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10여일 정도만 지나면 대망의 한가위이다. 올해 연휴는 내가 살아온 세월동안 겪어보지 않은 유례없이 긴 연휴인 것 같다. 장장 열흘이라는 긴 연휴로 직장인들도, 아이들도 얼씨구나 기쁨의 비명을 지르지만 주부들은 정말 생각만 해도 숨이 막히고 온 몸의 기운이 빠져나가는 듯하다.

선택의 여지만 있다면 워킹맘들은 차라리 돈벌러 직장 나가는 것을 선택하지 않을까 싶다. 특히 시댁이 큰집이라 차례를 모셔야 한다면 며느리 입장에서는 더 불편하고 난감하다. 딱히 고부갈등이 있어서 라기 보다는 며느리 입장에서는 ‘시’자가 들어가면 그냥 심리적으로 불편해진다.

특히 올해처럼 연휴가 길어지게 되면 딱히 핑계거리도 없어서 한가위 전부터 차례 음식 장보는 것도 따라다녀야 하고 음식 장만에 친지들 대접하랴 세끼 밥상 차리는 것도 버거운데 차례상에 술상에 하루 종일 차리고, 씻고, 쓸고 하느라 엉덩이 붙일 새가 없다. 게다가 시부모님을 비롯한 시댁 식구들이 모인 자리인 만큼 표정 관리를 위해 얼굴에는 경련이 생길지도 모른다. 어떻게 그렇게 잘 아느냐고 물으신다면 필자가 직접 경험했기 때문이다.

결혼 당시 시댁이 큰집이라 차례나 제사에 대한 부담감이 없지는 않았지만 남편이 그나마 차남이라는 점에서 큰며느리 노릇은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에 안도했었다. 그러나 아주버님이 결혼 전이셨고 결혼 후에도 외국에 나가 사셨기 때문에 본의 아니게 큰며느리 노릇을 수년간 해야 했다.

출산 전까지 직장을 다녔기 때문에 평일에 제사가 있는 날이면 집에서 제사음식을 만들어 가져갔었다. 내가 맡은 음식은 튀김과 전 종류였다. 새우튀김과 동그랑땡 그리고 고구마튀김은 기본이고 때에 따라 육전이나 떡갈비, 표고전, 배추전은 옵션이었다.

힘들었지만 조상에 올리는 음식인 만큼 나름 정성스레 준비했고 맛있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으시는 시댁 식구들의 칭찬에 으쓱해져 매년 차례나 제사때 마다 음식을 준비했고 그것이 당연시 되었다.

그런데 내가 하루아침에 빛조차 느끼지 못하는 시각장애인이 되었을 때 이제 앞으로 요리 같은 것은 할 수 없을 거라 여겼다. 그러나 나는 나 스스로도 놀랄 만큼 눈이 아닌 감각으로 음식을 다시 할 수 있었고 다시 시댁에 제사음식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결국 병원생활을 한 6개월 그리고 갑작스런 장애로 공황상태로 지낸 6개월 이렇게 1년 동안 음식을 하지 못했을 뿐 결혼 후 장애유무와는 관계없이 제사음식을 해온 것이다. 차례음식을 해본 사람이라면 다 알겠지만 차례 음식은 일반 음식보다 몇 갑절의 시간과 정성이 필요하다. 하물며 전혀 앞을 보지 못하는 나는 또 그 몇 갑절의 시간과 정성을 기울여야 한다.

새벽같이 일어나 주방에 식자재를 펼쳐놓고 고군분투하는 나를 보며 남편은 아무도 시키지 않는데 왜 사서 고생하냐는 말로 심기만 더 불편하게 만든다. 사실 남편의 말에도 일리는 있었다.

어머님이 시킨 것도 아니고 내 상황을 잘 아시는 친지들도 내가 음식을 하지 않는다고 뭐라 하실 분은 없었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편의 말처럼 사서 고생하는 것은 나만의 만족감 때문이었던 것 같다.

비록 장애가 있지만 며느리로서 도리를 다한다는 만족감, 정안인들의 멀쩡한 며느리들도 버거워하는 일을 한다는 만족감, 정안인 못지않게 음식을 맛있게 잘한다는 친지들의 반응에 대한 만족감. 어쩌면 내 장애에 대한 자격지심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도리를 다한다는 마음에 고단함보다 뿌듯함이 더 컸었다.

그런데 어느 토요일 오후 시어머니가 전화를 하셨다.

“둘째야, 월요일이 할머니 기일인데 친지들이 네가 한 새우튀김과 동그랑땡 맛있다고 그러시는데 해올 수 있겠니?”

‘아차’ 싶었다. 학과 시험과 과제물로 정신없이 보내다 보니 제삿날을 깜박했던 것이다. 음식재료도 준비해놓지 않았고 활동바우처 선생님의 스케줄은 어찌 되는지… 집에 가족끼리 먹는 음식은 조금 타거나 찌그러져도 별 상관없지만 제사 음식은 그럴 수 없으니 음식을 튀기거나 부치는 것은 활동바우처 선생님의 도움을 받아야했기 때문에 선생님과도 통화해야 했다.

부랴부랴 장을 보고 바우처 선생님과 통화해서 제사 음식은 무사히 시간 맞춰 제사상에 올릴 수 있었다. 그런데 어머니의 전화를 받고 제사 음식을 준비하는 2-3일 동안 스멀스멀 내 마음을 치고 올라오는 것이 있었다.

제삿날이나 차례를 지내야 하는 명절이 다가오면 나는 항상 2-3일전에 어머니께 내가 준비해갈 음식을 미리 알려 드렸었다. 그럴 때마다 “아이고, 안 해도 된다.”고 하셨는데 이번에는 제삿날을 깜박하고 이러다할 말이 없으니 어머님이 전화를 하신 것이다.

안 해도 된다는 말씀은 빈말이셨던 걸까? 어떻게 멀쩡하지도 않은 며느리에게 제사 음식을 해오라고 하실까? 활동바우처 선생님이 제사음식을 다한다고 생각하시고 남 부리듯 편하게 생각하신 걸까? 이런저런 생각에 마음이 좋지 않았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어머님이 잘못된 게 아니라 내가 모순적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장애가 있지만 비장애인 못지않게 할 수 있다며 차별하거나 무시하지 않고 동등하게 대해주기를 바래왔으면서 막상 어머님의 음식을 해오라는 말에 장애인이라는 이유로 특별하게 대해주시기를 바라는 내 마음이 너무 모순적이었던 것이다.

내가 하면 사랑이고 남이 하면 불륜이라는 말처럼 나 역시 내 장애를 주관적이고 편리한대로 상황에 따라 합리화시키고 정당화시키는 수단으로 이용한 것은 아닐까?

비장애인의 말과 행동에 편견과 선입견이라고 말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장애에 대한 배려심이 없다며 상대를 비난한다. 나 스스로 내 장애에 대해 우스갯소리를 하면 이건 블랙유머이지만 상대가 내 장애로 우스갯소리를 하면 “어떻게 그런 말을 하나?”하고 상대를 재단한다.

지난달 계단에서 굴렀을 때 지나가던 어떤 이도 우리를 도와주지 않았었다. 내 신발이 모두 날아가고 핸드백 안의 물건들이 바닥 여기저기에 떨어져 있었고 딸아이는 놀란 나머지 바닥에 주저 않아 있는 나에게 매달려 엉엉 울고 있었지만 어느 누구도 다가와 도와주거나 괜찮냐며 물어봐주지 않았다.

‘세상이 참 삭막해졌구나.’ 생각하면서도 그래도 장애인인데 도와주지 않는 사람들을 원망했었다. 그런데 세상인심이 팍팍해지고 삭막해진 것에 대해서 장애인에게만 예외일리 없을 텐데 내 마음은 그걸 바라고 있었다.

내가 정안이었다면 사람들의 행동에 그러려니 했을지도 모른다. 심하게 다쳐서 피가 나거나 의식을 잃은 것도 아니었고 외관상으로는 시각장애가 있는지 분간할 수 없을 테니 그들의 입장에서는 ‘아이고, 넘어졌나 보구나.’ 생각했을지도....

내가 정안인 이었다면 어쩌면 낯선 이의 도움이나 손길에 거부감을 느끼며 괜찮다고 오히려 거절했을지도 모른다. 장애로 차별이나 무시당하지 않으려는 마음과 장애인이라는 이유로 특별한 대우를 받고자하는 내 잠재의식 사이에서 나 스스로도 혼란스럽고 당혹스럽다.

대학에 진학했을 때 장애가 내 평가에 영향을 미치는 게 싫었다. 장애가 있으니까 하고 후하게 평가 받는 것도 싫었고 장애가 있는데 불합리한 조건에서 평가받는 것도 싫었다. 최대한 형평성에 맞게 비장애 학생들과 대등하게 평가받고 인정받고 싶었다.

나의 평가에 대해서 장애가 있으니까 교수님이 학점을 잘 주셨다는 식의 말도 듣기 실었다. 그런 마음으로 정말 열심히 공부했고 성적장학금을 받는 나의 실력을 동기들도 순순히 인정해 주었다.

그런데 정말 열심히 준비하고 프레젠테이션 한 과목의 성적을 받고 나는 당황스러웠다. 설문지를 만들고 조사해서 통계자료를 내고 문제해결을 위한 대안책을 내는 과제였는데 정말 열심히 준비했고 통계 수치를 모두 외워가며 장장 2시간에 걸쳐 발표를 했었다. 그런데 내 성적은 기대 이하였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이런 생각이 들었다.

“눈도 안 보이는데 통계 수치와 모든 그래프를 외워서 발표하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데 이렇게 짜게 주시다니....”

장애로 불가능한 것에 대해 평가할 수는 없다. 만약 내가 할 수 없는 과제였다면 나는 분면 교수님께 대체할 수 있는 다른 과제를 달라고 말했을 것이고 교수님도 수긍하고 다른 방법을 제안하셨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의 없이 과제를 수행하였고 교수님은 나의 장애와는 관계없이 과제 수행이나 프레젠테이션에 대해 평가하신 것이다.

장애로 힘들었을 거라는 사실이 평가에 반영된다면 평가는 과제 수행 정도가 아닌 노력 정도에 따라 결정될 것이며 이는 주관적이고 편파적일 수밖에 없다. 나의 이런 이중적 심리를 경험할 때면 장애인을 대하는 비장애인들이 곤혹스럽겠다는 생각도 든다.

자신의 말과 행동이 실례가 되지 않을까 조심스러워하며 장애라는 부분에서 어디까지가 차별이고 어디까지가 배려인지 또한 어디까지가 동등한 조건인지 장애인 당사자인 나조차 헛갈리고 일관성 없이 행동하는데 비장애인들은 오죽할까?

내일은 어머님께 준비할 차례 음식에 대해 전화 드려야겠다. 어김없이 ‘안 해도 된다.’며 말씀하시겠지만 그건 음식 준비하며 고생하는 며느리의 입장을 이해하신다는 정도로만 새겨들을까 한다. 올해는 긴 연휴만큼 풍성하고 맛있는 명절 음식을 준비해서 친지들과 나눠 먹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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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미 칼럼니스트 9년 전 첫아이가 3개월이 되었을 무렵 질병으로 하루아침에 빛도 느끼지 못하는 시각장애인이 되었다. 상자 속에 갇힌 듯한 공포와 두려움 속에서 나를 바라볼 딸아이의 모습을 떠올리며 삐에로 엄마가 되었다. 그러나 언제까지나 삐에로 엄마로 살 수는 없었다. 그것이 지워지는 가짜라는 걸 딸아이가 알게 될테니 말이다. 더디고 힘들었지만 삐에로 분장을 지우고 밝고 당당한 엄마로 아이와 함께 세상 밖으로 나왔다. 다시 대학에 들어가 공부를 하고 초중고교의 장애공감교육 강사로 활동하기 시작했고 2019년 직장내장애인식개선 강사로 공공 및 민간 기업의 의뢰를 받아 교육강사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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