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스에서 내려 혼자 서 있는 은지 ⓒ최선영

은지를 태운 버스는 낯선 길에서 멈춰 섭니다. 매일 집 앞에 세워주던 스쿨버스 기사 아저씨는 오늘은 시간이 너무 늦어졌다며 집과 조금 멀리 떨어진 곳에 은지를 내려주었습니다. 그리고 아저씨는 미안하다는 말을 남기고 바쁘게 차를 내몰아 달립니다.

잠시 두리번거리던 은지는 엄마와 함께 가던 낯익은 병원이 있는 것을 보고 금세 익숙한 거리로 들어섭니다.

무거운 가방을 등에 메고, 은지는 토박토박 작은 걸음을 옮기며 집을 향해 걸어갑니다. 그때, 은지를 향한 낯선 목소리가 은지의 걸음을 세웁니다.

"야! 너 장애인이야?"

처음 보는 또래 남자애는 은지를 바라보며 말을 던집니다.

은지는 힐긋 쳐다보고는 다시 걸음을 옮깁니다.

"야! 내가 물었잖아. 너 바보야?"

"넌 내가 바보로 보이니?"

은지도 미간을 찌푸리며 말을 툭 던집니다.

"바보도 아닌 게 왜 대답을 안 해."

"네가 다 알면서 물었잖아. 보면 모르니? 나 장애인 맞아."

은지를 놀리는 상혁 ⓒ최선영

물끄러미 한참을 바라보던 남자아이는 은지를 향해 다시 말을 던집니다.

"어쩌다 장애인이 된 거야? 뒤뚱뒤뚱 걸음도 제대로 못 걷는 바보! 너 되게 바보 같은 거 알아?"

놀리듯 말하는 그 아이에게 화가 난 은지는 쏘아붙이듯 말했습니다.

"내가 보기에는 네가 더 바보 같아. 너도 나처럼 장애인이 될 수 있어."

"하하하 바보!"

한바탕 웃던 남자아이는 은지를 향해 더 심한 말들로 놀리기 시작합니다.

은지는 이를 악물고 쏟아지는 눈물을 참아냅니다.

그 아이 앞에서는 눈물을 보이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 아이는 은지가 집 앞에 도착할 때까지 따라오며 장애인이라고 놀려댔습니다.

"은지, 학교 다녀오는구나"

지나가던 옆집 아주머니가 은지를 보며 아는 척을 합니다.

"넌 누구니?"

은지를 따라오는 남자아이를 보며 그 아주머니는 말합니다.

그제서야 그 남자아이는 후다닥 달아납니다.

평소와 달리 은지는 인사도 없이 집으로 들어갑니다.

그리고 은지는 현관 입구에 주저앉아 엉엉 울어버립니다.

"어머 은지야 무슨 일이야? 왜 그래?"

놀란 엄마는 은지를 안아주며 우는 이유를 물었습니다.

하지만 은지는 아무 대답 없이 한참을 그렇게 울고 또 울었습니다.

그리고 방에 들어가 한참을 나오지 않다가 아빠가 퇴근하고 들어오자 방에서 나오더니 "나 이제 학교도 안 가고 아무 데도 안 갈 거야"라고 말하고는 다시 방으로 들어갑니다.

그날 깊은 밤, 무슨 영문인지 말해보라는 아빠 엄마에게 은지는 낮에 있었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그 아이가 은지를 놀리며 은지가 가는 발 앞에 주머니에서 과자봉지를 꺼내 던지기도 했다는 것을.

아빠 엄마는 울먹이며 말을 이어가는 은지를 안아주었습니다.

은지를 달래주는 엄마와 아빠 ⓒ최선영

"은지야... 세상에는 아주 많은 종류의 사람들이 살고 있어. 좋은 사람도 많고, 오늘 은지가 만난 그 아이처럼 다른 사람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어. 은지는 다리가 불편하지만 그 아이는 마음이 아픈 거야. 불쌍한 아이지."

아빠는 은지에게 조심스레 말합니다.

"그래, 은지는 다리가 불편하지만 힘들거나 많이 아픈 사람 보면 도와주려고 하는 마음을 가졌잖아. 보통 사람들은 그런 마음으로 살아. 그런데 오늘 그 남자아이는 몸은 멀쩡한 것 같지만 마음이 삐뚤어져서 아주 못난, 아픈 사람이야."

엄마도 은지를 토닥이며 말합니다.

"그럼 내가 용서해줘야 하는 거야?"

은지는 곧 눈물을 쏟아낼 것 같은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말합니다.

"아니, 용서하라는 말이 아니야. 네가 용서하고 싶을 때 하면 돼. 용서는 잘못한 사람이 깊이 반성하고 사과할 때 하는 거야."

"그럼 용서 안 할래, 그 애는 반성도 안 할 테고 사과하러 오지도 않을 테니까."

"만약 그 아이가 진심으로 사과한다면 용서해줄 수 있어?"

은지는 말없이 한참을 손만 꼼지락거리며 매만지다 아주 작은 소리로 말합니다.

"만약 정말 깊이 반성하고 잘못했다고 하면..."

말끝을 흐리다 은지는 잠시 다시 생각에 잠깁니다.

"그래도 용서하기 싫어."

은지는 조금 커진 목소리로 용서하기 싫다는 말을 하고는 또 울어버립니다.

은지 아빠 엄마는 은지를 안아주며 은지의 상처 난 마음을 토닥여줍니다.

며칠 뒤,

은지는 엄마와 사촌 오빠 졸업선물을 사기 위해 선물가게를 갑니다.

"어서 오세요."

선물가게 주인은 인사를 하다 은지가 들어오는 것을 보고 멈칫합니다.

"어머, 예쁘게 생겼는데 어쩌다..."

"주인이 바뀌었나 봐요"

엄마는 주인아주머니의 말을 가로채며 낯선 얼굴에 말을 건넵니다.

"네 지난 토요일에 이사 왔어요."

가게 문이 열리고 남자아이가 바쁘게 뛰어들어옵니다.

은지도 그 남자아이도 깜짝 놀라 서로를 바라봅니다.

선물의 집에서 다시 만난 은지와 상혁 ⓒ최선영

"어~장애인?"

그 남자아이는 은지를 보고 놀라 혼잣말을 합니다.

은지 엄마는 그 한마디에 그 아이가 누구인지 알아챘습니다.

"어디 갔다 이제 와~ 엄마가 일찍 오라고 했잖아."

선물의 집 주인은 그 아이를 상혁이라 부르며 혼을 냅니다.

상혁이는 얼음이 된 듯 그 자리에 서 있습니다.

"상혁아, 은지에게 할 말 없니?"

엄마는 부드러운 말투로 상혁에게 말을 건넵니다.

멀뚱거리며 서 있던 상혁이는 "네"하고는 말없이 또 멀뚱거립니다.

"나 은지 엄마야 짐작했겠지만, 그날 일 들었어. 아주머니 생각에는 네가 많이 잘못한 것 같은데... "

"아니 무슨 일이세요? 우리 상혁이가 뭘 잘못했다는 건지요..."

"상혁이에게 직접 들으세요. 지금 상혁이는 잘못한 게 뭔지 모르고 있는 것 같네요."

엄마는 은지를 데리고 가게 문을 나옵니다.

"대체 무슨 사고를 또 친 거야?"

가게 안에서 상혁이를 나무라는 소리가 문밖까지 쏟아져 나옵니다.

상혁이는 그 후로도 여러 번 마주쳤지만 은지에게 사과하지 않았습니다.

은지가 혼자 있을 때 오히려 "너 때문에 혼났잖아. 장애인 주제에"라며 또 은지의 마음을 아프게 했습니다.

하지만 이제 은지는 울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아이가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1년이 지나고 은지네는 이사를 했습니다.

상혁이와 마주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 은지는 몹시도 기뻤습니다.

"절대 평생 네 얼굴 잊지 않을게. 나중에라도 네가 사과해도 절대 그 사과 안 받을 거고."

은지는 상혁이가 몹시도 밉고 싫었습니다.

누군가를 미워하거나 싫어하면 내 마음이 더 힘들다고 엄마는 말했지만 상혁이만큼은 미워하고 싫어하기로 했습니다.

잘못도 깨닫지 못하는 상혁이를 용서한다는 것이 은지는 더 힘들었습니다.

은지는 그날 일이 생각날 때마다 상혁이 이름을 연습장에 적어놓고

"넌 꼭 벌받을 거야. 꼭!" 하며 저주를 걸기도 했습니다.

그러다가도 "내가 이러면 너랑 똑같은 거지?"하며 그 이름을 지워버리곤 했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상혁이라는 이름도 은지의 기억 저 너머로 지워지는 듯 희미해졌습니다.

15년 후

영어 학원에서 아이들을 지도하는 선생님이 된 은지에게 전화 한 통이 걸려옵니다.

"저 상담 좀 하려고 하는데 언제 찾아뵈면 될까요?"

보통 엄마들이 전화를 하는데 아빠의 전화에 은지는 의외라는 생각을 하며 수업이 끝날 즈음에 약속을 잡습니다.

휠체어를 밀고 들어오는 상혁 ⓒ최선영

"안녕하세요?"

아이의 휠체어를 밀고 들어오는 아빠는 공손하게 인사를 건넵니다.

은지의 불편한 다리를 본 아빠는 "우리 민재를 더 잘 이해하고 지도해주실 것 같아 안심이 됩니다."라는 말을 하며 살짝 미소를 보입니다.

수강등록 카드를 보다 말고 아빠는 은지의 이름을 보더니 조금 놀란 듯한 표정을 지어 보입니다. 수강 카드를 확인하던 은지도 '추상혁' 이라는 보호자 이름을 보고 놀랍니다.

"상혁? 설마 그 추상혁"

혼잣말을 삼키다 말고 은지는 "민재야 우리 잘해보자. 내일 3시까지 오면 돼" 민재에게 인사를 합니다.

민재와 일주일에 두 번, 한 달 수업이 끝나던 날 저녁. 마지막 수업을 마치고 퇴근 준비를 하는 은지에게 민재 아빠 상혁이 찾아왔습니다.

"저... 혹시, 어릴 때 은평구에 사셨는지요?"

"네 은평구... 한아름 선물의 집이 있는."

"그랬군요, 역시. 저 알아보셨겠네요."

"네 보호자 성명란에 이름 보자 바로 알았어요."

은지와 상혁은 서로를 알아보았지만 모른 체했습니다.

그러다 상혁이 먼저 찾아와 말문을 엽니다.

"너무 시간이 많이 지났지만... 그때, 정말 미안했어요.

그날 바로 알아봤지만 절대 용서하지 않을 거라는 마지막 말이 생각나서... 차마 아는 체를 못했어요."

"용서... 할게요 이제는.

용서... 나 역시도 누군가에게 잘못을 했을 거고.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죽을 수밖에 없는 내가 지금 살아있다는 걸 알게 되면서 내가 용서 못 할 일은 없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전까지는 정말 문득문득 미울 때도 많았고 그 얼굴을 혹시라도 잊어버릴까 봐 잊지 않으려고도 했는데... 내가 누구를 용서하고말고 할 자격이 없다는 걸 알게 되었어요. 누구에게든지 그렇게 대접받기를 바라면, 나부터 그렇게 대접해야 한다는 걸 배웠어요. 내가 용서 못 하면 나도 그 누구에게든 용서 못 받는다는 것을... 그렇지만 상혁이라는 남자아이를 떠올리며 했던 기도는 언제라도 꼭 자신의 잘못을 진정으로 뉘우치고 잘못된 것은 잘못이라고 깨닫는 마음이기를 바랐어요.

그게 잘못한 일에 대한 반성하는 자의 자세니까. 용서받는 자의 태도니까.

내가 용서해주고 싶어도 잘못했다고 말하는 사람이 없으면

반쪽짜리 용서가 되는 거잖아요. 오래전부터 용서해주고 싶었어요."

은지의 말에 상혁은 더 고개를 숙이며 미안해했습니다.

"그때는 어려서... 어리다는 말로 그 잘못을 핑계 삼으려는 것은 아니고...

그렇게 말하니까 더 미안한 마음이 듭니다. 민재..."

상혁은 아들 이야기를 하려다 말을 잇지 못하고 잠시 고개를 또 숙입니다.

이야기를 나누는 상혁과 은지 ⓒ최선영

"민재가 사고로 저렇게 되고 난 후, 잊어버렸던 내 부끄러운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그때 은지 마음이 얼마나 아팠을까... 나 때문에 민재가 저렇게 된 것 같아 처음에는 미칠 것만 같았어요. 내 죄에 대한 대가를 내 아들이 치른다는 죄책감도 들었고... 용서를 빌고 싶었는데 이렇게 만나서...“

"민재의 장애는 그 누구의 탓도 아니에요.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사고예요. 죄책감 갖지 마세요. 그리고 그때는 어렸어요 우리 둘 다. 무엇보다 지난 과거의 잘못을 반성하고 인정하는 마음이 감사하네요. 이제는 민재만 생각하고 최선을 다하는 아빠가 되세요. 지금처럼."

상혁을 보내고, 마음에 장애를 안고 있던 상혁의 어린 모습을 떠올리며 혼잣말을 합니다

"민재가 장애를 갖게 된 건 정말 안타까운 일이지만 그런 힘든 일을 겪는 중에라도 자신의 어린 시절 잘못을 떠올리고 반성하는 어른다운 어른이 되어서 정말 다행이다. 너도 모르게 난 널 용서하고 싶었고, 용서했었는데... 그 용서가 헛되지 않아서 감사하다."

은지를 만나고 나온 상혁은 어둠이 가득 내려앉은 거리를 바라보며 미소를 보냅니다.

"여전히 씩씩하고 똑똑하게 잘 컸구나... 사실 너무 예뻐서 말 한번 걸어보고 싶어서 다가갔는데... 너무 새침 거려서 얄미운 마음에 괴롭혔던 것 같다... 엄마에게 심하게 혼나고 매 맞고 그리고는 네가 미운 마음에 또 못된 말하고.... 그게 얼마나 큰 상처를 주는지도 모르고. 그냥 잘못인지도 모른 체 잊고 살았는데, 민재를 통해 그 일이 내 기억에서 떠오르고 마음이 많이 무거웠다... 용서해줘서 고맙다. 네가 했던 말... 너도 장애인이 될 수 있어.

그 말, 민재가 장애인이 되고서야 내 마음에 와닿았다. 누구나 장애인이 될 수 있는데... 난 왜 그걸 모르고 살았는지..."

상혁은 이제 한결 가벼운 걸음으로 민재가 있는 집으로 향합니다.

비록 힘든 일을 겪은 다음 자신의 잘못된 과거를 용서받으려는 마음이 들었지만 어른답게 용서를 구하는 상혁의 모습은 보기 좋습니다.

반성도 없고 사과도 없는데 용서를 강요해서도 안된다는 생각이 듭니다.

나쁜 의도가 없다 하더라도 내가 던지는 말 한마디 나의 생각 없는 행동하나가 상대에게는 큰 상처와 씻지 못할 아픔으로 기억될 수 있습니다. 한 번만 더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말과 행동이 된다면 서로가 미소 지을 수 있는 아름다운 사회가 되지 않을까요.

누구나 장애인이 될 수 있다는 마음으로 배려하는 따뜻한 사회가 되기를 바라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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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선영 칼럼리스트 대학에서 미술을 전공하고 졸업 후 디자인회사에서 근무하다 미술학원을 운영하였다. 현재는 네이버 블로그와 카페를 운영하며 핸드메이드 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장애를 안고 살아가는 평범하지만 결코 평범할 수 없는 우리들의 이야기를 동화형식으로 재구성하여 누구나 쉽게 공감할 수 있는 따뜻한 언어로 담아 내려고한다. 동화를 통해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서로를 이해하는 시선의 폭이 넓어져 보이지 않는 편견의 문턱이 낮아지고 서로 배려하고 이해하는 어우러짐의 작은 역할이 될 수 있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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