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와 함께 살아가는 내 삶의 시간은, 언제나 삶에 대한 끊임없는 성찰적 태도를 요구한다. 장애는, 언제나 희박한 가능성에 대한 혁신적이며 확장적인 사고를 요구하는 동시에, 한계에 대한 겸허하고 담백한 수용을 요구한다. 이 상충적인 상황은, 늘 장애를 가진 한 인간의 내면을 복잡하고 피로하며 좌충우돌 갈등하게 만든다.

아마도, 내게 아이가 없었다면, 장애로 야기되는 이 복잡한 문제를 어디까지나 한 개인의 깊은 심연에 존재하는, 지극히 내밀하고 개인적인 선택의 문제로 다룰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한 사람의 장애인이 부모가 되어, 일정 기간 타자를 책임지고 가이드하며 케어 해야하는 입장에 놓인다면, 장애를 바라보는 그/그녀의 관점과 태도는 더 이상 그/그녀의 것만이 아니게 된다.

내가 내 장애를 바라보는 관점과 태도는, 스폰지에 잉크가 스며들 듯, 내 아이의 뇌리에 고스란히 아로새겨질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통찰이, 내가 장애엄마가 된 후, 때때로 발가벗겨진 듯 부끄럽고 불편함에도 불구하고, 내 속살을 드러내며 끊임없이 글을 쓰게 하는 이유인지도 모르겠다.

장애엄마인 내가, 비장애인인 당신이, 내 아이의 교사인 당신이, 내 아이의 친구 엄마인 당신이 바라보는 장애는 어떤 빛깔, 어떤 느낌, 어떤 모습인지 문득 궁금해진다.

아래 내용은, 나의 블로그 이웃 중 한 분께서, 비장애 엄마로서 아이들에게 장애를 바라보는 관점에 대해 어떻게 가르쳐 주어야 할지 깊은 성찰과 고민을 담아 물어 오신 질문이다. 질문 자체가 좋아서, 양해를 얻어 원문을 그대로 인용한다.

부모가 어떻게 아이에게 장애인에 대한 편견을 심어주지 않고 키울 것인가 고민하고 있다. ⓒ은진슬

[안녕하세요? 5살 남아와 3살 여아를 키우며 종로구에 살고 있는 38살 엄마입니다. 평소 은진슬님의 블로그를 이웃추가 해놓고 칼럼을 잘 읽어보고 있었습니다. 장애인식개선에 대해 관심이 많았던지라 아이들에게도 어렸을 때부터 자연스럽게 편견을 심어주지 않고 어떻게 키울 것인가 고민이 많습니다. 그런데 정작 되돌아보니 저조차도 장애인에 대한 바른 인식을 하고 있는지 개념이 서질 않습니다.

엊그제는 인터넷에 떠돌아다니는 글을 보게 되었어요.

어떤 아기 엄마가 반찬집에 갔는데, 그 반찬집에 사장님이 한쪽 손이 의수였다고 해요. 그걸 보고 너댓살쯤 된 애가 묻자 엄마 왈

“이분은 음식솜씨가 너무 좋으셔서 하느님이 손을 먼저 빌려가셨대. 그 손은 나중에 하늘나라에 가면 돌려주시고 상도 주실거야…”

대략 이렇게 말씀하셨고, 그 사장님 딸 되시는 분이 아이 엄마의 말씀에 너무 고맙다며 후기를 올린 것이었어요.

나름, 작은 아이들 눈높이에 맞춰 설명한 것 같으면서도, 저는 뭔가 꺼림직한 감정으로 내내 고민이 되었습니다.

과연 장애라는 문제를 저렇게 허무맹랑한 이야기로 동화처럼 꾸며도 되는 것인가? 그런 식의 생각이나 어투가 장애인들에게 오히려 상처가 되진 않을까?

그렇다면, 어린애들이 불쑥 물어왔을 때, 저 같은 엄마들은 대체 어떻게 대답해야 할까? 하는 것들에 대해 말이죠.

여기저기 칼럼을 읽어봐도 대략적인 감은 옵니다만... 아이들을 키울 때 엄마로서 해줄 수 있는 현실적인 교육 방법은 무엇인지, 혹시 그런 것들이 잘 정리된 매뉴얼 같은 것은 없는지 정보를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장애는 장애일 뿐, 신의 귀한 선물도 운명의 잔인한 비극도 아니다. ⓒ은진슬

이번 칼럼은, 이 멋진 질문에 대한 나의 진정성을 담은 답변이다.

물론, 그저 한 사람의 장애엄마인 내가, 이런 질문에 대한 그 어떤 명쾌한 정답이나 해법을 뚝딱 내어 놓을 수는 없다. 왜냐하면, 같은 장애를 가진 사람이라도 장애를 인식하고 수용하고 다루는 방법은 천차만별일 것이며, 무엇이 반드시 옳다고 규정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다만, 지금부터 내가 하는 모든 말들의 최우선 고려사항은 우리의 아이들이 장애/장애인과 함께 어떻게 하면 더불어 조화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을까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음을 알아주길 바란다.

기본적으로, 자신의 어린 아이에게 장애와 장애인에 대해 부정적이거나 차별적인 관점을 심어주지 않으려고 최선을 다 해 노력해 준 질문 속 아이 엄마에게 감사한 마음부터 전하고 싶다.

적어도 질문 속 엄마는 장애나 장애인을 기피나 차별의 대상으로 아이에게 말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실에 발을 딛고 아이를 키우며 살아가는 장애를 가진 엄마이자 한 사람의 입장에서 조금은 아쉬운 마음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종교적이며 동화적인 관점이 불편하고 설명하기 까다로운 ‘장애’의 본질과 실존을 부정하고 외면해 버리는 듯한 인상을 지울 수가 없기 때문이다.

어른이 된 우리들조차도 죽음, 질병, 장애와 같이 삶 속에 엄연히 존재하는 아프고 불편하여 정서적으로 소화하기 힘든 문제들을 직시하며 다루기 힘들어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우리는 죽음을 ‘무지개다리를 건너다’라는 너무도 아름답고 달콤하게까지 느껴지는 표현 등으로 바꾸어 우리의 두려움과 불편함을 그 달콤한 언어 속에 봉인해 버리기도 한다.

부모가 된 어른들은, 사랑하는 내 아이가 세상의 아름다운 것만 보고 느끼며 행복하기만을 바라는 마음으로 세상 속의 아름답지 않은 것들, 아프고 슬픈 것들의 존재를 본의 아니게 외면하고 덮고 미화하고 왜곡하기도 한다.

사실, 나 역시 그런 유혹을 느낀 경험이 있었다.

아이는 다섯 살에서 여섯 살 무렵까지 죽음의 실체와 죽음이 우리에게 다가오는 순서와 상황 등, 상상만으로도 가슴이 너무 아픈 질문들을 문득문득 내게 던지곤 했었다.

‘엄마! 우리는 다 죽는 거야?’

‘죽으면 우리 몸은 어떻게 되는 거야?’

‘나도 죽어?’

‘난 엄마보다 먼저 죽고 싶어. 엄마가 나보다 먼저 죽는 건 싫으니까…’

처음 아이로부터 이런 불편하고 아프기 이를 데 없는 질문들을 접했을 때, 또래 아이를 키우는 엄마와 어떻게 대처하는 것이 좋을지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대부분의 유아들이 그 시기와 정도는 달라도 그런 시기가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솔직히, 나 역시 이때, 처음으로 ‘죽음’이란 슬프고도 아프며 불편한 녀석을 달콤하고 부드러운 그 무언가로 가공 처리하여 다섯 살 내 아이의 머릿속에 쏙 넣어 주고 싶은 충동을 강하게 느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차마 그 어리디 어리고 사랑스러운 내 아이에게 ‘응, 엄마도 이응이도, 세상 모든 사람들은 각자에게 주어진 시간을 다 살고 나면 죽게 된단다.’라는 이야기를 시작하기가 얼마나 힘들었던지 지금도 생생히 기억하기 때문이다.

물론, 나는 겨우 그 유혹을 떨치고 이 말을 아이의 눈높이에 맞추어 최선을 다해 있는 그대로 설명해 주었다.

당연히, 엄마의 장애로 인한 ‘장애’의 본질과 다름, 불편한 점들에 대해서도 같은 방법, 같은 태도로 접근했다. 비록, 건조하고 현실적인 성향을 가진 나에게조차 제법 힘든 경험이었지만, 나는 우리 부모들이 엄연히 세상에 존재하는 고통과 아픔, 슬픔에 대해 미화하고 왜곡하고 회피하지 않았으면 한다.

만약, 위 사례 속 아이가 장애를 선하며 하느님께 예쁨 받을 귀한 재주로 인해 얻게 된 일종의 ‘선물’ 같은 것으로 여기며 자라났다고 가정해 보자.

그런데, 어느 날 문득 자신이나 자신의 아이에게 그 장애가 찾아온다면, 이 사람은, 장애 속에 담긴 불편함과 아픔을 과연 어떻게 받아들이고 다룰 수 있을까? 아마도, 자신의 과거 관점과 현재의 경험 사이의 머나 먼 간극 탓에 혼란스러운 인지적 부조화를 겪게 될 것이다.

‘장애는 그저 장애일 뿐이다.’

장애인이라서 불편하고 힘든 일도 무지무지 많다.

모바일뱅크 어플 접근성이 너무 떨어져 급할 때 맘대로 송금도 못해 아줌마로서 속이 터지기도 한다.

너무너무 읽고 싶은 신간도서가 기다려도 기다려도 대체도서로 나오지 않아 어쩔 수 없이 안 되는 영어로 원서를 보아야 할 때, 왜 나는 30년도 넘게 책값이 있어도 보고 싶은 책 하나 마음대로 볼 수 없나 싶어 속상하다.

반면에, 장애인이라서 갖게 되는 소소한 이득과 기쁨도 있다.

즐겨가는 집 근처 대형마트 시식코너 이모님들은, 시각장애인인 내가 늘 확대경 앱을 사용해서 열심히 장을 보는 걸 보시고는, 물건을 사면, 감시카메라를 슬쩍 피해 가며 증정품 하나라도 더 붙여 주려고 하신다.

장애인이라서 타인의 도움을 받게 되는 일이 많다 보니, 그 속에서 보석같이 귀한 사람, 귀한 마음을 만나는 행운을 얻기도 한다.

그저 장애는 장애일 뿐이다.

신의 귀한 선물도, 운명의 잔인한 비극도 아니다.

당신이 우연히 검은 머리에 검은 눈동자를 가지고 태어났고, 그것을 억울해 하며 금발머리에 파란 눈동자를 갖겠다며 그 운명을 한탄하지 않듯, 나 역시 우연히 찾아온 내 장애를 기꺼워하지도, 한탄 하지도 않는다.

장애나 장애인을 차별하고 무시해서도 안되지만, 아이들에게 인위적으로 돕고 친해져야 한다고 가르칠 필요도 없다. 그저, 장애라는 우연적 다름에 대해, 평범한 사람이 타인에게 기대하는 만큼의 상호 존중과 배려, 이해하려는 마음을 내어 줄 수 있을 만큼만 가르치면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내게 기쁨과 행복을 주는 행동을 타인에게 할 수 있고,

내게 불쾌함과 슬픔을 부르는 행동을 타인에개 하지 않으며,

내가 힘들 때 타인의 도움을 요청하고 받아들일 수 있고,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기꺼이 손을 내밀 수 있는, …

딱 그만큼이면 충분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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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진슬 칼럼리스트 세상이 너무 궁금했던 나머지 7개월 만에 급하게 세상 밖으로 나오는 바람에 시각장애와 평생의 불편한(?) 친구 사이가 되었습니다. 언어로 연주하고, 음악으로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20년 정도 피아노와 뜨거운 사랑을 했지만 첫사랑은 대게 이루어지지 않듯 그 사랑을 이루지는 못했습니다. 그래서 다시 새로운 사랑을 찾아 헤매던 끝에 지금은 장애, 음악, 보조공학 등에 관련된 글을 쓰고 번역도 하고 있습니다. 유치원, 학교, 기업체 등에 찾아가 장애와 장애를 가진 사람들의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스토리텔러(storyteller) 역할도 하고 있지요. 가끔은 강의의 전달력을 높이기 위해 피아노 앞에 앉기도 한답니다. 다섯 살 아이의 엄마이기도 한 저는 우리 아이가 살아갈 세상에서는 장애와 다름이 좀 더 편안하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으로 더 열심히 글을 쓰고, 강의를 하며, 연주도 하고 있습니다. 눈이 나쁜 대신 세상을 보는 눈이 조금은 더 예민하고, 커피와 독서, 클래식 음악을 사랑하는 다섯살 아이 엄마가 들려 드리는 같은 듯 다르고, 다른 듯 같은 아이 키우는 이야기 한 번 들어 보시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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