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8월은 올해 초등학교에 입학한 딸아이의 첫 여름방학을 위해 수영장이나 체험장을 찾아 다니느라 정신이 없었다. 늙어가는 우리는 체력의 한계를 느끼는데 딸아이는 지치지도 않는지 곧잘 자던 낮잠은커녕 밤늦도록 말똥말똥 잘만 논다.

그런 딸아이를 보며 속으로 '네가 좀 자야 엄마도 한숨 돌릴 텐데....' 생각하지만 입과 몸은 아이의 장단을 맞추느라 나 역시 분주했다. 여자아이라서 그런지 말주변이 예사롭지 않았었는데 요즘은 그 역량이 일취월장하여 말문이 막힐 정도이다. 나의 닉네임이었던 잔소리 대마왕은 어느새 딸아이의 닉네임이 되었다.

그날도 우리 가족은 어김없이 어딘가로 가고 있었다. 아빠는 운전석에, 딸아이와 나는 뒷좌석에 앉아 말장난을 하며 한참을 낄낄거리며 웃었다. 그때 아이아빠가 목소리에 흐뭇함을 가득 담아 딸아이를 향해 말했다.

"아빠는 이렇게 네가 건강하게 밝게 웃으면 기분이 좋단다. 이제 엄마 병만 나으면 아빠는 더 이상 바랄게 없어"

순간 내 머리와 마음은 멍해졌다. 내가 장애인이라는 사실을 딸아이도 남편도 알고 있다. 장애라는 것이 치료되거나 회복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남편이 모를리 없었다. 그러나 나는 남편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장애가 뭔지 모르냐고 왜 있는 그대로 현실을 받아들이지 않느냐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떤 이미지도 심지어 한줄기 빛조차 느끼지 못하고 어둠속에 살아온지 벌써 6년이 되어간다. 뭐라 불리든 어렴풋한 윤곽이라도 그것이 안된다면 빛이라도 느끼며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랐었다.

병원에서 더 이상 현대의학으로는 방법이 없다고 했을 때조차 나는 세상을 다시 볼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세상을 다시 보기 위해서 나에게 부여된 모든 시간과 정신과 노력을 쏟았다. 자고 일어나면 보일 거라 생각하며 잠이 들었고 깰 때마다 비명을 질렀다.

그리고 내 바람이 이루어지지 않았음에 좌절했었다. 세상을 다시 볼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은 나를 살아갈 수 없게 하였다. 엄밀히 말한다면 하루하루, 한달 두달이 되어도 변함없는 어둠에 희망이 사라지면서 미래도 꿈도 모두 의미 없어 보였고 그런 삶을 살아갈 의지 역시 사라져갔다.

아이러니컬하게도 내가 다시 살아야겠다고 변화하기 시작한 것은 세상을 보겠다는 희망을 버린 후부터였다. 내가 실명 후 시댁부모님들과 친정부모님들은 각자의 믿음을 가지고 내가 세상을 다시 볼 수 있게 해달라며 기도하셨다.

그리고 어디서 어떻게 알게 되셨는지 눈에 좋다는 음식이며 대체요법이며 운동법 등을 가르쳐주며 세월을 보내고 계셨다. 세상을 보지 못하게 된 것은 나였지만 모든 가족들이 나와 함께 어둠에 잠식되어 가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부모님께 말했다.

"이제 우리 그만해요. 내가 이렇게 된 것이 운명인 것처럼 내가 다시 세상을 볼 수 있을 운명이라면 그때는 또 세상을 볼 수 있겠지요. 어찌될지도 모르는 그때를 기다리며 아무 의미 없이 마냥 살아갈 수는 없잖아요."

희망이라는 단어가 주는 기대감과 설렘이 항상 모든 이에게 긍정적이지는 않는 것 같다. '꿈은 이루어진다.' 라고 단언한 것은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한다면 이라는 전제가 따른다. 아무런 노력도 댓가도 없이 꿈만 꾼다고 이루어지는 미래는 없다.

그러나 아무리 노력하고 매달리고 애써도 안되는 것이 있다. 장애가 그렇다. 현대의학도 포기한 것이 장애이고 아무리 노력하고 애쓴다고 잘려진 팔다리가 다시 자라거나 죽은 시신경이 살아날리 없다.

내가 살아가기 위해 선택한 것은 불가능한 희망을 포기하고 가능한 희망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필자의 말이 너무 비관적이고 부정적이라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사실 정답은 없다.

필자가 살아가기 위해 세상을 다시 보겠다는 희망을 버리고 어둠 속에서 살아갈 방법을 찾으려 했다면 남편은 이 상황을 견디고 살아가기 위해 아내가 언젠가는 세상을 다시 볼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이 필요했던 것이다.

나 역시 세상을 다시 보겠다는 희망은 버렸지만 새로운 미래와 삶에 대해 또 다른 희망을 품고 살고 있다. 불가능한 것이라도 어떤 희망이 자신의 삶을 지탱해주는 원동력이 된다면 그것은 말 그대로 희망이 된다.

그러나 희망이 자신이나 자신의 삶을 부정적으로 치닫게 한다면 그것은 집착이며 버려야하는 희망이다. 그것은 본인만이 알 수 있으며 선택은 오로지 자신만이 할 수 있다.

남편은 4차 산업혁명의 도래로 의학계에도 불가능하다고 여겼던 신기술이 나올 것이며 그 기술로 세상을 다시 볼 수 있게 될 거라고 말한다. 그래, 나 역시 죽기 전에 딸아이의 얼굴을 보고 싶다.

그리고 나 스스로에게 자문해 보았다. 20년 혹은 30년 후 세상을 다시 볼 수 있는 신기술이 나왔다고 가정했을 때 치료의 댓가로 전재산을 포기해야 한다면 나는 과연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사람의 마음이 변화무쌍하여 장담할 수는 없지만 현재 내 마음은 딸아이의 얼굴 보기를 포기할 것 같다. 너무나도 간절히 딸아이를 보고 싶지만 그 꿈을 이루기 위해 치루어야 하는 댓가는 비단 나만의 몫이 아니기에 나는 그냥 어둠 속에 살 것이다. 70살이라는 나이에 나 자신 뿐 아니라 가족들의 꿈과 미래까지 송두리째 담보 잡힐 수는 없다.

남편도 딸아이도 내가 세상을 다시 볼 수 있기를 바라겠지만 그 하나를 위해 포기하고 버려야하는 꿈과 희망이 더 많고 그 꿈과 희망이 내가 세상을 보는 것보다 가치 없다고 함부로 단언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희망은 우리를 살아가게 해준다. 그러나 나는 원대하고 거창한 희망은 품지 않는다. 소극적이고 대담하지 못하다고 하여도 나는 사소하고 작은 것, 현재보다 조금만 더 노력하면 이룰 수 있는 것들을 꿈꾸고 희망한다. 작은 설렘과 기대를 갖고 그 꿈이 이루어졌을 때의 행복감이나 성취감으로 살아가다 보면 내 삶 끝날 때 '이만하면 잘 살았다.'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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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미 칼럼니스트 9년 전 첫아이가 3개월이 되었을 무렵 질병으로 하루아침에 빛도 느끼지 못하는 시각장애인이 되었다. 상자 속에 갇힌 듯한 공포와 두려움 속에서 나를 바라볼 딸아이의 모습을 떠올리며 삐에로 엄마가 되었다. 그러나 언제까지나 삐에로 엄마로 살 수는 없었다. 그것이 지워지는 가짜라는 걸 딸아이가 알게 될테니 말이다. 더디고 힘들었지만 삐에로 분장을 지우고 밝고 당당한 엄마로 아이와 함께 세상 밖으로 나왔다. 다시 대학에 들어가 공부를 하고 초중고교의 장애공감교육 강사로 활동하기 시작했고 2019년 직장내장애인식개선 강사로 공공 및 민간 기업의 의뢰를 받아 교육강사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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