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방춤방 공연 홍보를 하는 서울남산아트센터 포스터에서의 공연 모습. ⓒ서인환

‘이방춤방’은 ‘이야기의 방식, 춤의 방식’을 줄인 말이다. 이 공연은 ‘이방노방’, 즉 ‘이야기의 방식, 노래의 방식’에 이은 후속작이다. 베세토축제는 국제축제로 한·중·일을 연결하는 축제를 말한다.

최근 남산아트센터에서 베세토 패스티발 주최로 ‘이방춤방’ 공연이 있었다. 이방춤방은 젹벽가를 공연하였고, ‘이방춤방’은 무형문화재 공옥진의 병신춤을 공연하였다. 2012년 사망한 공옥진이 유령이 되어 그의 수제자 7인에 의해 다시 부활한 것이다.

서양에서 장애인들 특히 저신장장애인들은 궁전에서 왕족들을 즐겁게 하기 위해 서커스를 하는 일을 했다. 장애인들은 무성적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보았기에 공주를 즐겁게 하면서 스캔들을 막을 수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그리고 장애인들은 누드화가로도 일했다. 왕족이나 귀족의 부인의 아름다움을 영원히 담기 위해 그림을 그리고 싶었으나, 벗은 모습을 비장애인에게 공개할 수는 없으나 장애인에게는 보여도 무방하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한국에서는 세종 때에 장애인들의 애환이 예술로 승화되어 더욱 감정이 풍부한 음색을 연주할 수 있고, 장애인에게도 일자리를 준다는 명분으로 궁중음악을 직업교육을 하여 시각장애 여성에게 연주하도록 시켰다.

임진왜란 후 백중일(음력 7월 15일)이 되면 세벌 김매기를 마친 더운 여름 지친 몸을 쉬게 할 목적으로 여름 휴한기를 가지게 되는데, 이날 밀양지역에서는 머슴들은 놀이마당을 열어 하루를 즐겼다.

이때 등장하는 것이 병신춤이다. 병신춤은 장애인을 비하하려는 목적이 아니라 양반들을 병신에 빗대어 위선적 양반에 저항하려는 해학과 서민의 억눌린 욕구를 해소하는 양식이 들어 있다.

‘밀양아리랑’과 함께 한 맺힌 사람들의 카타르시스를 담으려면 느린보 양반들을 비웃되 해학적으로 재미있게 하여 양반의 호방한 포용력에 기대어 표현할 수밖에 없었고, 억압 사회에서도 이 정도의 행동은 지배층들의 문화정책으로 허용할 수밖에 없었다.

그 이후 장애인을 만나면 아이들이 장애인 뒤를 따라다니며 놀리는 풍습이 생겼다. 순진한 아이들은 장애인을 병신춤과 연상하며 백중날 춤판을 따르는 흉내를 내게 된 것인데, 그 순수가 타인에게는 너무나 잔인한 것이었다.

병신춤이라 하면 공옥진을 떠올리게 된다. 공옥진의 아버지는 창을 하던 사람인데, 일본 징용을 면하고자 공옥진을 춤꾼 최승희에게 팔았고, 공옥진은 일본으로 건너가 몸종이 되어 어깨 너머로 춤을 배웠다.

기생집에서 춤을 추기도 하고, 뇌졸중과 교통사고로 죽음의 문턱까지 가는 위험을 겪기도 하였으며, ‘수진’ 스님으로 출가를 하기도 하였으며, 환속하여 장터에서 춤을 추가다 무용평론가 정병호에게 발탁되어 정식으로 무대에 서게 되었다.

공옥진의 생을 보면 심청가가 얼마나 자신에게는 뼈에 사무칠까 싶고, 조선시대의 병신춤이 자신에게는 장애인 희화가 아니라 자신의 운명에 대한 표현일 수도 있다. 운명은 보이지 않지만 저항하고 싶은 대상이고, 울분을 춤을 통해 쏟기에 적절한 절규의 도구였을 것이다.

공옥진은 평소 자신의 춤은 장애인들에게 희화가 아니라고 항변해 왔다. 사실 공옥진의 병신춤은 곱추춤인데, 단지 척추장애만 표현된 것이 아니라 뇌성마비를 표현한 것 같다. 다리도 휘청거리고 팔도 뒤틀리고 경직된다. 한 장애 유형을 흉내 내는 것이 아니라 자기 나름의 장애인 관념적 모습을 만들어내고 있다.

하지만 예술이라고 하여 외설이 허용되는 것이 아닌 것처럼 장애를 소재로 하는 것은 어떤 이유이든 자유라 말하기 어렵다.

공옥진의 수제자들이 공옥진의 이름을 걸고 결코 그 경지를 흉내를 낸 것이 아니라 현대적 해석을 가미한 것이고, 키네틱 센서를 이용한 게임화를 시도한 발상에서 출발하였고, 공옥진의 영광을 재현한 것이 아니라 현대화하여 새로운 방식을 찾아가는 여정으로의 노력이라고 하나, 구경꾼들의 이해를 돕고자 공옥진의 춤을 스크린 배경으로 사용하였고, 장애인을 소재로 한 것은 마찬가지다.

어느 게임에서 등장인물로 공익근무자를 등장시키면 ‘국가공인 장애인’이라 했다. 이는 부정적 의미와 장애인에 대한 비하가 들어 있다. 병신춤을 게임화하는 것도 같은 의미에서 부정적이라 해석된다.

예술은 그 자체가 완성도가 아니라 완성을 향해 가는 과정이라 하면서 현재의 수준을 합리화하고, 예술은 흥이고 놀이이며, 공동의식이라고 말하지만 구경꾼의 눈을 가리고 그 이상이라 스스로 추켜세우기도 한다.

이번 공연은 공옥진의 1인 창무극이 7인 집단극이 되었으니 더욱 문제다. 장애인춤이 집단춤의 성격을 가지고 보니 더욱 희화를 한 것 같고, 게임의 시도라니 더욱 그렇다. 춤은 스토리나 내용에서 익살이 없고, 행동의 부자연스러움에서 찾는다.

그리고 장애인춤을 공옥진의 인생사를 들려주며 합리화하고 있다. 춤이 끝나고 극장을 나갈 때까지 눈물을 멈출 수 없을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좋다면 춤을 봐 달라는 멘트는 탈진할 만큼 춤을 추는 모습에 점수를 받게 되지만, 그렇다고 장애인 흉내가 예술로 되는 것은 아니다. 내용을 보고 감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 감동을 주입하는 포장지다.

장애인춤이 폭발적인 호응이 있다고 하여 그들이 공동의식으로 모두 같은 공감을 하지는 않는다. 장애인에 대하여 긴장관계에 있던 사람들이 마음껏 마음 저변의 부정적 시각을 드러내고 한바탕 웃는 공동의식이 될 수도 있다.

공옥진의 후예들은 장애인 춤을 재해석하고 창조적으로 계승하고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조선시대의 저항과 해학, 울분이 재해석되고 재창조된 것은 아니다.

장애인춤은 소통의 의미를 가진다고 말하기도 한다. 구경꾼의 반응은 얼마나 형상화하여 잘 흉내를 내는가에도 반응을 보인다. 호응이 폭발적이라고 하여 예술이라 할 수는 없다. 그것이 소통의 방식이라면 소통이 예술이라면 요즘의 정치가 최고의 예술일 것이다.

비뚤어진 왜곡된 문화를 만들고 장애인에 대한 조심스러움을 벗어던지는, 웃어서는 안 되는데 하다가 웃고야마는 것이 장애인춤이다. 비너스에서 장애인을 미학으로 해석하기도 하지만, 그것은 미모주의가 아닌 저항이고, 장애인도 완전함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그러나 장애인춤에는 단지 얄궂은 행동과 비틀거림이 음악에 맞춘 행동이라는 춤과 뒤섞여 있을 뿐이다.

관객과 혼연일체가 되는 감동과 화합이 있다고 한다. 흥을 나누었다고 하여 화합이 되는 것도 아니고, 장애인춤에서 감동은 예술 경지의 성취나 공동의식에서의 유대감도 아니다.

혹자는 공옥진의 생이 어려웠으니 춤 속에는 인간애가 들어 있다고 말한다. 진정한 예술은 인간애에 도달하는 감동이다. 갈등과 보기 거북함을 조장하는 것이 화합일 수 없다. 진정한 인간애라면 성숙되고 약자의 불편함을 터치하지 않는 윤리가 우선되어야 한다.

장애인식개선이 강의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결과로 그 효과가 나타나야 하듯이 예술의 감동은 공연 속의 도가니가 아니라 그 이후의 진정한 감동과 화합을 지향해야 한다.

이번 공연은 그런 의미에서 공옥진의 이름을 판 사회적 장애인식의 감수성을 그르치는 프로파간다(선동문화)일 뿐이다. 약자를 소재로 그들의 삶을 이야기한 것이 아닌 유희의 대상화로 예술 속에 숨어 선을 넘은 통속극에 불과하다. 잘못된 유희본능을 극복하고 자기성찰이 있어야만 예술은 꽃이 핀다.

삶의 굴곡을 장애인으로 표현하기에 매우 유리하다고는 하나 춤이란 장단에 맞춘 흥에 겨운 행동인데, 굴곡을 장애인춤의 행위로 표현한 것은 조선시대에는 맞을지 모르겠으나, 현대에 와서 장애 자체를 한과 기능저하가 아닌 사회적 제약으로 보는 만큼 현대해석에는 맞지 않다. 게임이란 새로운 기법으로 시도했을 뿐, 장애에 대한 새로운 해석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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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인환 칼럼니스트
현재 사단법인 장애인인권센터 회장, 한국장애인고용안정협회 고용안정지원본부장을 맡고 있다. 칼럼을 통해서는 아·태 장애인, 장애인운동 현장의 소식을 전하고 특히, 정부 복지정책 등 장애인들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는 이슈에 대해 가감 없는 평가와 생각을 내비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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