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도쿄 패러림픽 폐막식에서 공연된 제목이 “조화로운 불협화음‘이었다. 무엇인가 큰 의미를 담으려고 애쓴 흔적이 보인다. 장애인도 표용하여야 할 대상이고, 장애를 다양성으로 보고자 한 것이다. 올림픽에서 도쿄 도시를 다양성으로 포용하는 도시로 나타내고자 한 것과도 일맥상통한다.

이를 한번 꼬아서 장애는 불협화음인데, 포용하여 조화롭게 해야 한다고 해석하고 나면, 장애를 수용하는 태도를 나타내는 것 같은데, 장애를 우리가 품어야 할 문제대상이라고 한다면 시혜적 의미를 포함하고 있는 느낌도 든다.

조화는 안정과 질서를 의미하고 어울림, 전체를 의미한다. 하모니 또는 코스모스이다. 신학이나 철학에서는 우주는 조화이고, 지상은 부조화이다. 불협화음은 개별을 의미하고, 무질서를 의미한다. 새로운 질서에는 항상 무질서와 파괴가 따른다. 그런데 장애인 개인을 불협화음이라고 말하는 것에는 거부감이 든다. 거부감이 드는 이유는 불협은 부정적 의미라는 것이고, 포용을 통해 치유한다는 것처럼도 느껴지기 때문이다.

뉴욕대학 부속병원 재활센터 입구에 ‘어느 이름 없는 장애인의 기도’가 붙어 있다. 이 시에서 유사한 반어법이 사용된다. “신에게 힘을 달라고 하였으나 연약함을 주어 겸손을 가르쳐 주었고, 건강을 원했으나 신은 가치 있는 일을 하라고 병을 주셨고, 부유함을 원했으나 가난을 주어 지혜를 가지게 했으며, 성공을 원했으나 실패를 주어 교만하지 않게 했으며,. 아무것도 주지 않아 모든 것을 가지게 하셨다.”

이 시에다가 “하늘의 별 하나로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수많은 별들이 조화를 이루어 아름다운 밤하늘 수를 놓는다.”라는 문구를 추가하여 대구대학교 점자도서관에서는 방문하는 이들에게 점자를 함께 표기하여 나누어주기도 했다.

여기서 장애인의 기도에서는 가진 자의 거만보다는 약자의 겸손을 이야기한 아름다운 철학이 담겨져 있는 것 같은데, 가난한 사람은 화재나 도둑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마음의 부자라는 말처럼도 들릴 수 있다. 가진 자가 이런 말을 한다면 약자를 두 번 울리는 말이고, 약자가 말한다면 변명처럼도 들린다. 배부른 돼지보다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낫다고 하면 배고픈 빈민에게 위로가 될까? 유행가 가사에 차라리 그대를 보지 못할 바에야 눈을 멀고 싶어라고 한다면 이미 장애인이 된 사람에게 위로가 될까?

굳이 요한복음 9장 3절에서의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 장애인이 된 것’이란 말씀을 인용하지 않더라도 시각에 따라 비관하지 않고 긍정의 에너지를 가질 수 있고, 현재에 대해 가치를 인정하고 수용하는 힘을 가질 수도 있다.

모차르트가 하이든에게 헌정한 곡 중 K465가 불협화음이다. 하늘의 완벽함을 나타내기 위해 협화음을 사용하는데, 지상의 불협화음을 나타내기 위하여 음산한 기분마저 들도록 맞지 않는 화음을 사용하여 조화로움을 표현한 것이다. 불협화음의 반대말은 조화가 아니라 협화음이며, 불협화음으로도 조화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닐루파 갤러리를 운영하는 가구 아티스트 니나 야사르는 이란 출신 아버지와 문화 다양성이 모이는 이탈리아 출신인 자신이 나타내는 것은 조화로운 불협화음이라며, 이는 직관이며 타고난 끼에서 발견되는 감각이라고 했다.

시대, 문화, 분야를 초월하는 조화를 시도하여 많은 호응을 받았다. 이런 가구에서의 문화 초월성은 각 문화의 개성이 모여 조화를 이루는 것으로 여성과 남성이 있지만, 서로 조화를 이루기도 하고, 여성이기에 행복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장애인이기에 행복하다라고 말하기에는 인정하기 힘든 부분이 존재한다. 여성이 불행은 아니지만 장애인은 불행이란 의미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남녀 간에도 서로 달라서 조화가 있지만, 영원히 갈등해야 하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H 형제의 조화로운 불협화음 블로그에서는 배려가 조화를 이룬다고 하고 있다. 조화를 위해 상호인정과 배려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장애인을 배려하지 않는 사회가 문제인 것은 맞지만, 장애인을 배려한다는 것이 시혜적 의미가 담겨져 있는 것 같아 누려야 할 당연한 권리라는 점에서 배려라는 단어는 좀 맞지 않는 듯하기도 하다. 상호 동등하지만 다른 경우 배려는 상대를 인정하는 것이지만, 강자와 약자 사이에서 배려는 시혜적 의미가 들어 있다.

도쿄 패러림픽에서 조화로운 불협화음이란 다양성을 강조한 말이며, 차이는 갈등이 아니라 새로운 미래로의 도약을 의미한다고 하였다. 사이토 레나 등 오디션을 통해 선정된 휠체어 댄서들의 화려한 춤을 보여주었다.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춤을 강력한 조명은 먼저 장애인을 비추다가 조화를 상징하기 위하여 원을 그리며 모든 출연자를 하나로 묶고, 그 원이 좁아져서 상승하여 하나의 점이 하나가 됨을 상징해 주었다.

조화로운 불협화음은 상당히 파격적인 표현이다. 불협화음도 잘 사용하여 조화롭게 할 수 있다는 긍정적인 의미를 가질 수 있다. 하지만 전체는 조화인데, 개인은 불협화음이란 의미가 있기도 하고, 조화롭게 하는 과정이 필요한 의도된 구조도 필요하다는 의미가 된다.

실제 음악에서는 불협화음이 조화를 이룰 수도 있고, 불협화음을 통해 감정을 불쾌하게 만든 후 조화를 통해 카타르시스를 표현할 수도 있다. 음악이 아닌 소음 같은 것이 음악이 되기도 한다. 놀람 교황곡도 그러한 효과인지 모르겠다. 문학도 갈등에서 해소로 가는 이야기에서 감동이란 시스템을 만든다.

사람의 목소리가 듣기 싫은 목소리이고, 악기는 아름답다고 느끼는 사람도 있지만, 기타나 바이올린 소리를 매우 거슬리는 소리로 아름답지 않게 느끼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악기의 소리를 잡음처럼 듣는 사람도 화음으로 연주되는 오케스트라 같은 연주에서 각 악기의 소리들이 모인 화음을 아름답다고 느끼기도 한다. 물론 자장가로 별 느낌을 가지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

그런데 불협화음이란 말이 사람이 살아가는 사회에서 사용되는 것에는 꼬리표 붙이기일 수도 있다. 도쿄 패러림픽의 공연 주제에서 불협화음이란 말이 사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공연, 즉 음악을 말하는 것뿐일 수도 있다.

불협화음이란 미래 도약을 의미한다고 하였다. 인간의 불완전이 새로운 미래를 만들어 나간다. 불협화음인 현재의 세상에서 보다 완전한 조화로운 세상으로 나아가는 모티브가 될 수 있다. 이런 의미를 담았다면 불협화음은 음악이 아니라 사람이나 사회를 의미한다고 보아야 한다.

불협화음이란 용어 대신 다른 용어를 사용한다면 조화와 대치되는 반어법이 되지 않았을 것이다. 조화롭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이 조화를 이룰 수 있다는 것을 나타내고자 불협화음이란 단어로 표현하기에 과감성이 필요했을 것이다. 파격적이고 생소한 표현을 고의적으로 선택하여 충격을 주고 싶었을런지도 모른다.

불협화음이 모여 조화가 되는 것은 음식의 조미료에도 있고, 예술에서도 있고, 건축에서도 있고, 정치에서도 있다. 하지만 디스코드, 디스에이블처럼 디스라는 부정어를 담고 있다. 2020 올림픽 총감독이 여성 출연자를 돼지로 분장시키려다 비하 논란에 휩싸이기도 했고, 당사자성이나 감수성보다는 멋진 슬로건으로 관념적 액션으로 감동을 만들어내고자 과한 표현을 사용한 것은 아닌가 싶다.

장애란 단어가 없거나 필요하지 않는 사회가 가장 조화로운 사회일 것이다. 혹시 일본인들은 장애인 개인들에게는 불협화음으로 보고 자신들의 노력으로 조화롭게 덕을 베풀고 있다고 믿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래도 조화로와야 한다는 믿음, 조화로울 수 있다는 믿음이 있다면 다행일 것이다.

다 쓰임이 있다는 정도는 장애인의 자존감에 도움이 되지 못한다. 조화는 부분이 아닌 주인이 될 때 가능하다. 조화를 이룰 수 있는 주변인이 되어서는 안 된다. 장애인의 삶 자체가 배려로 조화를 이루는 것이 아니라 불협으로 보지 않는 인식의 변화가 조화를 발견하게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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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인환 칼럼니스트
현재 사단법인 장애인인권센터 회장, 한국장애인고용안정협회 고용안정지원본부장을 맡고 있다. 칼럼을 통해서는 아·태 장애인, 장애인운동 현장의 소식을 전하고 특히, 정부 복지정책 등 장애인들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는 이슈에 대해 가감 없는 평가와 생각을 내비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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