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희제의 <난치의 상상력>을 읽다 보면 장애에 대한 제도적 정의뿐만 아니라 여러 생각이 든다. '혜택', '편견', '혐오' 그밖에 다양한 것들에 대해.

장애인 혹은 그 외의 사람들이 "장애 몇 급이야?"라고 묻는 건 개인의 불편한 수준을 묻는 것일 수도 있지만 사실 어떤 혜택이나 지원받는지가 궁금한 경우가 아닐까 싶다.

장애연금이나 통신비, 가스비 등 자신이 받지 못하는 것에 대한 아쉽거나 못마땅한 사람들. 이런 사람들은 장애인을 세금 축내는 부류로 선을 긋고 혐오의 날을 세운다.

장애 문제나 시선에 사사건건 반론을 제기하거나 불편함을 보이면 한국사회는 민감한 인간이 되거나 피해의식에 절어 '튀는' 사람 정도로 취급하는 게 일반적이다. 그땐 그저 입 닥치고 참는 게 상책이라고 여기게 된다. 나도 일정 부분 그렇다. 이런 현상을 사회학자 어빙 고프먼이 '커버링'이라고 했다고 안희제가 그랬다.

장애인으로 한국에서 살다 보면 아예 두 손으로 얼굴을 커버링 한 채로 살게 된다. 문 앞을 나서는 순간 날아드는 카운터 펀치를 막아 내려는, 이건 기술이 아니라 예술일지도 모른다. 나는 제도적 장애인이다. 지체 장애 2급, 현재 기준은 장애정도가 심한 장애인이다. 하지만 '정도'가 늘 딜레마인 사회복지사이기도 하다.

다름 아닌 장애의 '정도'는 무엇으로 규정되는가에 대한 질문. 일상생활이 어려운지 그렇다면 어떻게 어려운지, 어렵지만 일도 하고 자신의 생활을 충분히 만끽하는지, 아니면 아무것도 못하지만 어떻게든 만족하고 사는지 같은 감정이나 감각은 배제된 단지 신체나 정신에 국한해 장애를 규정하는 것은 '정도'가 지나친 건 아닐까.

드러나는 장애는 심하지 않지만 수반되는 고통이 많아 사는 게 사는 것이 아닌 사람은 어떤 '정도'일까? 반대로 드러나는 장애는 딱 봐도 위태로운데 일도 하고 자존감도 높고 많이 웃고 삶에 만족하는 사람이라면 그 '정도'는 심한 걸까? 이런 장애 등록 제도는 국가가 보다 수월하게 지원의 시스템을 만들다 보니 장애만 보고 사람은 보지 못해 그 '정도'를 당사자에게 묻는 지경이 아닐까 싶다.

나는 사회복지사임에도 사회복지사 누구누구보다 장애 당사자 사회복지사라고 수식되는 게 일반적이다. 이것도 편의시설 제공에 따른 구분일까 싶기도 하지만 나는 굳이 통성명을 하고 싶지 않은 자리가 더 많아서 그냥 무시하는 편이다.

다치기 전에 밥 먹듯이 했던, 너무 자주 해서 '가출'했냐는 소릴 듣던 내가 아내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되는 공식적인 외박도 이제는 피할 수 있을 데까지 피한다. 그놈의 배뇨장애 때문에 황금같은 기회를 돌같이 볼 수밖에 없다. 당일치기가 아닌 여러 사람과 숙식을 함께 해야 하는 워크숍이나 세미나에 부득이하게 참석할 때는 온몸의 세포가 유기적으로 함께 긴장한다.

잠자리와 교육 장소는 언제나 실망시키지 않고 접근성이 애를 태웠다. 분명 사회복지와 관련된 워크숍이고 참여자 대부분이 사회복지사임에도 장애와 관련된 접근성은 대부분 고려되지 않았다. 신청할 때 휠체어를 타고 있다고 밝혔음에도 교육 장소는 계단을 두세 개 내려가야 하거나 숙소는 입구에 턱이 있거나 좁아 휠체어가 실내로 들어갈 수 없었다.

그럴 때마다 주최 측(대부분 사회복지나 장애인과 관련된 단체다)은 당황하거나 "저희가 도울게요"라는 정도다. 어떻게? 계단을 없애 주거나 턱을 낮춰 주는 게 아니라 내가 탄 휠체어를 들어서 내리거나 올리는 게 해결책일까?

이런 일을 자주 경험하다 보면 나는 사람으로의 배려가 아닌 그저 들어 옮기면 되는 물건쯤으로 전락당하는 기분이다. 많은 사람이 지켜보는 가운데 네댓 명이 나를 들어 올릴 때 날아드는 시선은 괜히 참석해서 불편함을 자초하는 장애인쯤 '정도'다.

뭐 내가 과민하게 받아들이는 게 아닐까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커버링이 습관이라) 들어 올려져 보면 알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지하철 리프트를 탈 때 계단을 절반 이상을 가로막고 내려갈 때 삐리리리 하며 울리는 경쾌한 자동차 후진의 멜로디는 사람들의 시선을 곱지 않게 유도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숙소 역시 대부분 불편함과 긴장으로 숙면은 불가능한데, 입구부터 장애를 환경이 아닌 내 문제라고 인식시킨다. 매번 편의를 부탁하지만 주최 측은 일관되게 매번 들어주지 않았다. 단 한 번도 제공된 숙소는 입구에 턱이 없던 적이 없었다. 들어 올려지려면 대부분 3인 1실로 구성되는 게 다행이라고 해야 할 정도다.

하지만 수면 동안 서너 번은 일어나 소변을 봐야 하는 탓에 룸메이트의 숙면을 방해해야 하는 심적 부담이 심하다. 그래서 가급적 따로 있어야 마음이 편하지만 들어가려면 포기하고 다인실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 그것도 한쪽이 벽이 있어야 소변통이라도 사용할 수 있다.

그래서 교육이건 직원 연수건 숙박을 해야 하는 게 여간 부담이 아니다. 잠도 제대로 못 잘뿐더러 과도한 긴장을 하거나 물을 좀 많이 마시거나 혹여 분위기에 취해 술이라도 한잔하면 십중팔구는 일어나지 못하고 실수를 해버린다. 근데 어떻게든 태양보다 더 힘든 숙박을 피해보려 고백이라도 할라치면 이런 대답이 돌아온다.

"뭐 어때? 장애인이니까 그럴 수 있지. 우리 다 사회복지산데 뭐가 문제야?"

"그래, 그렇게 생각하는 네가 문제야!"라고 친절하게 말해주고 싶지만 터진 입이 막힌다. 이럴 땐 사회복지사인지 장애인인지 도대체 나를 어떤 포지션에 갖다 놓는지 헷갈린다. 이럴 때가 아주 많다. 왜 장애인은 부끄럽지 않다고 생각할까? 장애인은 그래도 되는 걸까? 왜 아직도 장애인은 도와주어야 하고 배려받아야 하고 그런 게 일상이라고 생각하는 사회복지사가 저렇게 천지빼까리일까 싶어 같은 사회복지사로서도 심하게 곤혹스럽다.

장애가 소수로서 갖는 정체성의 문제는 주류인 비장애인, 그게 일반인이나 사회복지사이더라도 많은 수의 편의성에 불편함이 없으면 존재 자체가 없는 것으로 간주된다.

가뿐히 근육 몇 개만 써도 가뿐히 넘나드는 계단쯤은 미처 그게 휠체어를 사용하는 동료에게 불편함을 줄 것이라는 당연한 생각에 미치지 않는 현실에서 나는 종종 그 맛을 아는데도 좌절감을 맛봐야 한다.

이렇게 부당하고 불편한 상황들에서 나는 요청하거나 제시하는 것보다는 괜찮은 '척'을 선택한다. 다수의 이익이 먼저라는 공리주의의 체화된 학습이라서가 아니라 나 하나 불편하면 된다는 정도로 스스로 타협하고 심지어 짓지 않아도 되는 어설픈 미소까지 지으면서 커버링을 올린다.

산업혁명 이전과 이후의 장애인의 처지는 확연히 구분된다. 산업혁명 이후 노동력은 생산력을 의미해지면서 빠르게 많은 일을 할 수 없는 장애인은 점점 노동 시장에서 밀려났다. 이런 속도는 신자유주의 이후 급속도로 빨라졌다. 속도전에서 장애로 뒤쳐진다고 가치를 증명하지 못한다고 치부되는 일은 굉장히 부당하다.

일을 하지 않는 것으로 가치를 부정해야 할 것이 아니라, 장애가 있음에도 일을 하고 싶어 한다면 그가 일을 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리하여 몸이, 장애가 인간의 가치를 결정하게 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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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일’을 하는 사회복지사가 필요 없는 세상을 꿈꾸는 사회복지사. 책 읽고 글도 쓴다. 그리고 종종 장애인권이나 인식개선을 위한 강연도 한다. 미디어에 비친 장애에 대한 생각과 함께 장애당사자로서 일상에서 겪는 이야기를 나눌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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