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친구와 이야기를 나누며 길을 가는데 여섯, 일곱 살쯤 되어 보이는 꼬마 셋이 골목에서 갑자기 뛰어나와 앞길을 가로막으며 외쳤다.

“저게 뭐야?”

“괴물이다! 괴물을 처치하라!”

갑자기 나타난 아이들을 전동휠체어로 칠 뻔한 것은 물론이고, 손가락으로 나를 가리키며 괴물이라 칭하는 아이들의 버릇없는 행동에 어이가 없어 아이들을 슬쩍 노려보고는 주변에 보호자가 있는지 확인했다.

아이들이 나온 골목에서 아이들의 엄마로 보이는 사람 둘이 유모차를 끌고 수다를 떨며 천천히 걸어 나왔다.

다시 시선을 아이들에게로 돌려 노려봤더니, 아이들이 그들에게 달려가며 “엄마! 괴물이야!” 하며 나를 가리킨다. 두 사람은 본체만체, 아이들이 어떤 말을 하건 말건 수다에 열중하느라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뿐인가. 사람이 많은 마트나 쇼핑몰에 가면 흔히 이런 말도 듣는다.

“저 사람은 왜 다리가 없어?”

그럴 때면 부모들은 대개 별말 없이 아이를 다른 곳으로 끌고 가버린다. 어떠한 사과나 설명도 없이. ‘나는 다리가 없는 게 아니라 짧은 거라고 이 녀석들아! 저렇게 무례한 행동을 하는데도 아무 주의를 주지 않다니 저 사람들도 참...’

몹시 불쾌하지만, 보통은 갈 길이 바빠 혀를 차며 이어폰을 귀에 꽂고 그냥 가는 편이다. 하지만 며칠이 지나도 그런 상황들이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고 문득문득 떠올라 나를 괴롭힌다.

‘내가 괴물인가?’로부터 시작된 질문은 ‘아이들은 왜 이렇게 버릇이 없는가?’, ‘왜 부모들은 빤히 보면서도 아이들을 제지하지 않는가?’까지 이어졌다.

때론 ‘말이라도 한 마디 했어야 했나?’ 싶다가도 이 사람 한명에게 말해 뭐가 변할까 싶고, 얘기했다가 괜한 시비에 휘말리면 약속에 늦을지도 모르니까 그냥 지나오곤 했다.

이런 일이 생길 때마다 2007년 봄에 MBC에서 방영된 드라마 ‘고맙습니다’가 떠오른다. 주인공 ‘봄이’는 아빠가 없이 치매에 걸린 할아버지와 귤 농사를 짓는 엄마 ‘영신’과 오손도손 함께 살고 있다. 그런 와중에 의료사고로 에이즈에 걸렸다.

봄이의 엄마는 이 사실이 주변 사람들에게 알려지면 아이의 학교생활은 물론이고 마을에서 쫓겨날 것을 알기에, 철저히 숨기고 악착스럽게 살아간다. 그러던 어느 날, 결국 에이즈에 걸렸다는 사실이 동네에 알려지며 마을에서 쫓겨나는 위기에 처한다. 그런 일들을 겪어온 봄이의 엄마는, 남자주인공인 의사 민기서에게 이야기한다.

영신 : 물어볼 게 있어요. 봄이한테 아빠가 없는 건, 나쁜 게 아니고 이상한게 아니고 다른거죠? 내가 미혼모인 건 잘못한 게 아니고, 이상한 게 아니고 미안한 게 아니고, 그냥 다른거죠? 그쵸? 저한테 그렇게 가르쳐줬죠?

기서 : 그래요. 다른 거예요. 오른쪽 눈이 작은 사람이 있고 키가 큰 사람이 있고 검지가 중지보다 긴 사람이 있는 것처럼.

당시 사춘기를 지나며 정체성을 찾아 헤매던 시기에 만난 이 드라마는 나에게 큰 위로를 선물했고, 내 존재를 인정하게 해주었다. 그동안 짐처럼, 혹처럼 생각했던 내 장애가, 어떤 잘못이나 이상이 아니라 다른 거라는. 모든 사람이 다 다르듯이, 나도 그냥 다른 거라는 생각을 하게 해주었다.

그래서 생각하게 되었다. 이런 내용을 우리 아이들에게 어릴 때부터 자연스레 가르치면 어떨까. 장애뿐만 아니라 사회의 모든 소수자를 아우를 수 있는 다양성 교육을 시키면 좋을 텐데. 피부색이나, 장애나, 성별 등에 구애받지 않고 모든 다양한 사람과 함께 살아갈 수 있게,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게 교육한다면 이 사회가 좀 더 살기 편안한 분위기로 변하지 않을까.

지인의 집에 놀러 갔던 어느 날, 다섯 살 꼬맹이가 나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소리쳤다.

“어른인데 왜 이렇게 키가 작지?!”

만일 모르는 아이가 그랬다면 평소처럼 슬쩍 노려보고 화를 삭이며 지나갔을 텐데, 그 아이는 앞으로도 계속 마주칠 일이 있을 테고, 무엇보다도 내가 아끼는 아이였기 때문에 설명을 해주어야 할 것 같았다. 아이의 엄마가 당황해서 아이를 혼내려고 하는 찰나, 내가 말했다.

“너는 그럼 왜 이렇게 작아?”

아이가 눈에 장난끼를 가득 담고 대답했다.

“나는 어린이니까 작은 건데, 어른은 키가 커야 되는데!”

내가 대답했다.

“세상엔 키가 큰 사람도 있고, 작은 사람도 있는거야. ○○이네 반에도 키가 큰 친구도 있고 작은 친구도 있지? 그거처럼 어른도 키 큰 어른도 있고, 작은 어른도 있는 거야.”

아이의 엄마는 놀란 마음을 진정시키고 내 말에 동참했다.

“그래! 쪼꼬만 게 누구한테 뭐라 그러는 거야, 하하하”

아이는 그 이후로 그 질문을 더 이상 하지 않았다. 이해한 것 같았다.

어린아이들도 다 이해할 수 있다. 단지 우리 사회는 이해하고 존중하기 위한 교육의 기회가 없거나, 부족하거나, 혹은 잘못되어 있을 뿐이다.

장애나, 피부색이나, 성별 등과 같은 모든 다양성을 존중할 수 있도록 하는, 인권 감수성이 짙게 녹아든 영유아 대상 교육 과정이 개발된다면, 그래서 어릴 때부터 다르다는 이유로 배제하고 편 가르지 않는 분위기를 만들어간다면, 아마도 10년 뒤, 20년 뒤에는 보다 사회가 부드럽고 따뜻해지지 않을까. 지금보다는 좋아질 미래에 작은 기대를 걸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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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지혜 칼럼리스트
서울시립대학교 중앙도서관에서 사서로 일하고 있다. 문화 전반에 관심이 많아 월급의 대부분을 문화생활에 쏟고 있으며, 주말에 집에 있으면 몸이 쑤시는 몹쓸 병 때문에 어디론가 자꾸만 나들이를 떠나곤 한다. 사람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 모든 순간을 사랑한다. 칼럼 지면을 통해 여성, 청년, 장애인으로서 겪은 고유의 경험과 생각들을 함께 나누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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