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상위에 놓인 작은 화분과 책 그리고 맥주 한병.ⓒ장지혜

무덥고 습한 날씨가 계속되는 8월의 첫 금요일 5시 무렵. 불쾌한 날씨만큼이나 답답했던 닷새 동안의 일상을 한 번에 타파할 방법이 없을까 고민하던 찰나, 무심코 누른 인터넷 창에서 그것을 보고야 말았다.

치킨! 치킨이라니! 그것도 무려 금요일 밤의 치킨이라니! 모니터엔 요즘 빠져있는 시트콤 ‘빅뱅 이론’이, 내 앞엔 떡사리와 함께 매콤한 양념 소스로 버무려진 치킨이 존재하는 상상을 하고 있자니 지금 당장 자리를 박차고 나가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그러나 보다 더 완벽한 금요일 밤을 구상하자는 취지로 들썩이는 엉덩이를 진정시키고 차분함을 되찾았다. 금요일 밤의 치느님은 완벽해야 한다. 그러니 모시기 전에 다시 한번, 의식을 완벽하게 완성시킬 무언가를 생각했다. 그리고 드디어 떠올리고야 말았다.

그래. 그것은 알콜이었다. 나는 본디 콜라파지만 스트레스를 풀기에 콜라는 2% 부족한 기분이다.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선 약간의 일탈이 필요한데, 콜라는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누구나, 어디서나 구매 가능한, 그러니까 너무 건전한 음료이기 때문에 오히려 부족했다. 그래서 나는 특별함을 더해줄 음료로 ‘알콜’을 마시기로 결정했다.

고민하던 사이 시간이 흘러 시계의 작은 바늘이 6에 거의 가까워져 있었다. 즐거운 금요일 퇴근을 위해 미리 화장실도 가고, 책상도 한번 닦아 보고, 가방도 뒤적여보고, 그래도 시간이 남아서 휠체어에서 몸을 젖혀 스트레칭도 해보는 등 꾸물거리다 드디어 퇴근을 감행했다.

인사를 하고 사무실 문을 열어젖히는 순간, 숨막히는 공기가 기다렸다는 듯이 내 얼굴을 덮쳤다. 하지만 이런 더위 따위는 금요일 밤 의식을 위해 마트로 향하는 나를 결코 막을 수 없다는 비장한 마음을 안고 휠체어 속도를 보다 높였다.

사실 나는 술을 즐기는 사람이 아니었다. 술은 쓰기만 한 것. 정신을 흐리게 해서 사고를 치게 만드는 것으로만 여겼고 TV에서 술로 가득 찬 냉장고를 보면 얼굴을 찌푸리며 한심하게 여겼다.

그래서 대학교 MT에 갔을 때도 독하게 술먹이기로 악명높았던 고학번 선배 앞에서 단호하게 여러번 거절해서 결국은 술을 한모금도 마시지 않고 돌아왔고, 직장에서도 어른들이 술을 강권하는 것이 극도로 싫어서 “술을 먹으면 안되는 체질”이라며 철저하게 피했다.

내 왜소한 몸 덕분인지, 대부분의 사람들은 몇 번 권하다 말았고 나는 정말 다행이라 생각하며 지내왔다.

그러던 내가 처음으로 즐거운 술자리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된건 예전 직장의 팀 회식 때였다. 당시 팀원들은 찰떡같이 손발도 잘 맞았고, 팀장님도 무척 좋은 분이셨다. 팀 바깥엔 복잡하고 어려운 인간관계가 도사리고 있었지만 팀 내에선 나름 말이 잘 통했다.

당시 술을 아예 입에 대지 않았는데 분위기에 나도 한번 먹어볼까 하는 생각에 맥주를 들이켰다. 시원한 맥주의 첫 모금이 입안에 머물다 부드럽게 목으로 넘어갔다. 쓰지만 그보다 더 강렬한 시원하고 상큼한 느낌이 짜릿하게 다가왔다. 어떠한 말로도 형용할 수 없는 행복감이 몰려오며 팍팍한 직장생활에 대한 보상처럼 느껴졌다. 세상에. 그날 나는 처음으로 직장인의 술문화를 이해하게 된 것이었다.

과거의 즐거움을 떠올리다 보니 어느덧 마트에 도착했다. 예전엔 쳐다보지도 않았던 맥주 코너로 곧장 달려가 심각한 표정으로 진열대를 바라보았다. 그렇게 고민하다 내 손보다 높은 위치에 있는 과일주를 마시기로 결심했다.

옆에서 주류 재고를 채우던 직원에게 조심스레 과일주를 내려달라 부탁했다. 직원은 나를 슬쩍 보더니 한 캔을 집어 주었다.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아니, 낱개 말고 그 옆에 세트로 주세요.”

나는 그날 세상을 다 가진 기분으로 과일주를 세트로 품에 안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도착하자마자 예전에 TV에서 본 것만큼은 아니지만, 자취용으로 산 작은 미니 냉장고 한 칸을 과일주로 가득 채웠다. 가지런히 대열을 갖추어 선 노란 캔들을 보고 있자니 가슴 속을 가득 채우는 어떤 만족감이랄까, 뿌듯함이랄까, 그런 든든한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나는 곧 냉장고 문을 닫고 폰을 집어들었다.

“치킨 주문 좀 하려구요! 여기 전농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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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지혜 칼럼리스트
서울시립대학교 중앙도서관에서 사서로 일하고 있다. 문화 전반에 관심이 많아 월급의 대부분을 문화생활에 쏟고 있으며, 주말에 집에 있으면 몸이 쑤시는 몹쓸 병 때문에 어디론가 자꾸만 나들이를 떠나곤 한다. 사람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 모든 순간을 사랑한다. 칼럼 지면을 통해 여성, 청년, 장애인으로서 겪은 고유의 경험과 생각들을 함께 나누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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