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려움이 커질 무렵 연구개에 마비가 찾아왔다. 말을 하려고 하면 코를 막아야 할 만큼 소리를 내기 어려워졌다. 음식을 먹을 때도 뭔가를 마시면 코로 넘어가서 마시는 것도 조심해야 했다. 나날이 나빠지는 병세에 부모님들도 드디어 관심을 조금 가지기 시작하였다.

함께 병원들을 찾아다니고 한의원도 찾아다녀봤지만 병명 조차 찾지 못하고 9월이 끝나갈 때가 돼서 한 병원에서 의심 가는 병으로, 류마티스성 피부근염이라는 가능성이 있다고 검사를 권해주었습니다.

돌고 돌아 원점으로 온 것입니다. 진작 동네 가정의학과 의사분의 말씀을 따라 큰 병원에서 류마티스 피부근염으로 검사를 받고 치료를 받았다면, 하다못해 복학 했을 때 학교 근처 병원에서 치료를 제대로 받기라도 했다면, 후회가 물밀듯이 몰려왔다. 스스로 일을 키운 것이다.

그럼에도 입원 순간에는 커다란 해방감이 느껴졌다. 어찌됐든 이제라도 치료만 하면 되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나는 너무 문제를 쉽게 간과하고 있었다. 희귀난치성 질환이라는 것은 쉽게 진단이 내려지지도 않고 검사 기간도 오래 걸려, 2주 간의 검사에서 제대로 된 결과가 거의 나오지 않았고 치료 없이 시간만 흘러 몸은 더욱 상태가 나빠져 버렸다.

잠은 더욱 자지 못하였고 수다스러운 아버지는 잠을 자지 못하는 내 옆에서 옆 침상 사람들과 수다를 떨었다. 말 못할 스트레스였다. 하지만 그저 참았다. 몸은 이미 만신창이가 되어 혼자 할 수 있는 것이 없었고 달리 간병해줄 사람이 없었음에도.

그러다 어느새 연하기능 마저 마비되어버렸다. 잠, 말에 이어 먹는 행위를 할 수 없이 되어버렸다. 피부는 온 몸에서 발진이 생겨 가려움을 참기 힘들었고 몸은 15kg 이상 부어버렸다.

병원에선 2주 간의 검사 후 악화된 내 상태를 보고도 할 수 있는 처방을 다 했으니 퇴원하라는 통지를 보내올 뿐이었다. 어이가 없었고 화가 났다. 사람의 욕구 중 가장 크다는 자는 것과 먹는 것을 빼앗기고 그냥 퇴원하라니,

'어떻게든 해줘야 되는 것 아닌가?'

'방법이 없다니 그게 무슨 말이지?'

'죽을 수도 있다고?'

처방은 스테로이드와 면역억제제가 전부였다. 마침 생명이 위독하게 될 수도 있다는 소리도 들었다. 와닿지 않았다. 그저 거짓말 같았다. 믿겨지지 않는 현실이지만 마주하게 된 현실은 어느새 나에게 '장애'라는 새로운 호칭을 붙여주기 시작했다. 그것이 현실이었다.

현실을 깨달을 수록 차라리 죽고 싶다는 생각으로 머릿속이 가득 찼다. 드디어 정신이 산산조각 나버린 것이다. 퇴원한 날부터 온갖 욕설로 신을 원망하였지만 제대로 소리조차 낼 수 없었다. 그저 눈물이 났다. 원망과 서러움에 눈물만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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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민섭 칼럼니스트 2010년 희귀난치성 질환 류마티스성 피부근염에 걸려 후천적 장애를 얻게 되었습니다. 그로부터 10년을 오직 장애를 극복하겠다는 일념으로 살다. 2020년 삶의 귀인을 만나 장애를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고 나아가 장애인 인식 개선 강사로써의 삶을 시작하였습니다. 장애인 당사자로써, 근육병 환자로써 세상을 바라보며 느끼는 바를 전달하는 삶을 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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