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두운 골목길. ⓒ최선영

좁은 골목길을 돌아들어가면 막다른 길이 보인다 그 골목길 세 번째 집에는 유진 가족이 살고 있다. 귀가시간 오빠들을 불러내 함께 집으로 들어가야 할 만큼 어둡고 침침한 골목이다.

깜빡거리며 언제 사라질지 모를 옅은 빛을 비추는 가로등의 운명이 불안한 곳이다. 가끔은 오빠들과 함께 걸어도 낯선 걸음이 뒤를 따라오면 등골이 오싹거리기도 했다.

6년을 그렇게 살았다. 이제 내일이면 유진 가족은 아파트로 이사를 간다. 넓은 전원주택에 살던 여섯 식구가 이 골목으로 들어오던 날 들고 올 수 있었던 것은 책가방과 옷 몇 가지 이불과 밥솥이 다였다.

드라마에서나 흔히 나올 것 같은 인상 좋은 아빠의 친구가 어느 날 찾아왔고 뻔한 스토리처럼 보이는 보증을 서달라고 했다. 누가 봐도 결과를 짐작할 수 있는데도 아빠는 반대하는 엄마 몰래 결국 보증을 서주고 얼마 지나지 않아 드라마에서 본 것처럼 살던 집을 나와야 했다.

다행히 막장드라마 같은 데서 보던 더 큰 불행은 없었다. 오래된 낡은 집이었지만 방이 두 개가 있었고 부엌이라고 불러야 할 것 같은 모양을 한 좁은 공간도 따로 있었다.

마당을 지나 화장실을 가는 것이 특히 겨울에는 무섭고 귀찮았지만 아빠 엄마가 다 큰딸이 볼일 볼 때까지 문 앞에서 기다려주는 흔하지 않은 그림을 그릴 수 있어 나름의 재미가 있었다.

엄마면 충분했을 법도 한데 엄마가 가던, 유진이 가던 늘 아빠는 화장실 앞을 지켜야 했다. 엄마도 유진이 만큼이나 무서워했기 때문이다.

아파트로 이사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어쩌면 유진이네 가족은 왔다 갔다 하던 옅은 가로등 불빛이 그리웠는지도 모르겠다. 밤마다 손전등을 들고 마당을 지나 화장실을 손에 손잡고 가던 6년의 밤을 떠올리며 그 시절을 그리워했다.

이제는 큰 오빠는 직장을 다니고 둘째 오빠는 군에 가고 유진은 대학생이 되었고 막내 해진은 고 3이 되었다. 다들 바쁘고 흩어져 있는 각자의 시간이 많아진 탓에 그때처럼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이 허락되지 않는다.

아빠는 열 배쯤 바빠져서 얼굴 보기도 힘들고 엄마는 친구들과 모임이 많아졌다. 편리하고 좋은 곳에 누워있지만 유진의 마음은 자꾸만 가난하고 초라해지고 있었다.

이환과 유진. ⓒ최선영

텅 빈 마음을 채워주는 유일한 친구 이환은 늘 유진의 눈이 되어주며 함께 했다. 사물이 또렷하게 보이지 않는 유진과 세상의 소리를 마음으로 듣는 이환이 만난 것은 6년 전 유진이 살았던 그 골목 세 번째 집에서였다.

3년 동안 서로의 눈과 귀가 되어주며 친구가 되었던 그들은 이환이 먼저 이사를 나간 뒤에도 그 인연을 이어왔다. 그리고 함께 나란히 대학에 입학했다. 같은 과를 선택한 것도 유진과 이환의 계획된 진로였다.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두 사람이 처음 소통을 할 때는 어려움도 많았다. 유진의 말을 듣기 위해 이환은 입 모양을 보고 듣는 법을 익혔고 듣지 못하는 이환을 위해 유진은 말을 천천히 하는 습관을 들였다.

처음에는 이환과 유진 사이에 해진이 소통의 도구가 되어 주었다. 이환이 글씨를 쓰면 유진에게 읽어주고 유진이 말을 하면 다시 이환에게 글로 전달했다. 1년이 지나고 이환과 유진은 해진이 없어도 서로 소통할 수 있게 되었다.

유진의 말을 입 모양을 보고 이환이 듣게 되었고 중도 실명을 한 유진은 점자뿐만 아니라 글자로도 소통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서로에게 좋은 연인이 생기도록 응원해주자던 유진과 이환의 우정은 대학 2학년이 시작될 무렵 다른 모양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잘생기고 멋진 이환에게 관심을 보이는 여학생이 나타났다. 축하해주어야 하는데 유진의 마음은 자꾸만 바닥으로 가라앉았다.

"넌 내게 할 말 없어?"

"무슨 말? 잘해보라고 응원해줄까?"

"그러고 싶어?"

"......"

"난 너랑 있을 때가 제일 편해. 내가 소원이 있는데... 그게 뭔지 알아?"

"뭔데?"

"네 목소리를 한 번만이라도 들을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 많이 했었어."

"이환아... 넌 나랑 소원도 같았구나... 난 딱 한 번이라도 좋으니 네 얼굴을 자세히 보는 거였어."

서로를 향한 속내를 드러내고 이들이 원하는 바람이 이루어지는 기적은 이들에게 일어나지 않았지만, 서로를 이해하고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은 더 깊어졌다.

웃고 있는 유진과 이환. ⓒ최선영

"나 소원이 바뀌었어."

"엥? 뭔데?"

"네 목소리 안 들어봐도 되니까 평생 너의 눈이 되어 너랑 살고 싶어. 이제 내 마음에 네 목소리가 들리거든... 사실은 오래전부터 그랬어."

"나도 소원 바꿀게. 너 얼굴 내 마음에 마음대로 내가 그리고 싶은 대로 그려놨으니까 너의 귀가 되어 너랑 평생 함께 하는 걸로."

두 손을 마주 잡은 이환과 유진의 미소가 아름답다.



이환과 유진이 살았던 골목길. ⓒ최선영

이들에게는 또 다른 소원이 생겼다. 좁은 골목길을 돌아들어가면 있던 세 번째 집... 결혼하면 꼭 그 집에서 신혼을 보내고 싶다는 것이다. 이환도 유진도 그곳에서의 시간이 가족들과도 가장 행복했던 때였고 두 사람이 만나게 된 특별함이 있는 곳이니까.

꼭 그곳에서 아름다운 출발을 하기로 약속했다. 그때까지 재개발이 되지 않아야 할 텐데...^^

들리지 않고, 보이지 않아도 사랑하는 마음으로 듣고 보게 된다. 우리 마음에 사랑이 스며드는 이것이 기적의 시작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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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선영 칼럼리스트 대학에서 미술을 전공하고 졸업 후 디자인회사에서 근무하다 미술학원을 운영하였다. 현재는 네이버 블로그와 카페를 운영하며 핸드메이드 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장애를 안고 살아가는 평범하지만 결코 평범할 수 없는 우리들의 이야기를 동화형식으로 재구성하여 누구나 쉽게 공감할 수 있는 따뜻한 언어로 담아 내려고한다. 동화를 통해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서로를 이해하는 시선의 폭이 넓어져 보이지 않는 편견의 문턱이 낮아지고 서로 배려하고 이해하는 어우러짐의 작은 역할이 될 수 있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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