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를 맞고 걷는 그 ⓒ최선영

비 오는 거리를 터벅 이며 여기저기 흩어지는 빗물의 몸짓을 바라보는 그의 거친 발걸음은 영화관 앞에서 멈춰 섭니다

한참을 머물던 그는 바로 옆 카페로 들어갑니다

녹차라떼와 아메리카노 두 잔을 주문하고 빗물이 흘러내리는 창가 쪽에 자리를 잡습니다

빗물의 흘러내림으로 창 너머에 보이는 거리의 모습은 몹시도 헝클어져 있습니다

일그러진 모습 속에 드문드문 사람들의 오가는 걸음이 보이고 그 움직임을 따라 그의 시선이 이리저리 방황하다 한 사람을 바라보게 됩니다

빗물에 긴 머리가 촉촉하게 젖어 힘없이 아래로 처져있는 그녀는 우산도 없이 총총걸음으로 택시를 향해 달려갑니다

낯선 그녀의 뒷모습에서 그는 지민과의 첫 만남을 떠올립니다

아메리카노를 주문하는 그의 옆에서 녹차라떼를 주문하던 지민...

긴 머리는 촌스럽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처음으로 촌스럽지 않은 긴 머리를 그녀에게서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녀 옆에 서 있던 그녀의 남자도 보았습니다

그녀와 스치듯 마주친 시선에 설렘을 느끼던 그의 마음은 그녀의 남자를 본 순간 저 깊은 바닥으로 내려놓아야 했습니다

그 작은 설렘의 감정이 무엇인지 그때는 알아채지 못했습니다

영화를 보기 위해 일어서려는데 그녀도 일어나며 그를 앞질러 나갑니다

바로 앞 줄에 앉은 그들과 함께 영화를 봅니다

영화를 보는 그의 시선이 자꾸만 그들을 향합니다

줄거리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체 영화는 끝이 납니다

한 발 뒤 그들의 뒤를 따라 나오다 보니 밖은 비가 내리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발길을 옮기지 못하고 영화관 앞에서 발을 동동 구르며 옹기종기 모여있습니다

햇살이 눈부시던 2시간 전과 달리 먹구름 가득한 하늘은 세찬 소나기를 쏟아내립니다

비에 젖어 즐거워하는 그들을 바라보는 그 ⓒ최선영

지민과 함께 있던 그 남자는 걸치고 있던 얇은 외투를 벗어 우산을 만들고 옷으로 만든 우산 속에 몸을 숨긴 두 사람은 빗줄기 속으로 뛰어들어갑니다

그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그는 자신도 모르게 그들이 들어간 그 빗줄기 속으로 발걸음을 내딛습니다

쏟아지는 빗물에 흠뻑 젖은 그들은 영화에 나오는 주인공처럼 마냥 즐거워하며 그들을 향한 사람들의 시선을 외면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비만 홀딱 맞고 카메라에 얼굴 한번 내비치지 못한 엑스트라 같은 그를 덩그러니 남겨두고 저만치 멀어져 갑니다

비에 젖은 수채화 같은 아름다운 그녀의 모습을 그는 마음에 담았습니다

길을 걷다가도 머리가 긴 여자를 보면 혹시 그녀가 아닌가... 하여 돌아보기도 하고 그녀를 만난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고 그녀와 2시간을 함께 보낸 영화관에서 영화를 보며 두리번거리기도 했습니다

일주일에 두세 번은 우연을 가장한 그녀와의 마주침을 기대하며 그곳을 찾았습니다

그곳을 찾을 때마다 처음 그녀를 본 순간 알 수 없는 그 작은 설렘의 정체가 무엇인지 조금씩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6개월... 1년... 그리고 그는 바쁜 일상에 자신을 맡기며 한동안 영화를 보지 않고 살았습니다

그녀에 대한 막연한 설렘도 아련한 기억도 희미해질 무렵 그는 일상에서 잠시 떠나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오랜만에 영화관을 찾아갑니다

느낌 없는 감정으로 영화를 보고 막 나오는데 그가 그토록 스치고 싶어 했던 그녀가 보입니다

“지민아~ 팝콘 먹을래?”

지민이라는 그녀의 이름을 알게 된 것이 그녀를 다시 만난 것만큼이나 기뻤습니다

그녀의 옆에 남자가 아니라 여자 친구가 있다는 것도 그를 미소 짓게 했습니다

희미한 기억 속에만 존재하는 줄 알았던 그녀에 대한 그 설렘이 여전히 가슴 뛰게 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소곤거리는 그들의 대화에서 영화 제목을 듣고 영화티켓을 끊고 또 영화를 봅니다

지민의 뒷모습만 바라보며 어떻게 말을 걸어야 할지 혹시라도 이상한 사람으로 보이지는 않을지...생각하고 또 생각합니다

영화가 끝나고 지민을 따라나오던 그는 지민이 자리에 두고 간 휴대폰을 발견하고 얼른 휴대폰을 들고 지민을 뒤따라 갑니다

휴대폰을 건네주는 그와 활짝 웃으며 바라보는 그녀 ⓒ최선영

“저... 이거...”

휴대폰을 건네자 지민은 활짝 웃으며 받아듭니다

“하여튼... 넌 꼭 뭐 하나씩 두고 오더라~”

“너무 완벽하면 매력이 없잖아”

두 사람의 대화에 그는 피~식 웃어버립니다

“감사합니다 휴대폰 바꾼지도 얼마 안 됐는데... 또 잃어버릴뻔했네요 커피 한 잔 살게요"

뜻밖의 제안에 그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지민을 바라봅니다

“싫으시면 감사 인사만 받으시고요”

“아.. 아닙니다 커피 마시고 싶습니다”

세 사람은 카페로 갑니다

오늘도 지민은 녹차라떼를 주문합니다

“저 몇 번 뵜어요 영화 자주 보러 오시던데.., 바쁘셨나 봐요 몇 달 전부터는 안 보이셔서...”

지민은 그날 이후로도 영화를 보러 왔었고 그때마다 혼자 영화를 보러 오는 그를 보았습니다

지민을 그렇게도 만나려고 찾은 영화관인데 왜 그는 지민을 보지 못했을까요...

지민과 함께 영화를 보러 왔던 남자친구와 헤어지고 지민은 단발로 머리모양을 바꾸었습니다

늘 긴 머리만 살폈던 그는 단발머리의 그녀를 미처 알아보지 못했는데 다시 긴 머리가 된 그녀를 이 날 보게 되었습니다

“저... 시간 괜찮으시면 저녁같이 드실래요?”

“전 약속이 있어서 가봐야 되니까 혜린이랑 드세요”

지민은 혜린을 그에게 남겨두고 먼저 가버렸습니다

지민의 뒷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보는 그의 눈빛에서 지민에 대한 특별한 감정을 보게 된 혜린이 그에게 먼저 말을 건넵니다

“혹시 첫눈에 마음을 빼앗겼다... 뭐 그런 건가요?”

“아... 사실은...”

그는 쑥스러운 마음에 머리를 긁적이며 지민을 처음 보고 지금껏 지민을 다시 만나고 싶은 마음에 영화관을 찾았다는 말을 합니다

“솔직하게 말씀해 주셔서 저도 솔직하게 이야기해드릴게요”

혜린은 지민의 아픈 이별에 대해 말해줍니다

지민의 부모님 ⓒ최선영

지민의 부모님은 두 분다 청각장애인입니다 그런 두 분 밑에서 자란 지민은 어릴 때 두 분 다 말을 못하시는 까닭에 말보다는 수화를 먼저 배웠다고 합니다

말도 자연 더디게 배웠고 자라면서도 말수가 적은 조용한 아이였습니다

유치원에 가서는 선생님의 질문에 수화로 대답을 대신해서 선생님은 지민이가 말을 못하는 줄 착각하기도 하셨답니다

지민이가 학교에서 많이 아팠던 적이 있는데 부모님이 청각장애인이신 것을 깜빡하신 선생님이 전화를 걸어도 대답이 없어서 답답해하셨던 적도 있었답니다

여러 가지 어려움도 많았지만 지민이는 그런 부모님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고 학교 행사가 있으면 언제나 당당하게 부모님을 초대했고 장애인이면서도 예쁘게 딸을 키워주신 부모님께 감사했습니다

예쁘게 자란 자민이는 대학생이 되었습니다

그녀를 학교 축제 공연에서 보고 2년 동안 그녀에게 사랑을 고백했던 남자가 있었고 그 남자와 결혼까지 하려고 했습니다

두 사람의 사랑에는 아무 문제가 없었지만 부모님의 반대 앞에 두 사람은 갈등하기 시작했습니다

부모님을 잘 설득해보겠다고 했지만 지민은 자신의 결혼이 부모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일이라면 결혼을 포기하겠다며 그를 밀어냈습니다

“벌써 1년이 다 되어가네요 그 사람과 지민이 헤어진 지가...”

혜린의 말을 들은 그는 지민에 대한 마음이 더 깊어졌습니다

“저 실례되는 말이지만 그냥 사귀고 싶다 예쁘다 마음에 든다 그런 마음이라면 시작도 하지 말았으면 좋겠어요

지민이... 마음고생 많이 했어요...“

“시작도 하지 않았는데 뜨겁게 이 목숨 다해 사랑하겠다 이런 말하지는 못하겠지만...

전 지민 씨를 보고 우연히 스치기라도 하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1년 넘게 이 영화관을 찾았습니다

그동안 다른 분... 만날 수 있는 기회도 많았지만

지민 씨를 본 그 이후로 다른 사람은 눈에도 마음에도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제 감정이 무엇인지 몰라서 저도 많이 생각했었는데 딱 한 번 스친 사람을 오래도록 잊지 못하고

그리워할 수도 있다는 것이 시간이 더해지면서 어떤 감정에서 나온 것인지 알게 되었고...

우연을 가장한 인연을 만들고 싶어 찾았던 이곳에서 지민 씨를 더 이상 볼 수 없어서​

이 소중한 마음을 접으려 했는데... 이렇게 다시 만나게 되었습니다

제 마음이 가볍지 않다는 걸 아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지민 씨 부모님... 장애인이신 거 그게 왜 이별의 이유가 되는 것인지... 마음이 아픕니다"​

혜린은 깊은 그의 마음을 듣고 지민을 다시 만날 수 있게 도와달라는 그의 말에 지민의 전화번호를 건네주었습니다

그는 지민에게 다가가기 전에 먼저 그의 부모님을 찾아갔습니다

시작도 하지 않았고 지민의 마음이 그에게로 와줄지도 모르는 일이었지만 그는 부모님께 누군가를 마음에 담게 되었는데 그 사람의 부모님이 장애인이라고 말합니다

편견 갖지 않고 사랑을 시작할 수 있도록 지켜봐 달라고 했습니다

그의 부모님은 아들이 어떤 결정을 하든 가장 좋은 선택일 것이라며 토닥여주었습니다

수화로 인사하는 그 ⓒ최선영

부모님의 응원을 받은 그는 지민을 향해 달려갑니다

낯설게만 느껴지는 그의 존재가 지민에게 사랑이라는 감정을 만드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습니다

지민의 부모님을 위해 수화를 배우고 그가 수화로 인사를 드리자 지민의 부모님도 무척이나 마음에 들어 하셨습니다

그의 진실된 모습 앞에 닫혀있던 지민의 마음이 열렸고 그들은 아름다운 사랑을 나누었습니다

비가 오면 함께 우산 없이 그 비를 온몸으로 맞고 눈이 오면 러브스토리의 주인공처럼 눈밭을 굴러보기도 합니다

그는 부모님을 위해 자신의 꿈을 접으려는 지민에게 그 꿈을 이룰 수 있도록 지민이 없는 동안 대신 부모님 곁을 지키겠노라고 약속하며 유학을 떠나라고 합니다

발레를 전공한 지민이 유학에서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그는 이렇게 그녀와 함께 한 시간을 추억하며 그녀를 향한 그리움을 달랩니다

늘 지민과 함께 하고픈 그의 마음이 녹차라떼 이 한 잔에서도 가득 느껴집니다

그리고 이렇게 비가 많이 오는 날에는 지민이 더 그리워 혼자 투덜거려보기도 합니다

6개월 후면 지민이 그의 곁으로 돌아옵니다 그날을 기다리며 오늘도 그는 녹차라떼를 앞에 놓고 지민을 떠올립니다

6개월 후

지민의 부모님에게 수화로 인사를 건네는 그의 아버지 ⓒ최선영

그가 그토록 그리워하며 기다리던 지민이 돌아왔습니다 이제 부모님들을 모시고 서로 인사를 나눕니다

그의 아버지는 인사말을 수화로 배워서 지민의 부모님께 인사를 건넵니다

그의 어머니는 지민 어머니의 손을 잡으며 많이 힘들었을 텐데 딸을 훌륭히 잘 키웠다는 말을 건넵니다

지민은 그 마음이 너무 고마워서 정말 잘해드려야겠다고 다짐을 합니다

지민의 부모님도 그의 부모님의 따뜻한 배려에 깊이 감사하며 행복해했습니다​

그들의 결혼식에 많은 사람들이 축하를 합니다 그의 친구들과 지민의 친구들이 모여 연습한 수화로 부르는 축가는 더 아름다운 멜로디가 되어 모든 이들의 마음을 잔잔하게 울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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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선영 칼럼리스트 대학에서 미술을 전공하고 졸업 후 디자인회사에서 근무하다 미술학원을 운영하였다. 현재는 네이버 블로그와 카페를 운영하며 핸드메이드 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장애를 안고 살아가는 평범하지만 결코 평범할 수 없는 우리들의 이야기를 동화형식으로 재구성하여 누구나 쉽게 공감할 수 있는 따뜻한 언어로 담아 내려고한다. 동화를 통해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서로를 이해하는 시선의 폭이 넓어져 보이지 않는 편견의 문턱이 낮아지고 서로 배려하고 이해하는 어우러짐의 작은 역할이 될 수 있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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