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드민턴채와 공. ⓒ픽사베이

장애인이 되기 전, 십수 년을 운동선수로 살았던 내게 ‘운동’이라는 단어는 동질감에서 오는 묘한 짜릿함이 있었다. 그와 동시에 반가웠다.

한편으론 이젠 운동은 땀내 나거나 식스팩 복근을 위한 이를 악물어야 하는 성취나 더더구나 등수나 메달을 위한 게 아니다. 장애인에게 운동은 재활 그 이상 이하도 아니다.

이미 내 상태는 전신 탈의한 채 손가락만 들어 올리며 달빛을 뒤로 한 채 자전거를 타고 오르내리는 영롱한 비주얼의 ET처럼 탱탱하게 부풀어 오른 배를 가꿔 놨으니 PT를 받거나 기구 사용을 위한 필라테스나 헬스클럽을 다닌다는 것은 몸짱을 위한 운동이 아닐 것이다.

몸짱이 필요했으면 애초에 ET를 흠모하지도 않았겠지. 다만 운동은 원활한 복식 호흡을 위해 나름의 생존전략일 뿐이다.

어쨌거나 나는 늘 주인을 기다리며 몸에 먼지만 쌓여 가고 있는 복지관 기구에 앉기만 해도 '운동'이 아닌 재활이 된다. 동료들의 빠지지 않는 추임새만 봐도 그렇다.

“오, 웬일이셔? 그럼 그럼, 선생님은 그렇게 재활 좀 해야 해.”

이런 제길. 힘은 내가 쓰는데 힘 빠지는 추임새라니. 재활이 아니라 운동이라고. 나도 레그 프레스쯤은 좀 밀어 본 남자라고.

솔직히 목이 부러지며 신경 손상으로 거의 대부분의 운동 능력을 날려버린 나는 한동안 숟가락 드는 것도 운동이었다. 그전에는 빨대로 탁구공만 움직거리게 만들어도 환호와 찬사를 받았던 몸이고. 이제 그때부터 시간은 좀 지났다 해도 여전히 내 목은 부러진 흔적을 남겼고 여전히 몸뚱이는 머리와 따로 논다.

이 몸으로 운동 아니지 재활을 한다는 것은 펑펑 솟아야 할 땀 대신 욕으로 때우게 되는 게 운동이 주는 효과다. 목이 부러지며 신경도 원 플러스 원으로 끊어졌다. 하여 한증막에 들어가도 살만 타지 땀이 안 난다. 그러니 피가 덥혀지고 열기가 쌓이면 죽는다. 뭐 다들 생각하고 눈치챘지만 그래서 운동을 안 하는 건 아니다. 그냥 하기 싫다.

아마 나는 날 때부터 운동 총량의 법칙을 타고났으리라. 운동선수로 흘린 땀이 1차였고, 2차는 그보다 더 찐득찐득한 땀(땀이 안 난다고 하고 금방 땀난다고 구라 친다고 하지 말길. 느낌이 그렇다는 거다. 진짜 땀 안 난다.)을 재활을 하면서 다 흘렸다. 그래서 운동하기 싫다면 핑계이려나?

오늘은 운동하러 가야 하는데 표지 사진. ⓒ정민권

<오늘은 운동하러 가야 하는데>라는 책을 읽었다. 작가가 운동에 궁합이 있다고 그렇게 설명한 것처럼 잘하고 좋아하고 심지어 오래 했던 운동이 이젠 재활이라는 옷으로 갈아입자 지긋지긋한 것이 되어 버렸다고나 할까.

읽다 보니 좀 당황스러운 게 있다. 작가가 사랑하는 필라테스에서 숨을 참으면 현기증이 느끼는 것처럼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현기증이 나고 있다. 숨을 참고 있다. 도대체 왜 단락이 없지? 할 이야기가 넘치니 단락이 없고, 펼쳐지는 재미있는 이야기들은 모조리 다 내 이야기 같아 폭 빠져들어 숨 쉴 타이밍을 찾지 못하게 한다.

재미나기만 한 건 아니고 여기저기 밑줄 그을 감동적인 문장도 많다. 그중에 한 문장은 도대체 얼마나 감동적이고 공감되느냐면…. 딱 백만 스물한 배 감동이고 공감된다. 뭔고 하니.

“사회적 약자일수록 신체의 자율성을 쉽게 침범당한다.”라는 말이다. 아이, 노인, 여성, 학생, 장애인 등 작가기 열거하는 내용이 바늘로 티 안 나게 찔린 듯 새삼 뜨끔하다.

특히 나는 재활 치료실에서 죽기 살기로 하고 있는데 “힘 좀 팍팍 써야지. 그렇게 설렁설렁하면 되겠어?”라는 말고 함께 내 손 위에 포개져 덩달아 오토매틱으로 해주시던 어르신들의 친절에 황당함을 바쳐야 했다. 단지 땀을 흘리지 않는다는 이유로 설렁설렁이라니. 지금 생각해도 열 받네.

나이 오십에 권투를 시작한 친구가 있다.

그 친구가 8온스의 글러브를 끼고(본인 글러브다. 친구도 장비욕이 좀 있다.) 샌드백을 치는 의외의 타격감이 좋아서 권투를 한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청년 시절부터 허리가 좋지 않았던 친구는(하루 종일 앉아서 공부하던 범생도, 빡세게 운동하던 체육인도 아니고 심지어 군대도 방위다. 뭐 전투 방위야 그럴 수 있다지만 그것도 아니다.) 스텝을 밟고 줄을 넘으며 땀을 흘리고 체력을 키우는 게 좋다고 했다.

그러다 어쩌다 하게 되는 스파링은 뒤통수를 치지 않는 사각의 링에서 정정당당하게 싸움을 즐길 수 있는 정직한 운동이라서 좋다고 했다.

친구도 이 책을 읽었을까. 그나저나 사실 싸움은 주먹이 아닌 발이 결정타를 날리는 건데.

“세상의 부모들이여, 자신의 유전자를 받았지만 자식은 자신과 다른 완벽한 완벽한 타인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시라.” p170

웃고 말았다. 지금도 짬만 나는 침대와 물아일체가 되는 딸아이를 두고 나와 아내는 늘 고민한다. “누굴 닮은 걸까”를. 나는 잡다한 운동을 섭렵하고 유도에 정착해 유도 선수를 했고, 아내는 시종일관 핸드볼 선수로 활약해 청소년 국가대표도 했는데 말이다. 그래서 작가의 유전론은 인정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그리고 작가가 배드민턴계에서 활약한 역사가 자주 등장하니 덩달아 내 흑 역사도 떠오른다. 작가가 그냥 운동을 사랑하는 애호가였다면 나는 어쩌면 작가가 부러워할지도 모르는 체대생 오빠였다. 나는 그녀보다 확실히 늙었으므로.

어쨌든 1학년 때 배드민턴 수업이 있었다. 작가가 예찬한 장비 욕심은 없고 그저 한 학기 때우면 되는 수업이었다. 게다가 전공 필수도 아니고 전공 선택이었으므로 딱 그만큼의 마음가짐으로 수업에 들어갔다. ‘대충 때우자!’ 그래서 장비 역시 뒷산 약수터에서 날아다니는 아저씨들의 장비 수준으로 준비해 갔다.

내 라켓을 보신 교수님은 자상한 얼굴로 잔인한 말씀을 날리셨다. “이 새끼야, 여기가 약수터냐?”라며 공을 쓰다듬어야 할 라켓 헤드로 내 머리통을 오지게 문질러 주셨다. 그리고 그다음 주부터는 내 손에는 요넥스 라켓이 들려있어야 했다. 근데요. 교수님. 약수터 가보니 아저씨들도 요넥스 많이 들고 계시던걸요.

“혼자 사는 것은 사람들 시야에서 쉽게 사라지는 일이다.”라는 문장에서 눈을 한참 껌뻑였다. 두 친구가 생각났다. 딱히 자의적 비혼 주의자는 아니었지만 환경이 그리 만들었던 탓에 기혼자들인 대부분의 친구들이 삶에 대한 고단함을 토로하면 “그래도 들어줄 누군가”가 있다는 점을 지적하며 말끝을 아끼던 친구 둘이 있었다.

“니가 몰라서 그래”라는 뜻밖에 무시와 “나 같으면 혼자 산다.”라는 해본 것들의 유세를 온몸으로 받아야 했던 두 친구 중 한 명은 나이 오십을 넘기지 않고 결혼을 했다. 얼마 전 결혼한 친구에게 물었다. “해보니 어떠냐?” 친구는 웃으며 말을 아꼈다. 거봐라 당해보니 어떠냐!

그리고 이제는 정말 기댈 언덕이 없어진 또 다른 비혼 친구는 어느 순간부터 잘 보이지 않는다. 작가의 말이 명치끝에서 울컥이게 만들었다. 장애나 비장애나, 기혼이나 미혼이나 비혼으로 뭐든 나눌려고 하는 사람들 덕에 화살을 날린 쪽이 아니라 받은 쪽은 상처받기 마련인 것을. 유난히 친구 생각이 나는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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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일’을 하는 사회복지사가 필요 없는 세상을 꿈꾸는 사회복지사. 책 읽고 글도 쓴다. 그리고 종종 장애인권이나 인식개선을 위한 강연도 한다. 미디어에 비친 장애에 대한 생각과 함께 장애당사자로서 일상에서 겪는 이야기를 나눌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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