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가를 걷고 있는 시현 ⓒ최선영

잿빛 하늘이 머금고 있는 눅눅함이 바다의 푸른 내음을 더 짙게 하는 흐린 날의 오후.

“오늘도 그림은 틀렸군”

시현의 볼멘소리가 일렁이는 파도소리에 묻혀 습기 찬 바닥에 가라앉아버립니다. 비와 먹구름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는 날씨 탓에 그림을 그리지 못하는 시현은 인적 없는 바닷가를 홀로 거닐며 모래밭에 발 도장을 남깁니다.

먹구름과 만나는 파도의 수줍은 몸짓을 바라보다 다시 걸음을 옮기던 시현은,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지 모를 다른 발 도장이 시현의 걸음보다 앞서가고 있는 것이 보입니다.

운동화를 벗어 손에 들고 맨발로 젖은 모래의 촉촉함을 느끼고 있는 그녀의 뒤 모습이 시현의 눈에 들어옵니다. 조금 빠른 걸음으로 그녀와의 거리를 좁혀갑니다.

손을 뻗으면 닿을 듯 그녀와 가까워지자 시현은 혹시라도 낯선 인기척에 놀라기라도 할까 봐 멀리서부터 그녀의 시선을 끌려고 몇 번을 헛기침을 해보지만 그녀는 고개를 살짝 떨군 채로 눈길 한번 돌리지 않습니다.

저 멀리서 꼬마 아이가 달려오며 고모라고 그녀를 부릅니다. 꼬마 아이가 가까이 오자 그녀도 손을 흔들고는 달려가 버립니다. 텅 빈 바닷가에 다시 시현만 덩그러니 남았습니다.

카메라 셔터를 누르며 파도의 몸짓을 담고 파도의 거친 언어에 귀 기울이던 시현이 펜션을 향해 발길을 돌립니다.

시현이 한 달 전부터 지내고 있는...

펜션은 바다가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언덕길 젤 위쪽에 있습니다. 시현은 가을 전시회 마지막 작품을 담아 가기 위해 서울에서 이곳 거제도로 내려왔습니다.

날씨가 좋지 않아 3일째 그림을 그리지 못하고 있는 시현의 눈에 바다를 배경으로 주인공이 되어 그의 눈에 들어온 그녀의 뒷모습... 시현이 머물고 있는 펜션에서 그녀를 다시 만났습니다.

이번에는 뒷모습이 아닌 그녀의 눈과 코와 입을 그의 마음에 담았습니다.

커피를 마시며 웃고 있는 현수 ⓒ최선영

테라스에서 커피를 마시는 그녀의 미소에 시선을 고정시키고 한참을 바라보았습니다. 가족여행을 온 듯 보이는 그녀의 일행은 부모님으로 보이는 60대 부부와 좀 전에 본 꼬마가 아빠, 엄마라 부르는 부부 그리고 젊은 부부였습니다.

“온 가족이 함께 여행도 하고...”

사업으로 늘 바쁜 부모님의 손길을 그리워하며 자란 시현은 그녀의 가족을 보며 부러운 듯 혼잣말을 합니다.

​그는 다음 날 아침 펜션 앞마당을 산책하다 그녀의 가족들과 마주합니다. 꼬마가 아빠, 엄마라 부르는 부부는 그녀의 큰 오빠 부부였고 다른 젊은 부부는 작은 오빠였습니다.

카메라와 스케치 도구를 들고나가는 그를 그녀가 잠시 바라보다 시선을 돌립니다. 그녀의 가족과 몇 번 얼굴을 마주치다 보니 시현은 자연스럽게 인사를 건넵니다.

“가족 여행 오셨나 보네요”

“아.. 네 저희 부부가 다음 달 유학을 가게 돼서 다 같이 여행 오게 되었어요.”

그녀의 작은 오빠 인수가 인사를 하며 대답합니다.

“혼자 오셨나 봐요?”

큰오빠 진수가 시현에게 말합니다.

“네... 저는 혼자입니다”

“그림 그리시나 봐요”

인수가 시현의 손에 들린 스케치 도구를 보며 웃습니다. 인수는 막내인 그녀도 한국화를 전공했다는 말을 전합니다. 그녀의 이름은 이현수입니다. 스치며 나누는 인사치고는 꽤 많은 정보를 주고받았습니다.

“이 현수... 현수...”

그는 현수의 이름을 혼잣말로 불러보며 중성적인 매력이 느껴지는 이름이라 생각합니다. 여전히 잿빛으로 뒤덮인 하늘은 어제 보다 더 짙은 색을 띠고 있습니다. 그는 능숙한 솜씨로 하늘과 맞닿은 파도의 움직임을 담아냅니다.

혼자 이것저것 떠오르는 생각들을 바다와 함께 담기를 여러 장.. 문득 옆을 돌아보니 저만치 떨어진 곳에서 그녀도 무언가를 쓱쓱 그리고 있습니다. 가을바람이 현수의 긴 머리를 찰랑거리며 건드리는 모습을 시현은 자신도 모르게 카메라 셔터를 누릅니다.

바다가에 있는 현수 ⓒ최선영

30분.. 1시간..

현수는 그림을 그리고 시를 긁적입니다. 시현은 현수의 움직임 하나하나를 그립니다. 둘은 말없이 그렇게 서로 다른 것을 담고 있습니다.

고모를 부르며 달려오는 꼬마의 요란한 소리에도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고 먼 바다와 눈을 마주하고 있습니다.

꼬마가 현수의 등을 톡톡 건드리자 활짝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납니다. 모래 묻은 엉덩이를 가볍게 털어내고는 꼬마와 함께 또 시현에게서 멀어집니다.

시현도 벌떡 일어나 현수의 뒤를 따라갑니다. 현수네 가족이 준비한 맛있는 냄새는 잔디 위에 가득 퍼집니다.

먼 발치에 서 있던 시현을 보자 인수가 같이 식사하자며 손짓을 합니다. 시현은 망설임 없이 현수의 가족과 함께 식사를 합니다.

늘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사람처럼 불러도 대꾸 없이 바다만 바라보고 말을 해도 웃기만 하는 현수가 청각장애인이라는 것을 그때 알았습니다.

그저 말수가 적은 거라고 생각했던 시현... 현수의 목소리가 몹시 듣고 싶었던 시현은 마음 한편이 짠... 해집니다.

다음날 이른 아침 시현이 바다를 보러 나갔을 때 현수가 한 발 앞서 그곳에 와있었습니다.

현수를 바라보는 시현 ⓒ최선영

“잘 잤어요?”

진수에게서 현수가 입모양을 보고 무슨 말인지 알아듣는다는 말을 듣고 천천히 아침 인사를 건넸습니다.

현수는 옅은 미소를 보내며 고개를 끄덕입니다. 화장기 하나 없는 새하얀 현수의 얼굴이 막 떠오른 햇살보다 더 눈이 부시게 예뻐 보였습니다.

“오늘은 햇살이 인사하네요”

시현의 말에 현수도 오랜만에 보는 햇살이 좋은지 지금까지 본 미소 중에 가장 환한 미소를 보입니다.

현수네 가족은 바람의 언덕을 간다며 펜션을 나섭니다. 시현도 현수네 가족을 따라 바람의 언덕을 향합니다.

이곳에 와서 제일 먼저 찾았던 곳인데... 현수와 함께 하는 이곳은 또 다른 느낌으로 다가왔습니다.

마치 한 가족이 된 것처럼 시현은 현수네 가족과 함께 합니다.

늦은 밤... 덩그러니 놓여있는 그네에 앉아 커피를 마시는 시현을 보고 진수가 커피를 들고 나오다 반가운 얼굴을 하고 옆에 와서 앉습니다.

“전시 준비하려고 여기 있는데 우리 때문에 방해되는 건 아닌지..”

“별말씀을요 외롭기도 하고... 그림도 잘 안되고 해서 조금 답답했는데... 이렇게 좋은 분들과 함께 해서 정말 감사한걸요”

시현이 활짝 웃으며 말합니다.

“저.. 현수 씨... 쓸쓸하고 외로워 보이던데... 장애 때문은 아닌 것 같고 해서 여쭤봅니다”

시현의 말에 진수가 놀란 표정으로 바라봅니다. 늘 웃고 있는 현수였는데... 시현의 눈에 현수의 마음이 보였다는 것이 진수는 놀라웠습니다.

현수가 졸업작품을 준비하던 4학년 여름...

1년 전부터 현수 옆에서 현수를 사랑해주던 복학생 선배가 이곳에 와서 전시회 준비를 하다 더위를 식히고 오겠다며 바다로 나갔다가 돌아오지 못했다는 말을 합니다.

가을 졸업작품 전시회에 그의 미완성의 작품이 국화꽃과 함께 놓여있었고, 현수도 미완성의 작품을 걸었습니다.

충격으로 그때 이후 현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고 바다는 물론이고 작은 강물조차도 보지 못했습니다.

“충격이 컸겠네요...”

시현은 굳어진 표정으로 진수의 말을 받습니다. 그렇게 2년을 현수는 자기 방에서 나오지 못하다 그 선배가 남긴 작품 뒤에 아주 작은 글씨로 쓰여있던 편지를 보고 세상으로 다시 나왔습니다.

“어떤 내용...”

“편지라기보다는 작은 낙서 같은 거였어요”

시현의 질문이 끝나기도 전에 진수가 쓴웃음을 흘리며 말합니다.

“현수야 너와 나는 죽음이 갈라놓기 전까지는 함께 하는 거다! 만약 죽음이 갈라놓는다면 남은 사람이 두 배로 행복하게 살아주는거고~라고 쓰여있었어요.

아마 둘이 그림을 그리다 현수에게 한 말인 거 같은데... 현수가 그걸 다시 보게 된 거고요. 하룻밤을 그 글귀를 보며 울고 또 울더니 이곳으로 여행을 오고 싶다고 해서...마침 둘째도 유학 준비 중이라 다 같이 오게 된 거예요”

진수는 긴 한숨을 내쉬며 말을 끝냅니다.

현수네 가족은 3박 4일을 그곳에 시현과 함께 하다 서울로 돌아갑니다. 시현은 그곳에서 3주를 더 머물다 예정보다 조금 일찍 서울을 향해 달립니다.

긴 여름이 끝나고 가을이 깊어지는 10월...그의 전시회에 현수와 가족들을 초대합니다.

전시회 그림을 보고 있는 현수 ⓒ최선영

작품을 둘러보던 현수와 현수 가족은 현수의 모습이 그려진 그림을 보고 깜짝 놀랍니다.

“미안해요 허락도 없이 이렇게...”

시현은 현수를 보며 미안하다는 말을 전합니다. 현수의 눈동자가 흔들리고 가족들은 현수의 눈치를 봅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전 그날 현수 씨가 너무 아름다워서 꼭 제 작품으로 남기고 싶었습니다. 이렇게 불쾌해 하실 줄은 몰랐어요”

시현은 현수와 가족들의 반응에 당황해하며 어쩔 줄 몰라 합니다.

“현수 선배의 미완성작이 바로 바닷가에서 서있던 현수의 모습이었어요. 지금 이 그림과 거의 똑같은...”

진수의 말에 시현도 놀랍니다. 시현은 현수 앞에 다가가 미안하다는 말을 합니다. 눈물이 가득 고인 현수의 눈에 어른거리는 시현은 마치 2년 전 바다로 가버린 그 사람처럼 껴졌습니다.

흐르는 현수의 눈물을 시현이 살며시 닦아줍니다.

현수의 눈물을 닦아주는 서현 ⓒ최선영

“행복하게 해주고 싶어요”

시현의 입술에 담긴 진심을 현수가 알아주기를 바라며 천천히 마음을 전합니다.

전시회 마지막 날...

시현의 마음을 바라만 보다 사라진 현수가 시현 앞에 나타났습니다. 작은 선물상자와 편지 한 통을 남기고 현수는 다시 시현 앞에서 사라집니다.

“고마워요 시현 씨를 통해 선배의 작품이 완성된 것 같았어요

그 바다에서 우린 결혼을 약속했었고 졸업하면 함께 유학 가려고 했어요

저의 장애를 안아준 선배의 사랑... 내 귀가 되어주었고 내 입이 되어 준 그 사람을

잊을 수도 잊히지도 않아서... 제 마음에 다른 사람을 담는다는 건 불가능인 것 같아요 아직은...

친절 감사드려요

좋은 그림 많이 그리시고 행복하시길 바랄게요

현수 드림”

시현의 마음을 정중히 거절하는 현수의 짧은 편지

그리고 엽서들... 현수가 바다에서 그리고 적은 시로 만들어진 엽서가 선물상자 안에 들어있었습니다.

시현은 현수에게 카톡을 보냅니다.

“한 달 일 년 십 년... 기다릴 겁니다

당신 마음에 있는 그 사랑을 지우라는 거 아닙니다

잊으라는 것도 아닙니다

당신의 그 아픈 사랑까지 내가 안아주겠다는 겁니다

행복하라고 했다면서요 남은 사람은 두 배로 먼저 간 사람 몫까지 행복하겠다고...

그 행복... 저와 함께 만들었으면 좋겠습니다

기다리겠습니다

시현 드림”

1년 후

시현과 현수가 만난 그 계절이 다시 돌아왔습니다. 그들이 만난 그 바닷가에서 그들은 다시 만났습니다.

바다를 나란히 걷고 있는 시현과 현수 ⓒ최선영

현수의 귀가 되어주고 입이 되어주고 싶은 시현의 손을 잡고 현수는 이제 선배와 했던 그 약속을 지키려 합니다.

두 배로 행복하게 살아가기 위해 현수는 시현의 사랑으로 들어왔습니다.

서로 다른 발 도장을 찍으며 걷던 그 길을 이제 둘이 함께 걸으며 행복을 만들어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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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선영 칼럼리스트 대학에서 미술을 전공하고 졸업 후 디자인회사에서 근무하다 미술학원을 운영하였다. 현재는 네이버 블로그와 카페를 운영하며 핸드메이드 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장애를 안고 살아가는 평범하지만 결코 평범할 수 없는 우리들의 이야기를 동화형식으로 재구성하여 누구나 쉽게 공감할 수 있는 따뜻한 언어로 담아 내려고한다. 동화를 통해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서로를 이해하는 시선의 폭이 넓어져 보이지 않는 편견의 문턱이 낮아지고 서로 배려하고 이해하는 어우러짐의 작은 역할이 될 수 있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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