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에 언급된 '가나안 여자의 믿음' 대목을 중세에 그린 그림. ⓒWikimedia Commons

성서에 ‘가나안 여자의 믿음’이라는 작은 제목으로 이런 대목이 등장합니다.

“예수께서 거기를 떠나 띠로와 시돈 지방으로 가셨다. 이때 그 지방에 와 사는 가나안 여자 하나가 나서서 큰소리로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 제 딸이 마귀가 들려 몹시 시달리고 있습니다.’ 하고 계속 간청하였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으셨다. 그 때에 제자들이 가까이 와서 ‘저 여자가 소리를 지르며 따라오고 있으니 돌려보내시는 것이 좋겠습니다.’하고 말씀드렸다. 예수께서는 ‘나는 길 잃은 양과 같은 이스라엘 백성만을 찾아 돌보라고 해서 왔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러자 그 여자가 예수께 다가와서 꿇어 엎드려 ‘주님, 저를 도와주십시오.’ 하고 애원하였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자녀들이 먹을 빵을 강아지에게 던져주는 것은 옳지 않다.’ 하며 거절하셨다.” (마태복음 15:21~26, 공동번역성서)

성서의 언급은 예수가 여러 지방을 다니다가 다른 지역에 갔는데, 가나안 사람이 요즘으로 치면 정신장애와 비슷한 일을 겪는 자신의 가족을 도와달라 이런 이야기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는 그 지역이 이스라엘의 권역이 아니기에 살짝 차별적인 말을 하였고, 결국 다시 그 사람은 다시금 도와달라고 간청했습니다. 그래서 또 ‘차별적인 논리’를 언급했습니다. (결말은 뒷부분에 다시 소개하였으니 이 글을 끝까지 읽어주시기를!)

발달장애인에게 이를 적용하면 이럴 것입니다. 발달장애인에게 공정한 대우를 바라며 여러 사람을 찾는데, 다들 그 사람들이 하는 말이 발달장애인은 뭘 할 수 없으니 그런 리그에 참여하지 말아달라 그런 이야기 같을 것입니다. 그래도 발달장애계가 간절히 우리도 그러한 사회적 참여를 바란다 이런 요구를 또 하는 것입니다.

발달장애인은 사회적으로 공정의 부스러기조차 얻을 수 없는 형국입니다. 발달장애인은 이제야 사회적으로 주목받고, 결국 무언가 사회적으로 도전하는 것이 제한되고 있습니다. 아직 공정한 입사 경쟁의 상징인 공채를 통과한 발달장애인은 공무원 1명 뿐입니다. 저는 그러한 공정한 경쟁이라는 공채에 수없이 도전했지만 모든 곳에서 거절되었습니다.

사회적으로 발달장애인이 공채를 뚫는 일자리를 수행할 수 있을 지에 대해서 잘 모르나 봅니다. 발달장애인의 역량 차이가 다른 장애 유형보다 각자 간 차이가 큰 요소가 있고, 특히 발달장애인 대졸자는 비장애인의 업무를 적어도 85% 정도는 수행할 수 있습니다. 나머지 15%은 약간의 지원이 필요하거나, 더 많은 소통이 필요할 것입니다. 아니면, 적어도 가벼운 직무의 업무를 제공하는 것도 없습니다.

요즘 공정 논의가 활발하게 논의되고 있지만, 발달장애인에게 필요한 공정은 전혀 논의 탁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한국 사회 주요 공정 담론은 서울에 사는, 명문 대학 나온, 전문직이거나 고급 지식 노동을 하는, 부유층, 비장애인 이런 자들의 ‘그들만의 리그’ 수준의 공정입니다.

주요 공정 담론에서 발달장애인은 소외된 존재입니다. 한국 사회가 바라보는 발달장애인에게 바라는 것은 ‘주는 것 받아먹고 사는 수준’밖에 안 된다고 냉정히 평가합니다. 그런데 발달장애인에게 필요한 공정은 어찌 보면 다르지만 중요한 것입니다. 바로 ‘적어도 사회의 말석에라도 앉을 수 있게 해달라’ 이런 것입니다.

발달장애인에게 필요한 것은 사회적으로 활동할 수 있고 최소한이라도 사회에 참여해 달라는 것이기에 대기업이나 공공분야 공채에 도전해서 하나라도 자리를 얻고, 특별한 혜택 그런 것을 바라는 것은 아닙니다. 당신들이 그렇게 떠드는 공정을 제대로 적용해서, 발달장애인도 받을 몫을 하나라도 챙겨 달라 이런 것입니다.

발달장애인에게 특별히 원하는 공정을 묻는다고 해도, 아마 평등을 바라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적어도 발달장애인이라는 이유로 거부되거나, 차별 받는 것 그런 것이 없기 만을 바라는 것 정도일 것 같습니다.

살짝 느끼는 것이 있다면, 발달장애인 모두를 ‘피성년후견인 또는 피한정후견인’으로 착각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하는 것이 있습니다. ‘모든 발달장애인=피성년후견인/피한정후견인’이라는 공식은 대단히 잘못된 공식입니다.

대부분 회사는 이러한 처분을 받은 사람을 입사 거부를 시키는데, 발달장애인을 무리하게 그러한 공식에 가둬 놓은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증명은 어려워도, 발달장애인 모두가 그런 처분을 받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취업에 나선 발달장애인은 그러한 처분을 당연히 받지 않습니다. 최소한의 판단 능력 등은 있다는 것이죠. 그래도 최소한 말석의 자리라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발달장애인에게도 공정의 가치는 중요합니다. 그런데, 세상이 발달장애인을 위한 공정이라는 논의를 어떻게 풀어갈지 아무런 답변을 내놓고 있지 않습니다. 설마 발달장애인은 공정의 논의 자체에서 제외되어 ‘우리가 얄팍하게 주는 연금 같은 것을 받아먹어라. 그것만이 발달장애인에게 필요한 것이다’라고 말하지는 않겠지요?

발달장애인에게도 일자리 등을 통한 공정 논의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어야 할 것입니다. 발달장애인의 공정도, 대단히 중요한 이슈입니다. 한국 사회의 공정을 논의하는 자들은 발달장애인의 공정 자체에 대해서도 논의가 필요할 것입니다.

외국의 발달장애인을 부러워하지 마시고, 한국 사회에서 필요한 ‘공정을 통한 최소한의 사회의 말석에라도 앉을 수 있는’ 그런 요구를 발달장애인의 바람을 잊지 말고 듣고 발달장애인에게 필요한 공정을 정리라도 해주시기 바랍니다.

발달장애인이 그런 공정을 받아들일지는 일단 모르겠지만요. 발달장애 논의에서 역설적으로 공정은 필요할 것입니다. 발달장애인을 위한 공정, 이제는 필요할 것입니다.

아, 참! 성서는 어떤 결말로 앞에서 이야기한 사건을 마무리 지었을까요? 이런 이야기로 마무리되었습니다.

“그러자 그 여자는 ‘주님, 그렇긴 합니다마는 강아지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주워 먹지 않습니까?’ 하고 말하였다. 그제야 예수께서는 ‘여인아! 참으로 네 믿음이 장하다. 네 소원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바로 그 순간에 그 여자의 딸이 나았다.” (마태복음 15:27~28, 공동번역성서)

이 성서 뒷부분의 이야기 결론을 오늘 이야기와 묶어서 생각해보면, 뭔가 답을 찾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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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계약 만료로 한국장애인개발원을 떠난 것은 시작일 뿐이었다. 그 이후 장지용 앞에 파란만장한 삶과 세상이 벌어졌다. 그 사이 대통령도 바뀔 정도였다. 직장 방랑은 기본이고, 업종마저 뛰어넘고, 그가 겪는 삶도 엄청나게 복잡하고 '파란만장'했다. 그 이전에도, 그 이후에도 파란만장했던 삶을 살았던 장지용의 지금의 삶과 세상도 과연 파란만장할까? 영화 'Everything Everywhere All At Once'는 픽션이지만, 장지용의 삶은 논픽션 리얼 에피소드라는 것이 차이일 뿐! 이제 그 장지용 앞에 벌어진 파란만장한 이야기를 읽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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