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와 이야기를 나누는 딸 ⓒ최선영

“아빠, 정말 감사해요...”

“아빠가 고맙지.”

겨울이 성큼 다가온 계절에 가을의 예쁜 색이 떠나지 못하고 거리 곳곳에 흩어져 있는 맑은 날, 아빠와 딸은 환한 미소를 지으며 아름다운 이 거리의 주인공이 되어 바스락바스락 길을 갑니다.

“네가 태어나던 그 가을도 지금 이 거리만큼이나 그 색이 깊었었지... 그렇게 예쁜 계절에 아빠 품에 안긴 네가 벌써 이렇게 대학생이 되는구나...”

“예쁜 가을... 한예가, 전 아빠가 지어주신 이름이 정말 좋아요. 이렇게 예쁘게 잘 키워주셔서 고마워요.”

아빠의 휠체어와 나란히 걸으며 예가는 아빠에 대한 고마운 마음을 전합니다.

“처음 아빠 무릎에 앉아 미술학원 갔던 때가 생각나요.”

“혹시 부끄럽거나 그렇지는 않았는지 늘 아빠는 걱정했어.”

“부끄럽기는... 전동휠체어를 탄 아빠 무릎에 앉아서 학원 앞까지 가면 친구들이 재미있겠다며 얼마나 부러워했는데.”

“허허, 녀석.”

“진짜라니까요.”

휠체어를 타는 장애인 아빠를 부끄러워하지 않고 늘 친구들 앞에서도 당당하게 ‘우리 아빠는 멋진 장애인’이라고 소개하는 예가의 밝음이 아빠는 고맙습니다.

“참! 아빠 엄마는 어떻게 만나셨어요? 예전에 얼핏 들은 것 같은데... 병원에서 만났던 거 맞아요?”

“응...”

바스락거리는 거리를 딸과 함께 하며 병진은 추억을 더듬어봅니다.

병실에 있는 병진과 간호사 희진 ⓒ최선영

병진이 처음부터 장애인은 아니었습니다. 친구들과의 여행에서 사고를 당해 장애인이 되었습니다. 대학 진학을 앞두고 있던 병진은 그 사고로 인해 대학 대신 1년을 병원에서 새로운 인생을 만나야 했습니다.

쉽지 않은 어려운 길이었고 원하지도 않았고 생각지도 못했던 인생의 시작이었습니다. 그때 희진을 만나지 않았다면 절대 이 길을 지금처럼 씩씩하게 걷지 못했을 겁니다.

희진은 병진을 살뜰히 보살펴 주었습니다. 희진은 남동생 생각도 나고 알 수는 없지만 자꾸 병진을 돌아보게 되어 더 마음을 다해 간호해주었습니다. 따스한 희진의 사랑스러운 미소를 받으며 병진은 힘들었지만 새로운 인생에 대한 두려움, 원망, 좌절을 내려놓고 이전보다 더 열심히 멋진 인생을 살아보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사촌 오빠의 병원 개원으로 그곳으로 가게 된 희진이 병원을 그만두게 되었습니다. 병진은 무거운 마음으로 희진과 이별을 해야 했습니다. 병진의 마음은 이미 누나가 아닌 사랑으로 희진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지만 그 마음을 보일 수가 없었습니다. 잡고 싶은 마음을 누르며 애써 미소를 건넸습니다.

“덕분에 힘든 병원생활을 즐겁게 보낼 수 있었고 제가 만난 또 다른 인생을 받아들였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우리의 만남이 이게 끝이 아니기를 바랍니다.“

“그게 전부에요? 인사가?”

“......”

“우리가 인연이면 언젠가는 다시 만나겠죠... 아니면 어쩔 수 없는 거고...”

병진이 건네는 아쉬운 인사에 희진은 서운한 눈빛을 보내며 알 수 없는 말을 남기고 그의 곁을 떠났습니다.

1년 뒤 병진은 자신이 원래 있어야 할 그 자리로 돌아왔습니다. 꿈에 그리던 대학생활을 친구들보다 늦게 시작했지만 병진은 이렇게라도 돌아올 수 있는 것에 감사하며 열심히 휠체어를 타고 캠퍼스 곳곳을 누비고 다녔습니다.

병진을 도우며 그림자처럼 함께 해주는 희열 덕분에 병진의 학교생활이 더 즐겁기도 했습니다. 희열은 병진보다 한 살 아래지만 그냥 친구처럼 지내기로 했습니다.

“내일 우리 큰누나 전시회 하는데 같이 가지 않을래?”

“전시회?”

“응, 한국화 전공인데 이번이 두 번째 개인전이거든.”

“오~대단하시네. 당연히 가봐야지.”

병진은 고마운 친구 희열의 큰누나 전시회에 예쁜 꽃다발을 들고 찾아갔습니다.

다시 만난 병진과 희진 ⓒ최선영

“어-”

“오랜만이네요.”

병진은 그곳에서 희진을 만났습니다. 희열의 둘째 누나로 만난 희진을 보는 순간 병진은 가슴 한편에 묻어두었던 희진에 대한 설렘을 다시 꺼내들었습니다.

“희열이 누님이셨군요...”

“희열에게 학교에 휠체어 타는 친구가 있다고 해서 혹시나 해서 이름을 물어보니 병진 씨 이름이더라고요. 놀랍고 반가웠어요.”

“우리 인연인가 봐요. 그때 했던 말 생각나세요?”

“네. 이렇게 동생 친구로 다시 만나네요...”

병진은 동생 친구라는 말에 희진이 자신에 대한 선을 긋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네 친구 누님이시죠..."

병진의 말에 희진도 나이 많은 자신을 누나 그 이상으로 생각하지 않는 병진을 보며 찌푸린 미소를 보냅니다.

그들은 서로 마음 깊은 곳에 있는 설렘을 묻어두고 한 걸음씩 물러섭니다. 희열을 사이에 두고 희진과 병진은 서로를 바라보았습니다. 서로의 마음을 알지 못한 체 2년의 시간을 보냈습니다.

“누나 선 보라고 집에서 난리야.”

희열이 던진 무심한 말에 병진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듯했습니다.

“선? 아직 그럴 나이는 아니잖아.”

“뭐가 아니야 여자 나이 27이면 슬슬 준비해야지. 요즘은 다들 늦게 간다고 하지만 우리 집은 다들 일찍 하는 편이고 나도 그게 맞다고 생각해. 나중을 생각해서라도.”

“으... 응..”

“대답이 좀 그렇다. 누나랑 너 보면 이상하게 야릇한 기운이 늘 느껴져. 내가 모르는 무언가가 둘에게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네가 모르는 무언가가 뭐가 있겠어.”

“음... 그야 모르지... 좀 더 지켜보고 조사해보면 나올 것도 같고. 누나가 선보라는 말을 너무 싫어해서 좀 이상해서 그래. 예전에는 늘 결혼 일찍 가버릴 거라고 노래를 불렀는데... 몇 년 전부터 결혼 이야기 나오면 정색을 하니...”

병진은 희열의 말을 듣고 가만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심장이 타들어갈 것처럼 괴로웠습니다. 그렇게 며칠을 앓아누워있다 희진을 만났습니다.

“저...... 제가 이런 상황이고 나이도...”

“나이도 어리고 아직 학생이죠.”

“네... 그리고 전 장애인이고... 그래서 이런 말 하면 어쩌면 다시는 못 보게 될지도 모를 것 같아서 많이 망설였어요. 저... 많이 좋아합니다. 누나가 아닌 여자로."

“그 말을 이제야 듣네요. 나이도 많은 내가 먼저 내 마음을 보이지도 못하고 그 말 해주기를 얼마나 기다렸는데 이제야 듣네요 이제야..."

“전... 제가... 미안해요 그리고 고마워요 제 마음을 받아주어서.”

“그 맘 받는다는 말, 안 했는데.”

“예?”

“앞으로 하는 거 봐서 받을지 말지 할 거예요."

“아... 잘 할게요. 나 같은 사람에게 마음 열어 준 희진 씨를 평생 지금처럼 매 순간 사랑할게요.”

“나... 여섯 살이나 많아요.”

“저... 평생 휠체어를 타야 해요.”

“그건 괜찮아요.”

“저도 나이 이런 거 상관없어요.”

많은 어려움이 있었지만 희열의 적극적인 지지를 받아 병진과 희진은 3년 후 결혼을 하고 다음 해 가을 예쁜 딸을 낳았습니다. 병진, 희진 두 사람의 이름을 따서 태명이 진진이던 예가는 단풍이 곱게 물든 예쁜 가을에 그들 품에 안겼습니다.

이제 대학생이 될 예가 ⓒ최선영

그렇게 선물처럼 병진의 품에 안겼던 예가는 이제 곧 대학생이 됩니다.

“아빠 엄마의 사랑은 운명인 것 같아요. 그렇게 다시 만난 것을 보면.”

“그렇지? 아빠가 좀 더 용기가 있었다면 더 일찍 만났을 텐데...”

“더 일찍 만났으면 제가 아닌 다른 아이가 태어날 수도 있었겠죠.”

“허허, 그럼 안되지 우리 예가 없으면 아빠 못 사는데.”

“호호, 저도요. 아빠 저 그때 정말 재미있었어요. 그때나 지금이나 아빠 없이는 저도 못 살아요.”

아빠 무릎에 앉아 전동휠체어를 타는 것을 제일 좋아했던 예가는 지금 그때를 떠올리며 행복한 미소를 보입니다. 병진도 예가를 미술학원에 바래다주고 오는 길이 가슴 벅차고 좋았습니다.

“아빠, 전 아빠가 제 아빠인 것이 참 좋아요.”

“고맙구나... 다른 아빠들과 다른데 우리 예가는 늘 당당하게 아빠를 소개해줘서 내가 예가 아빠라는 것이 행복했단다.”

"너네 아빠 장애인이지? 하며 놀리는 아이들도 가끔 있었어요. 또 어떤 아이들은 잘 몰라서 너네 아빠는 휠체어에 앉아서 어떻게 화장실에 가? 너 안아주지도 못하지? 하는 애들도 있었고요. 그럴 때마다 부끄럽다는 마음보다는 장애인에 대한 개념이 없었던 그 아이들이 오히려 불쌍해 보였어요. 아무것도 모르는 것들, 하며 혼자 심통을 부렸었죠. 휠체어가 얼마나 재미있는 줄도 모르는 바보들 하며. 아빠 무릎에 앉아 전동 휠체어를 타고 미술학원 다닌 덕분에 저 이렇게 제가 가고 싶었던 곳을 가게 되었어요. 정말 감사해요.”

“허허, 기특한 소리. 네가 열심히 잘 해서 가게 된 거지... 아빠 엄마는 네가 정말 자랑스럽단다.”

“전 아빠가 자랑스러워요.”

활짝 웃고 있는 병진과 예가 ⓒ최선영

이 세상에서 전동 휠체어로 미술학원을 데려다주고 유치원을 등하교 시켜주는 아빠는 흔치 않습니다. 늘 한계에 도전하고 긍정적인 생각으로 어떤 환경에서도 미소를 잃지 않는 아빠의 모습을 예가는 세상 누구보다 자랑스러워합니다.

장애인 아빠여서 특별한 추억을 만들 수 있었다고 좋아하는 예가를 보며 병진은 생각합니다. 장애 때문에 세상에 나오지 못하거나 결혼과 출산을 걱정하는 장애인이 있다면 용기를 내고 더 잘 키울 수 있으니 절대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해주고 싶어 합니다.

모든 장애인이 병진 같지 않고 모든 장애인의 자녀들이 예가처럼 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다르지만 함께 하는 삶 속에 병진과 예가 같은 행복을 만들어갈 수 있는 세상이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병진과 예가의 또 다른 행복을 기대하며 응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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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선영 칼럼리스트 대학에서 미술을 전공하고 졸업 후 디자인회사에서 근무하다 미술학원을 운영하였다. 현재는 네이버 블로그와 카페를 운영하며 핸드메이드 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장애를 안고 살아가는 평범하지만 결코 평범할 수 없는 우리들의 이야기를 동화형식으로 재구성하여 누구나 쉽게 공감할 수 있는 따뜻한 언어로 담아 내려고한다. 동화를 통해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서로를 이해하는 시선의 폭이 넓어져 보이지 않는 편견의 문턱이 낮아지고 서로 배려하고 이해하는 어우러짐의 작은 역할이 될 수 있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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