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 자폐인 자조모임 estas 회원 하나가 제게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자신은 자유롭게 영화 한 편 제대로 못 봤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원하는 영화 한 편조차 선택해서 볼 수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발달장애인 문화예술 문제에서 새롭게 생각해봐야 할 또 다른 문제가 있습니다. 바로 발달장애인이 문화예술을 ‘만드는 것’이 아닌 ‘누리는 것’에서도 문제가 될 것이라는 것을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기존 발달장애인 문화예술 정책은 창작자 중심 정책이었던 것은 새로운 문제라고 하겠습니다. 창작자는 소수지만, 발달장애인도 문화예술을 누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대중들에게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셔번트’적 재능의 비율이 높은 창작자 중심 정책이 많이 이뤄진 것이죠.

그렇다고 그러한 문화예술을 창작하는 것이 가능한 발달장애인의 수는 극히 적다는 것이며, 예술대학 진학 등 신규 유입도 제한적이라는 점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전문 예술인으로 가기 위해서는 예술대학 진학을 통해 미리 전문적인 표현 역량을 쌓고 오는 것을 지지하기 때문입니다.

거기에 대부분의 발달장애인 창작자들이 ‘재활’목적에서 출발한 예술을 하다 보니, ‘표현 기법의 발전’이나 ‘예술세계의 발전’은 찾아보기 어려웠습니다. 참고로 저도 사진은 처음에는 재활 목적으로 출발했지만 예술대학 진학 이후 철저한 전문 예술가로의 방향으로 선회했습니다.

대놓고 말하면 발달장애 예술가 중 상당수가 그저 작품만 만들 줄 알지, 그것을 자신의 예술세계로 발전시켰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그리고 전문 예술가 수준의 예술 걸작은 찾아본 적이 없습니다. 아직 걸음마 단계라서 그런 것도 있지만 자신의 예술세계나 창작 여정을 설명할 수 있는 발달장애인 예술가를 찾아본 적이 없었습니다.

문제는, 발달장애인들도 문화예술을 누려야 그들의 감성을 살릴 수 있습니다. 발달장애인들이 감성이 메말라가는 현상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문화예술을 통한 ‘감성 충전’은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실제로 문화예술이 감성을 기르는데 도움이 된다는 사실은 굳이 강조하지 않아도 알려진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되면 불균형 현상을 방치하라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발달장애인에게도 문화예술을 누릴 수 있는 기회를 자주 부여하고, 또 누리는 것을 겁내지 않게 해야 합니다. 창작은 소수가 할 수 있어도, 누리는 것은 모두가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렵게 말하면 ‘문화예술 소비자’로서의 발달장애인의 가능성을 주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발달장애인 문화예술 지원이 ‘생산자’ 중심의 지원에 가깝다는 것이 문제라고 하겠습니다. 생산자가 안정적으로 생산을 하려면 어느 정도의 ‘소비시장’이 존재해야만 가능하기 때문이라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제가 생각하는 장애와 사회의 관계에서의 첫 번째 원칙인 ‘통합의 원칙’은 이럴 때 필요합니다. 발달장애인도 문화예술을 누릴 때엔 발달장애에 개의치 않고 함께 누릴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장애와 비장애를 막론하고 통합된 상태에서 함께 누릴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굳이 발달장애인 예술가가 아니더라도, 발달장애인에게는 문화예술을 누리는 것이 더 필요하기 때문에 비장애인 예술가와 발달장애인이 예술현장에서 함께 만나는 것도 나쁘지는 않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발달장애인이 누려야 할 예술 장르도 문제라고 하겠는데, 예술 장르는 다양성 보존과 함께 발달장애인의 다양한 사고방식을 유도할 수 있도록 장르는 다양하게 지원할 필요가 있습니다. 발달장애인도 쉽게 말하면 영화를 자유롭게 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고, 심지어 발달장애인이 발레나 현대무용, 오페라를 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전문적인 평론가 수준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은 잊지 말아주셨으면 합니다.

그리고 음악 분야에서도 발달장애인이 자발적으로 대중음악 공연을 보러갈 수는 있을 듯합니다. 저도 그랬으니까요. 대중과 가장 많이 연결된 대중적 예술 장르가 대중음악인 이상, 대중음악계가 제일 먼저 발달장애인도 대중음악을 누릴 수 있게 하는 것은 굳이 어렵지는 않을 것입니다.

단지, 발달장애인 맞춤형 ‘소비시장 공략’을 하는 것이 더 필요하겠다고 할까요? 발달장애인 음악 창작 분야는 대부분 클래식 음악인데, 정작 발달장애인 음악 향유 수요는 대중음악의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다는 점을 잊지 말아주셨으면 합니다.

발달장애인도 문화예술을 누릴 수 있는 권리는 있고, 그래야 마땅합니다. 물론 제공자 중심으로 누리는 것이 아닌 당사자가 자유롭게 선택하면서 누릴 수 있어야 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렇지만 다양성 있는 문화 향유를 위해 정부나 예술계가 다양한 예술장르를 누릴 수 있게 지원하는 것은 필요하다고 봅니다.

문화예술 관련 공공기관에서 이런 스마트폰 어플리케이션 하나 만들어보는 것은 어떨까요? 발달장애인 문화예술 매거진 어플리케이션 말입니다. 시중에서 누릴 수 있는 예술 정보를 제공해서 빅데이터 같은 방식까지 동원하면 예술을 누리는 것이 즐겁지 않을까요?

일단 걱정은 따로 있습니다. 문화예술을 누릴 돈이 있어야 하는 것만은 걱정되기는 합니다만. 문화누리카드가 발달장애계에도 많이 보급될 수 있으면 얼마나 좋긴 하겠지만요. 거기에 지원 한도나 지원 대상 확대는 필수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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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계약 만료로 한국장애인개발원을 떠난 것은 시작일 뿐이었다. 그 이후 장지용 앞에 파란만장한 삶과 세상이 벌어졌다. 그 사이 대통령도 바뀔 정도였다. 직장 방랑은 기본이고, 업종마저 뛰어넘고, 그가 겪는 삶도 엄청나게 복잡하고 '파란만장'했다. 그 이전에도, 그 이후에도 파란만장했던 삶을 살았던 장지용의 지금의 삶과 세상도 과연 파란만장할까? 영화 'Everything Everywhere All At Once'는 픽션이지만, 장지용의 삶은 논픽션 리얼 에피소드라는 것이 차이일 뿐! 이제 그 장지용 앞에 벌어진 파란만장한 이야기를 읽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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