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타키나발루 선셋 비치에서. ⓒ정민권

"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순간 우리는 오만가지 핑계를 찾는다!"

중증 장애인에게 여행이란 쉼을 향한 고행이다. 그것도 휠체어 사용 장애인에겐 더더욱.

나는 여행에 대한 갈증이 더 이상 어쩌지 못할 정도가 되면 자연스럽게 여행에 관한 책을 집어 든다.

휠체어를 타게 된 이후 나는 두 다리(아니 네 바퀸가?)가 아닌 그저 타인이 떠돌고 온 전 세계를 활자로 함께 한다.

지중해를 품은 스페인이나 그리스 같은 곳, 머리칼이 꼿꼿해지더라도 죽기 전엔 꼭 보고픈 오로라의 나라들 같은 곳들.

그들이 바라본 풍경이나 맡았던 이국의 냄새 또 행복한 포만감을 주었다던 그 맛들을 오감이 아닌 그저 상상으로만 대리만족 한다.

하지만 마음만은 숨을 헐떡이며 더위를 먹더라도 따듯한 바다를 부유하고 싶기도 하고, 추위에 온몸이 뻣뻣하게 굳어 어쩌지 못할지언정 하늘에 펼쳐진 커튼 같은 오로라의 신비스러움을 내 눈으로 직접 볼 수 있거나 아내와 프라하 거리를 걷는다는 건 어떤 느낌일까 상상한다.

그래서 나에겐 여행은 쉽지만 어려운 독서다.

언제인지 기억하지 못하지만 대충 '휠체어로 떠나는 세계 여행이란' 제목의 포스팅을 본 이후로 나도 여행을 활자로만 하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막연한 생각이 들었다.

그 포스팅에는 휠체어 쉐어링 하는 법과 그 휠체어를 비행기에 태우는 법이나 배터리에 대한 정보 같은 것이 실려 있었다.

두근거리는 가슴이 진정되기까지 한참이 걸릴 정도로 분명 신세계였지만 '내가 할 수 있을까?'라는 자신 없음을 깨닫는 데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익숙한 곳과 사람들을 떠나 낯선 곳과 사람들을 만난다는 것은 그저 여행이기에 앞서 엄청난 모험 그 이상이 될게 뻔했다.

나에겐 허클베리핀 같은 무모함에 가까운 모험 가득한 DNA는 주어지지 않았으므로.

영국에 도착한 날, 거리에서 아무도 자신을 거들떠보지 않아서 눈물이 날 뻔했다는 어느 휠체어 사용 장애인의 에세이를 읽으며 덩달아 울컥했던 적이 있다. 그녀는 남자 친구와 영국을 거쳐 프랑스, 스페인, 이탈리아 등지를 여행하며 이야기를 남겼다.

어찌나 부럽더니. 결국 자그마한 그녀를 든든히 받쳐준 그의 남자 친구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라며 은근슬쩍 핑곗거리를 찾았다.

180cm에 80kg에 육박하고 심지어 큼지막한 전동 휠체어까지 타는 내가 그런 여행이 가당키나 할까 싶었다. 하여 나에게 여행이란 여전히 그저 책으로 타인의 발자취를 눈으로 따라 읽는 일이었다.

인천공항 출국 전. ⓒ정민권

아버지 산수연(팔순 잔치)을 준비하면서 가족 여행을 계획하게 되었다. 그동안 국내 여행도 온 가족이 다 함께 한 적이 드물기도 해서 설 연휴에 휴가를 더해 일정을 맞춰 보기로 했다.

제주도를 비롯한 강원도, 남해 등 이곳저곳 국내 여행지를 들추다가 이왕 휴가까지 써서 준비하는 거 온 가족이 해외 한 번 가자는 의견이 나왔다. 아버지가 좋아하시는 골프도 할 수 있고 근사한 선셋도 있는 곳으로. 그래서 어찌하다 보니 찾은 목적지가 그 이름도 어려운 코타키나발루다.

늘 그랬지만 가족 여행은 나는 불참하거나 참석해도 숙소에만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조용히 앉아 음악을 틀어 놓고 책을 읽는 게 더 좋다는 구실을 만들어 식구들이 여기저기 다니는 동안 나는 혼자 있어야 했다.

하지만 이번 여행지가 여행지다 보니 나에게 여행 키워드는 '용기'였다.

국내 여행도 쉽지 않은데 이번엔 마음을 먹는다 해도 쉽지 않은 해외여행이라니. 그것도 심장 떨리는 이국의 바다와 불타는 노을이 내 몸에 옮겨 붙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의 선셋을 어찌 포기하랴! 가족이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주리라 믿으며 하나씩 준비했다.

준비하면서 알게 된 사실 하나. 내가 타고 있는 전동 휠체어는 비행기 탁송이 불가하다는 것. 솔직히 정확히는 잘 모른다. 그저 인터넷 정보는 약간씩 다른 말을 하고 있어서. 타기만 했지 휠체어의 배터리가 건식, 습식, 리튬 이온 같은 전문적인 부분은 잘 모르니까. 불안하기만 할 뿐 딱히 방법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어쨌거나 비행기를 타야 하니 휠체어가 제일 문제였다. 여행지에서 휠체어가 없으면 발이 묶이는 것이니 아예 가지 않느니만 못하지 않은가. 그런데 누구는 된다고 하고 또 누구는 안 된다고 하고. 누구는 화물 수송을 위해 공항에서 배터리를 분리한 후 목적지에서 다시 조립하면 된다고 하고. 그러려면 수리 전문가를 대동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야말로 휠체어를 비행기 태우기가 최대 난관이었다.

코타키나발루 수투라하버 퍼시픽 호텔 앞 바다 앞에서. ⓒ정민권

이리저리 알아보다가 휠체어를 수동과 전동을 한방에 해결할 수 있는 현대그룹 지원의 수동휠체어 전동화 키트를 알게 됐다. 오 마이 갓뜨!!

여행 일정보다 훨씬 일찍, 근 두 달 전부터 문의와 답변을 주고받으며 이것저것 궁금한 내용을 묻고 답변을 받으며 해결해 나갔다.

2가지 종류의 휠체어 보조 장치를 고를 수 있는데 나는 팔도 부자연스러워 수동 휠체어를 자유자재로 컨트롤하지 못하니 스마트 드라이브는 안 되고 조작 레버가 달린 토도 드라이브 휠체어를 신청했다. 제일 중요한 휠체어 배터리 문제가 해결되니 마음이 한결 가벼웠다.

쉐어링의 배터리는 리튬 이온으로 144Wh라 분리 후 기내 탑승 가능한 규격이며, 착탈도 굉장히 편하다.

게다가 여행 일정 전날 직배송을 받을 수 있어 편리하기까지 하고, 배송 시에 친절하게 대여와 반납에 대한 절차적 설명에 이어 배터리 분리를 포함해 휠체어 조작에 관한 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

솔직히 휠체어는 대여다 보니 사이즈가 좀 작아 불편했고 조작은 좀 복잡했다. 배터리 잔량 확인, 속도 조절, 시동 걸기 등 하나의 버튼을 여러 방법으로 조작해야 하니 복잡할밖에. 그렇다고 걱정할 필요는 없다.

배터리가 2개 지급되는데 나는 끄고 켜고 속도 조절만 하고 길도 좋지 않았던 여행지에서 3박 5일을 충분히 사용했다.

14명의 대 가족의 첫 해외여행이었는데 두고두고 추억하게 될 듯하다. 그리고 또 다른 여행을 꿈꾼다. 빠른 시일 안에 또다시 바다를 건널 수 있길.

이젠 나에게 여행이란 활자로 하는 게 아닌 직접 부딪히는 용기다!

두 번째 이야기도 기대해 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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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일’을 하는 사회복지사가 필요 없는 세상을 꿈꾸는 사회복지사. 책 읽고 글도 쓴다. 그리고 종종 장애인권이나 인식개선을 위한 강연도 한다. 미디어에 비친 장애에 대한 생각과 함께 장애당사자로서 일상에서 겪는 이야기를 나눌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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