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린을 업고 걷는 윤정. ⓒ최선영

눈이 펑펑 쏟아지는 겨울.

그 계절에 눈을 맞으며 걷고 싶다는 유린을 업고 윤정은 길을 걷습니다.

신호등 앞에서 초록불로 바뀌기를 기다립니다.

유린은 엄마 등에 업혀 한 손으로는 엄마의 목을 꼬~옥 껴안고

다른 한 손으로는 우산을 받쳐 들고 있습니다.

“엄마 추워?”

“아니, 유린이의 따듯한 심장이 엄마 등을 데워주고 있어서 하나도 안 추워.

우리 유린이가 많이 춥지?“

“아냐 엄마, 난 하나도 안 추워. 엄마 등은 전기담요처럼 따뜻해.”

신호등 불이 바뀌자 엄마는 눈이 소복하게 내린 도로를 조심조심 건넙니다.

신호를 받으려고 일시정지를 한 차 안에서 엄마와 유린의 모습을 지켜보는 준하는 안쓰러운 마음이 듭니다.

“저러다 넘어지면 어쩌려고...”

작은 체구의 윤정은 조심조심 눈길을 걸어가다 그만 미끄러져 유린을 업은 체 넘어져 버립니다.

“유린아 괜찮아? 어디 다친데 없어? 미안해... 엄마가 더 조심했어야 하는데...”

“난 괜찮아. 엄마는? 다친데 없어?”

유린을 걱정하는 엄마를 오히려 더 염려하는 유린은 엄마의 몸 여기저기를 만지며 엄마가 괜찮은지 물어봅니다.

“저... 어디 다치신데는 없으신지요”

안쓰러운 마음으로 지켜보던 준하는 달려와 어디까지 가는지

태워주겠다고 했습니다.

“괜찮아요 말씀은 고맙지만...”

일어서던 윤정은 발목에 힘을 주지 못하고 그만 다시 주저앉고 맙니다.

“아무래도 발목을 다치신 모양입니다 일단 제 차에 타시죠”

신호등 불은 이미 바뀌어 있었고 신호대기하던 다른 차에서 부부가 내려

윤정을 부축해줍니다.

준하의 손을 잡은 유린. ⓒ최선영

“아저씨가 도와줄게. 혹시 아저씨가 업어줘도 되겠니?”

준하는 유린이 편하게 업힐 수 있도록 다정하게 물어봅니다.

“네 고맙습니다”

유린은 준하에게 살짝 미소를 보이며 준하의 내민 손을 잡습니다.

뒤에서 빵빵거리는 소리에 그들은 서둘러 차에 올랐습니다.

“눈도 많이 많이 와서 길도 미끄러운데... 어디 가시는 길이세요?”

준하는 백미러로 뒤 자석을 보며 조심스레 물어봅니다.

“네... 사거리에 있는 꽃가게...”

“아...‘향기가 머무는 곳’ 맞죠? 지나가다가 몇 번 봤거든요”

“네”

“이렇게 눈 오는데...”

“제 가게거든요” 윤정은 준하가 말을 체 끝내기 전에 답을 합니다.

“그러시군요... 우선 병원부터 가셔야겠어요.”

“아니에요, 가게에 내려주시면 그다음은 제가 알아서 할게요.”

“아닙니다, 이렇게 눈도 많이 오는데... 그냥 가면 제 마음이 무거워서 그럽니다.

제 마음 좀 편하게 해주세요.“

준하의 차는 병원을 향해 달립니다.

다행히 윤정은 크게 다치지는 않았습니다. 간단한 응급처치를 하고 약을 받아 가게로 왔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너무 큰 신세를 졌어요.”

“아닙니다. 많이 다치지 않으셔서 다행입니다.

퇴근하실 때 조심해서 하세요.“

“커피 드시고 가세요”

준하가 나가려고 하자 유린이 방긋 웃으며 말합니다.

준하에게 커피를 권하는 윤정. ⓒ최선영

“어머 제정신 좀... 커피라도 한 잔 드시고 가세요”

“말씀은 감사한데 제가 가봐야 해서...

유린이라고 했지? 미안해 아저씨가 약속이 있어서 이만 가볼게.“

“죄송합니다 저 때문에... 약속도 늦으셨나 보군요. 어서 가보세요.”

준하는 환한 미소를 남기고 그들 곁을 떠납니다.

“엄마, 정말 좋은 아저씨인 거 같아”

“그래 세상은 아직 따뜻하다는 걸 또 한번 느꼈네^^”

준하가 남긴 따뜻한 온기로 유린과 윤정은 포근한 하루를 보냈습니다.

“엄마 집에 갈 때는 어떻게 가지?”

“택시 불러서 가자”

“퇴근 안 하세요?”

문을 열고 들어오며 준하가 말했습니다.

놀란 윤정을 보며 준하는 마침 지나는 길이라 집까지 태워주겠다고 말합니다.

준하 덕분에 윤정과 유린은 편안하게 집까지 왔습니다.

“시간 되실 때 꼭 가게에 한 번 들려주세요”

윤정은 유린과 단둘이 사는 집에 준하를 들어오라고 할 수 없어서

다음을 기약하고 감사의 인사만 전합니다.

유린은 유치원을 다닙니다.

토요일이면 혼자 집에 있어야 해서 토요일은 늘 엄마와 가게에 함께 나옵니다.

유린이가 세 살 때 가족여행을 다녀오다 교통사고가 났습니다.

그 사고로 유린 아빠는 의식을 잃은 체 병원에 누워지내고 유린은 오른쪽 다리가 불편해졌습니다.

“내가 그날 조금만 조심했더라면...”

피곤하다는 유린 아빠를 대신해 운전대를 잡은 윤정은 모든 것이 자신의 잘못인 것처럼 늘 그 기억에서 힘들어합니다.

그날 이후 윤정은 운전을 하지 않습니다. 아니 못하게 되었습니다.

일주일이 지나고 쌓여있던 눈도 햇살을 받아 녹아내립니다.

그늘진 곳에는 아직 하얗게 얼어붙은 눈들이 그 흔적을 남기고 있지만

다니는데 불편함은 없습니다.

“혹시 얼음 있는지 잘 보고 걸어”

“응 엄마”

유린이는 오른쪽 다리가 불편하지만 씩씩하게 엄마를 앞질러 걸어갑니다.

가게에 도착한 엄마는 주문 들어온 부케를 서둘러 만듭니다.

“엄마 이 추운 겨울에도 결혼하는 사람들이 있어?”

“그럼~겨울에 하는 결혼... 낭만적이잖아. 그런데 너 왜 자꾸 엄마한테 반말이야, 요 몇 주 계속 그러네“

“호호. 엄마랑 이렇게 말하면 친구 같아서 더 가깝게 느껴지고 좋은데...”

“엄마랑 넌 친구처럼 가깝게 지낼 수 있지만, 엄마는 엄마고 넌 딸이잖아, 그 범위 안에서 친구처럼 지내야지. 존댓말 쓰자.“

“알았어... 요”

‘땡 그러러’

손님이 들어오는 소리.

“어... 안녕하세요?”

유린이 반갑게 인사를 합니다.

준하가 왔습니다. 준하는 장미꽃 다발을 주문하고 윤정이 내린 커피를 마십니다.

“아저씨, 여자친구 만나러 가시는 거예요?”

“하하 유린이 예리한데. 어떻게 알았어?”

“보통 꽃을 사가는 남자들은 다 여자친구 주려는 거라고 엄마가 말했거든요.”

준하는 유린의 말에 다시 미소를 보입니다.

“지난번 감사한 마음이에요. 선물이니 여자친구분과 좋은 시간 보내세요.”

윤정은 꽃다발을 건넵니다.

그리고 토요일.

비가 내립니다. 늦은 시간 준하가 가게를 들어섭니다.

“어, 유린이는요?”

“유린이 어제저녁에 할머니 댁에 갔어요. 오늘은 제가 낮에 약속이 있었거든요.”

“아... 전 비가 와서 유린이 집에 데려다주려고 지나는 길에 들른 건데...”

차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준하와 윤정. ⓒ최선영

윤정은 준하의 차를 타고 집으로 향합니다.

“유린이 때문에라도 차가 필요할 것 같은데...”

준하의 물음에 윤정은 저 깊은 곳에 있는 아픈 기억을 꺼내 보입니다.

“그때 이후 운전을 못해요”

“아... 그러시군요...”

준하도 윤정의 말을 듣고 그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준하가 사랑하는 여자.

장미꽃을 들고 찾아갔던 여자 이야기를 합니다.

준하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가다가 사고가 나서 한쪽 다리를 잃게 된 가슴 아픈 이야기.

그녀가 잃어버린 건 한쪽 다리만은 아니었습니다.

자신이 장애인이 되면서 준하를 밀어내는 그녀를 기다리며 2년을 보내고 있다는 말에 윤정은 마음이 아팠습니다.

가족을, 사랑하는 사람을 피해자로 만든 가해자의 심정.

그들이 공통으로 안고 있는 무거운 죄책감.

“전... 마음이 변하지도 않았고 책임감 때문도 아닌데

자꾸만 그렇게 생각하는 게 너무 답답합니다.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는지...“

윤정은 준하의 이야기를 들으며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끝까지 기다려주세요. 누구보다 준하 씨를 원하고 있지만 자신의 달라진 모습 때문에 준하 씨를 붙잡지 못하고 스스로 힘들어하고 있을 거예요. 그리고 죄책감 같은 것도 갖지 마시고요. 사고는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거예요.

준하 씨의 잘못도 그 누구의 탓도 아니에요. 준하 씨 마음 깊은 곳에 어쩌면 자신도 모르게 자리 잡고 있는 그 죄책감이 그분에게도 고스란히 전해질 수 있어요.

죄책감, 책임감 아니고 정말 예전과 같은 마음으로 사랑하시는 거 맞죠?“

준하는 말없이 깊은 생각에 잠기다 말을 시작합니다.

“사실... 죄책감... 있었어요. 책임감은 모르겠지만 저 때문에 혜선이가 그렇게 된 것 같아 볼 때마다 괴롭고 아팠습니다. 그래서 더 잘해주려고 했고... 그런데 사랑하는 마음은 정말 예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없습니다.“

“그럼 됐어요. 더 잘해주려고 하지 마세요. 그냥 예전처럼 그렇게 해주세요.

그게 그분을 편하게 하는 거니까.“

윤정은 그날 밤, 잠을 잊은 체 깊은 생각에 잠깁니다.

생각에 잠긴 윤정 ⓒ최선영

“다른 사람에게는 그렇게 말했는데... 나는... 나는...”

윤정은 무거운 죄책감을 이제 벗어야겠다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너무 미안해서 누워있는 남편 옆에 있는 것이 괴로워서 보고 싶어도, 눈물 나게 그리워도 가지 않았던 병원. 유린이를 볼 때마다 괴로워서 유린이를 재우고 늘 술을 의지해 잠을 청하던 많은 밤.

이제 더 이상 그 무거운 죄책감에 눌려있지 않고 현실과 당당하게 맞서야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유린아 아빠한테 가자”

유린이 그렇게 가고 싶다고 해도 늘 피하려고만 하던 엄마가 아빠를 보러 가자는 말에 유린은 어리둥절해 합니다.

"빨리 일어나요... 그만 자고... 어서 일어나서 괜찮다고 그날 네 잘못이 아니라고 말해줘요. 나... 당신 일어날 때까지 씩씩하게 지낼게. 그리고... 미안해... 이제 자주 올게.“

그리고 윤정은 이제 다시 운전대를 잡습니다.

그날의 기억 때문에 처음에는 손이 떨리고 심장이 심하게 오그라들었지만 이제는 그 모든 기억을 뛰어넘고 싶었습니다.

떨리는 손을 어루만지며 요동하는 심장을 쓰다듬으며 다시 잡은 운전대.

이제 조금은 편해졌습니다.

비 내리는 토요일.

유린은 엄마 차를 타고 가게를 향합니다.

조금 늦게 출근한 탓에 가게 앞에는 먼저 온 준하의 차가 그들을 기다립니다.

“어머, 오늘은 혼자가 아니시네요.”

서둘러 가게 문을 열고 준하를 맞이합니다.

준하는 혜선과 함께 왔습니다.

“언니 정말 예뻐요.”

유린은 혜선을 보며 생글생글 미소를 보냅니다.

“고마워. 나보다 네가 더 예쁜데^^”

혜선도 유린의 손을 잡으며 방긋 웃어 보입니다.

“감사합니다. 덕분에 제가 얼마나 혜선이에게 어색하게 굴었는지... 그것 때문에 혜선이가 제 마음까지도 오해를 했는지 알게 되었어요. 그리고 이렇게 예전처럼 혜선이와 함께 하게 되어서 감사하다는 인사드리러 왔어요.

혜선이도 너무 뵙고 싶다고 해서.“

“아니에요, 제가 오히려 감사해요. 저 역시도 죄책감 때문에 제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잊고 있었던 것 같아요.

우리 잘못이 아니잖아요. 미안한 마음은 남겠지만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일이기에 이제 그 무거운 마음을 저도 털어내고 예전처럼 살아가려고 해요.

덕분에 저도 제 자신을 보게 되었어요. 저도 감사해요.“

“사고가 나고 장애인이 되고 보니 세상이 달라 보이더라고요.

예전에는 관심도 없었고 장애는 나와는 아무 상관도 없다고 행각했는데... 처음에는 죽고 싶었지만 이렇게 살아가게 되네요.“

혜선이 장애에 대해 이제는 익숙해졌다고 말합니다.

웃으며 이야기 하는 혜선과 유린. ⓒ최선영

“저도 그래요. 처음에는 무섭고 한쪽 다리가 불편해서 많이 힘들었는데

이젠 괜찮아요. 전 장애인을 위해서 일하는 사람이 될 거예요.“

어린 유린의 어른스러운 말에 모두 미소를 주고받습니다.

아직 유린 아빠는 깊은 잠에서 깨어나지 못했지만 윤정은 오늘 저녁 아니면 내일이라도 어쩌면 조금 더 시간이 걸릴지는 모르지만 그 희망을 놓지 않고 있습니다.

힘든 시간을 보낸 사람은 그 고통의 깊이가 얼마인지를 알기에 다른 사람의 아픔도 함께 나눌 수 있습니다.

서로 그 아픔을 나누다 보면 위로가 됩니다.

예비 장애인이라는 생각으로 편견 없이 바라보고 이해와 관심을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누구에게나 사고는 일어날 수 있고 누구나 장애인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 현실을 만났을 때 어떻게 살아내느냐가 중요한 것 같습니다.

편견 없는 따뜻한 시선은 살아가는데 또 하나의 힘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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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선영 칼럼리스트 대학에서 미술을 전공하고 졸업 후 디자인회사에서 근무하다 미술학원을 운영하였다. 현재는 네이버 블로그와 카페를 운영하며 핸드메이드 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장애를 안고 살아가는 평범하지만 결코 평범할 수 없는 우리들의 이야기를 동화형식으로 재구성하여 누구나 쉽게 공감할 수 있는 따뜻한 언어로 담아 내려고한다. 동화를 통해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서로를 이해하는 시선의 폭이 넓어져 보이지 않는 편견의 문턱이 낮아지고 서로 배려하고 이해하는 어우러짐의 작은 역할이 될 수 있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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