라마에서 단단과 수철이 혈육이라 설정했으니, 혈육인 게 너무도 당연한데, 증명하라니? 너무도 당연한 건 증명할 필요도 없는데, 증명하지 못하면 인간다운 삶 꿈꾸지 말라는 얘기와 같으니 황당하면서도 분노가 오른다.

올해 생모가 특정되었는데도, 소재가 불명확하거나 정당한 이유 없이 출생신고를 위한 서류 제출에 협조치 않는 경우 등에는 미혼부가 생모를 대신해 출생신고를 할 수 있도록 법이 개정돼 그나마 다행이다. 하지만 그전까지 생모가 신고하지 않으면 혼외 출생자는 출생신고를 할 수 없으니, 관련 당사자들은 얼마나 기막히고 가슴이 찢어졌을까?

이런 배경을 생각하니, 드라마에서 아이의 아버지임을 입증하라는 동사무소 직원의 말은 상당히 모욕적으로 들린다. 그러니까 증거 입증은 이런 때 상식적이지도 않고 상당히 모욕적이란 거다.

2021년 4월 15일 판결 직후 장애인차별금지추진연대(장추련), 전국장애인부모연대 서울지부 등이 “반인권적 판결”이라고 저마다 사법부를 비판하며 대법원 앞에서 기자회견을 개최한 모습. ⓒ에이블뉴스 DB

작년 11월엔 대법원에서 4세의 자폐성 장애아동에게 강제로 양치질, 식사를 시킨 유치원 특수교사에게 2심에서 무죄를 선고하고 올해 4월엔 2심 판결을 대법원에서 확정했다. ‘교육의 목적이나 의도가 있다면’, ‘학대에 고의성이 없다면’이 이유였단다.

이에 대해 한 변호사는 괴롭힐 생각이 가해자 내면에 있었음까지 입증해야만 할 형국이라며, 이 선고를 신랄히 비판했다. 그도 그럴 것이 장애아동은 사회적 약자라 이들에게 교육이란 명목으로 가한 학대에 대해선 엄중 처벌해야 하고, 심지어는 종신형까지 가야 한다고 본다. 그러면 종신형 선고될 정도의 증거들이 있어야 하고, 이것들을 입증해야 한다.

그런데 아동은 자신이 학대받은 것에 대해 정확히 진술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으며, 장애아동의 경우는 더욱 그렇다. 그러기에 학대에 대한 증거능력을 인정받기 어렵고 가해자들은 대개 집행유예나 무죄로 풀려나기가 쉽다. 그러니까 가해자 학대 의도가 가해자의 내면에 있었다는 것까지 입증하는 수준이어야 증거능력을 인정받아 겨우 처벌할 수 있을까 말까 할 정도인 거다. 결국, 가해자에게 유리하게 되는 거다.

가해자 내면까지 입증해야 할 형국이라면 증거 입증은 보람은커녕 상당히 힘들고, 이게 너무 심할 정도가 되면 피해를 받은 장애아동 당사자 측에겐 짜증 나면서도 좌절감, 굴욕감, 모욕감이 들 거다. 어느 정도까지 해야 가해자가 중죄를 저질렀다는 증거를 받아들여 제대로 된 처벌이 내려질 수 있으려나?

그래서 피해 장애아동 측의 입증책임을 100% 지우는 것을 완화하는 방안을 고민해 재판이 공정해지는 방법을 찾아 제대로 된 처벌을 실행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작년 8월 21일 장애등급제·부양의무제 폐지 공동행동 광화문 농성 3주년을 맞아 개최한 문화제 진행모습(좌측), 문화제를 보고 있는 청중들 모습(우측). ⓒ이원무

국민기초생활보장법의 부양의무제와 관련해서도 말들이 많다. 생계급여에 대해선 폐지 단계를 밟고 있는데, 의료급여는 아직도 유지 중이다. 힘든 경제 상황인데, 의료급여라도 받아내려면, 같은 가구에 속하지 않으며 자신의 영역에 있지 않은 부양의무자의 소득과 재산은 물론 의무자와의 가족관계 해체까지 증거로 내밀어 입증해야 한다.

가난과 가족 해체를 입증해야 하고, 입증을 계속할수록 가난한 사람이 돈을 구걸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드니 수급권임에도 수치심이 들지 않겠는가? 그래서 적절한 생활 수준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가난과 가족관계 해체 증명을 통해 수치심을 주는 부양의무제를 전 급여영역에 걸쳐 전면 폐지하고, 저소득 장애인의 소득을 보전할 수 있는 보충급여제 실시를 위한 고민과 노력을 해야 하지 않겠는가?

정리하면 세상을 좋게 만들기 위해 증거를 수집·입증할 때 정말 뿌듯하다. 하지만, 장애아동 학대 가해자에게 유리한 판결, 부양의무자와 관련된 기초생활 급여 등과 관련된 증거 입증과 관련해선 모멸감·수치심·좌절감·굴욕감 등의 부정적 감정들이 들게 된다. 이렇게 ‘증거 입증’은 양면 감정으로 내게 다가와 뿌듯함이란 감정, 그리고 이와는 정반대의 모멸감·수치심 등의 감정을 느끼게 만든다.

너무 빈약하게, 그렇다고 지나친 정도도 아닌 딱 적당한 정도의 ‘증거 입증’을 하고 가해자에게 유리하거나 피해자가 더욱 피해 보는 게 아닌 상식적이고도 공정하고 옳은 방식으로 증거를 받아들임으로 모멸감 등의 부정적 감정이 눈 씻고도 들지 않도록 하는 이 사회가 되었으면 한다.

그래서 서로가 함께 신뢰하고 어울려 정의롭고 인간다운 세상을 만들어가며 사람 냄새 물씬 풍기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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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과 팝송 감상, 월드컵 등을 즐기고 건강정보에 관심이 많은 반백년 청년이자, 자폐성장애인 자조모임 estas 회원이다. 전 한국발달장애인가족연구소 정책연구팀 간사였으며, 유엔장애인권리협약 정부심의 대응을 위해 민간대표단의 일원으로 2번 심의를 참관한 경험이 있다. 칼럼에서는 자폐인으로서의 일상을 공유하고, 장애인권리협약, 장차법과 관련해 지적장애인, 자폐성장애인과 그 가족이 처한 현실, 장애인의 건강권과 교육권, 접근권 등에 대한 생각을 솔직하게 나눌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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