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가족들이 깨기 전 이른 아침에 항상 뉴스를 시청한다. 신문은 읽을 수 없고 콘텐츠 접근도 용이하지 못한 필자는 TV 뉴스를 통해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듣는다.

뉴스 보도 중 앵커와 기자의 설명이 나올 경우에는 괜찮지만 자막이나 영상만으로 메시지를 전달하는 경우에는 기사 내용을 알 길이 없다. 며칠 전 아침에도 그랬다. 한창 뉴스가 나오던 중 갑자기 음악이 나오고 여성 한 분의 인터뷰가 나온다.

"아이들과 가까운 곳이라도 편하게 나갈 수 없는 게 아쉬워요."

코로나로 인한 불편함을 인터뷰한 것인가 싶었는데 알고 보니 장애인을 인터뷰한 것이었다.

장애인 당사자와 관계자들의 인터뷰 사이에 나레이션까지 나오며 미니 다큐 같은 느낌의 꽤 긴 영상이었다. 인터뷰 내용도 나레이션도 평소 필자가 마음에 두고 있던 것들이라 ‘잘 만들었네.' 하며 흡족한 마음으로 시청했다.

영상이 끝나고 배경음악과 함께 마무리 나레이션이 나오는데 그 순간 좀전의 흡족함은 사라지고 실망감에 맥이 풀렸다. 나레이션은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코로나 이전부터 불편하게 살아가는 이들이 있다. 이들의 삶을 보면서 현재 우리의 일상에 대해 한 번쯤 생각해 보자."

영상 속 인터뷰 한 사람들의 메시지는 그런 게 아니었는데....

그들은 제작진의 취지를 알고는 있었을까? 왜 장애인의 삶은 비장애인에게 힐링과 위안을 주기 위한 도구로 이용되어야 할까? 비장애인에게 장애인은 불쌍하거나 위대한 사람일 수밖에 없는 것일까? 불쌍하지도 대단하지도 않는 그저 평범한 장애인은 될 수 없는 것일까?

불쌍하니까 도와줘야 하고 불편한 몸으로 살아가는 장애인을 보며 '그래도 내 삶이 낫다.' 며 위안을 하고 '장애인도 하는데 나도 할 수 있어.' 하며 용기를 가진다. 누군가에게 힐링이 되고 용기를 주는 존재가 된다는 것은 기쁜 일이다.

그러나 장애인을 통한 힐링과 위안의 저변에는 항상 장애인에 대한 상대적 우월감이 전제되어 있다는 사실에 기쁘지 않다.

우리들이 불편함을 말하는 것은 불쌍한 존재로 동정받기 위함이 아니다. 그런 어려움을 알고 제도적 물리적 인프라가 구축되기를 그래서 불쌍하거나 부족한 사람이 아닌 대등하고 평범한 사회구성원으로 인식되기를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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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미 칼럼니스트 9년 전 첫아이가 3개월이 되었을 무렵 질병으로 하루아침에 빛도 느끼지 못하는 시각장애인이 되었다. 상자 속에 갇힌 듯한 공포와 두려움 속에서 나를 바라볼 딸아이의 모습을 떠올리며 삐에로 엄마가 되었다. 그러나 언제까지나 삐에로 엄마로 살 수는 없었다. 그것이 지워지는 가짜라는 걸 딸아이가 알게 될테니 말이다. 더디고 힘들었지만 삐에로 분장을 지우고 밝고 당당한 엄마로 아이와 함께 세상 밖으로 나왔다. 다시 대학에 들어가 공부를 하고 초중고교의 장애공감교육 강사로 활동하기 시작했고 2019년 직장내장애인식개선 강사로 공공 및 민간 기업의 의뢰를 받아 교육강사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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