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현재 대학에서 사회복지와 심리상담 관련 공부를 하고 있다. 얼마 전 사회복지 관련법에 대하여 프레젠테이션을 하고 복지 관련 내용으로 토론 주제를 정하여 학생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과제가 있었다.

내가 정한 토론 주제는 장애인식개선사업의 일환으로 진행되는 장애체험에 대한 찬반론 이었다. 당시 나는 장애 관련 책을 읽고 있었는데 그 내용 중에 장애체험에 관한 글이 있었고 그 글을 읽으며 많이 공감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 책의 저자도 장애인이었고 나 역시 장애인 이였으므로 나는 비장애인의 관점에서는 장애체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장애체험이 비장애인들의 장애인식개선에 정말 도움이 되는지 궁금했었다.

장애인식개선사업으로 학교나 복지 시설에서 진행되는 장애체험은 비장애인들이 안대를 착용하여 시각장애를 경험하고 팔다리에 무거운 것을 매달거나 혹은 휠체어를 타고 보행함으로서 지체장애를 경험하도록 하는 프로그램이다.

우리나라에서는 공론화되지 않았지만 서구에서는 장애체험에 대한 찬반론이 팽배했다고 한다. 장애체험을 반대하는 입장은 장애인의 신체적 불편함만을 강조함으로서 장애인을 도움을 필요한 대상으로만 인식시켜 오히려 장애인식을 편협한 방향으로 조장한다는 것이었다. 반면 찬성하는 입장은 비장애인들에게 장애와 장애인에 대해 이해시키고 관심을 갖게 하려면 그렇게라도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장애체험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이었지만 대부분의 비장애 학생들은 긍정적인 입장이었다. 비장애 학생들은 장애를 체험함으로서 장애인들이 얼마나 불편한지 알 수 있고 그런 체험을 통해 타인을 배려하는 마음을 가질 수도 있다는 의견이 대부분이었다.

사람마다 생각과 가치관은 다르고 옳고 그름을 판단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비장애인들의 관점이 궁금했고 장애에 대한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간극이 궁금했을 뿐이었으므로 토론은 거의 마무리 되어 가는 분위기였다.

그런데 교수님이 나에게 반론을 제기하셨다.

“임산부의 고충을 이해하기 위해 아빠들이 무거운 배를 달고 임신체험을 하는 것처럼 장애체험도 마찬가지 아닌가요? 장애체험이 장애인의 신체적 불편함을 강조하여 장애인의 도움이 필요한 부분만을 강조한다고 하였는데 사실 장애인이 가장 힘든 부분이 신체적 불편함 아닌가요? 그런 면에서 장애를 직접 경험함으로서 장애인의 생활을 이해하는데 가장 효과적인 프로그램 같은데요.”

이 글을 읽는 이들 중에는 교수님의 말에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이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입장이나 생각은 개인마다 모두 다르므로 이 내용에 대해서는 옳고 그름을 논하고 싶지는 않다. 그러나 나는 장애체험을 임신체험과 같은 맥락으로 반론을 제기한 교수님께 화가 났다.

그리고 장애체험을 반대하는 내 입장을 다음과 같이 밝혔다.

신체적 기능의 결함으로 일상생활이나 이동에 있어서 어려운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런 신체적 불편함은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고 자립 재활이 되면 비장애인과는 다르지만 나름의 방식으로 일상을 살아간다. 그러나 장애인으로 살아가며 느끼고 경험하게 되는 정서적 심리적 불편함은 체험만으로 경험하기 힘들다.

10개월 동안 임산부가 겪는 신체적 불편함을 경험하기 위해 아빠들이 짬짬이 임신체험을 하는 것과 한두 시간의 장애체험으로 평생 장애를 가지고 사는 장애인의 삶을 이해한다는 것은 그 의미가 다르다.

몇 년 전 모 국회의원이 기초수급권자의 입장이 되어 쪽방에서 한 끼 식사를 해결하며 먹을 만하더라는 멘트로 국민들의 질타를 받은 적이 있었다.

그 국회의원이 질타를 받은 이유는 무엇일까? 단 한 끼의 식사 체험으로 그가 기초수급권자의 상대적 빈곤에 대한 자괴감, 무력감 그리고 삶에 대한 고충을 느낄 수 있었을까?

편안하고 안락한 주거환경에 질 좋은 재료로 영양가 있는 음식으로 식사를 해결하는 국회의원에게 쪽방에서 카레와 참치캔 만으로 해결해야 하는 식사는 한번쯤 경험해 볼 만한 이벤트에 불과했을 것이다. 국회의원의 한 끼 식사체험으로 기초수급권자의 삶을 감히 경험했다고 말할 수 없는 것처럼 눈을 가리고 휠체어를 타고 한두 시간을 보행해 보았다고 해서 장애인의 어려움을 얼마나 느낄 수 있을까?

또한 장애인이 아니더라도 어려운 상황에 처한 사람을 도와주고 배려해주는 것은 오늘날 사회구성원으로서 갖추어야 할 도덕적 덕목이다. 그런데 장애인의 신체적 불편함을 체험하게 하여 배려심의 필요성을 교육시킨다는 게 장애를 단순히 교육의 수단으로 가볍게 치부하는 것 같아 장애인 당사자로서 기분이 좋지 않다.

장애인의 신체적 불편함을 체험하고 이러한 경험을 통해 장애인을 도와줘야 하는 대상으로 인식시키는 것 자체가 올바른 장애인식이라고 할 수 없다.

장애인의 신체적 불편함만을 강조하는 장애체험은 비장애인들에게는 자신들의 신체적 우월감이나 자기만족만을 충족시키도록 가르치는 것과 같다. 그리고 신체적으로 열악한 장애인을 도움이 필요한 대상으로 인식시킴으로서 장애인들에게는 자괴감이나 열등의식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

도움이 필요하다는 부분에서는 어느 정도 인정하지만 장애인을 무조건 그 대상으로 인식시킴으로서 개인가치의 존중이나 존엄을 무시한 채 일방적으로 배려하는 것이 장애인을 위한 것으로 오해하여 행동하는 비장애인들도 있다.

나 같은 경우 도움이 필요 없다고 했는데도 도와주겠다며 억지로 팔을 부여잡는 사람도 있었고 초등학생들이 우르르 달려와 내 의사와는 상관없이 자기들끼리 서로 돕겠다며 밀고 당김을 겪기도 하였다. 또한 음식을 먹을 때 내 의사는 물어보지 않고 무조건 음식을 싸서 입에 넣어주는 경우도 부지기수다.

올바른 장애인식은 장애 여부나 도움 여부를 떠나 장애인 역시 비장애인들과 동등하며 대등한 존재로서 장애인의 신체적 어려움을 이해하고 그들 나름의 삶의 방식을 인정하며 배려나 도움에 있어서도 인간 존중의 마음을 바탕으로 상대를 위한 배려가 있어야 한다.

내가 경험한 사례들을 이야기하며 내 의견을 다시한번 밝혔다. 그런데 내가 경험한 사례를 들으신 교수님의 말이 더 어이없었다.

"아이들은 아직 어려서 그렇다지만 어른 중에 그런 사람이 어디 있어요?"

그 말에 어이없고 황당했다. 내가 직접 겪은 일을 이야기한 것인데 '그런 사람이 어디 있냐?' 는 교수님의 말을 듣고 나는 이렇게 얘기했다.

"그런 사람이 없을 것 같겠지만 그런 사람들이 의외로 많으며 그런 일들을 우린 겪으며 삽니다. 이런 일을 겪었을 때 느끼는 감정들은 장애체험으로 느낄 수는 없겠지요. "

나의 마지막 말에 교수님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으셨고 그것으로 토론은 마무리 되었다. 그리고 전체적인 과제에 대한 피드백에서 교수님은 나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다.

"몰지각한 비장애인들도 있을 수 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이 더 많다. 그러니 모든 사람이 그런 것처럼 일반화 시키지는 말고 좀 더 긍정적으로 생각하기 바란다."

나는 이 과제를 마치고 한동안 마음이 너무 아프고 억울하고 우리 장애인의 삶이 너무 불쌍해서 한동안 혼자 울기도 하였다.

교수님의 '그런 경우가 어디 있냐?' 는 말에서 '그런 경우' 없는 일을 겪으며 살아가는 우리들 그리고 일반인도 아니고 복지를 가르치는 교수조차 알지 못하고 믿지 못하는 현실 속에 살아가는 내 자신을 비롯한 장애인들의 삶이 너무 애처롭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현실을 말한 나를 피해의식에 빠져있는 것처럼 말한 교수님의 마지막 멘트에 나는 교수의 자질까지 의심스러웠다.

장애를 가진 나와 함께하는 것을 부끄러워하거나 꺼려하는 비장애인들은 있겠지만 나 스스로 내 장애를 부끄러워 한 적은 없다.

정안인으로 37년을 살았고 시각장애인으로 6년을 살았다. 시각장애인으로 살아오면서 감사하고 따뜻한 사람들을 만났고 세상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착하고 따뜻한 사람이 더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정안인으로 살아오면서 경험하지 못했던 인격적 무시와 모멸감 역시 시각장애인으로 살아오면서 수차례 경험했다.

우리가 비장애인들에게 바라는 것은 진정 무엇일까? 그리고 장애인의 의견이나 생각이 배제된 장애인 관련 정책이나 사업 등이 진정 장애인을 위한 것이 될 수 있을까?

개방과 수용 정신이 결여된 편협하고 왜곡된 장애관을 가진 교수로부터 가르침을 받은 비장애 학생들은 진정 장애인을 위하는 자질 있는 복지사가 될 수 있을까?

누군가는 말하였다. "우리 없이 우리에 대한 것은 없다"고. 나 역시 그 교수님에게 이 말을 전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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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미 칼럼니스트 9년 전 첫아이가 3개월이 되었을 무렵 질병으로 하루아침에 빛도 느끼지 못하는 시각장애인이 되었다. 상자 속에 갇힌 듯한 공포와 두려움 속에서 나를 바라볼 딸아이의 모습을 떠올리며 삐에로 엄마가 되었다. 그러나 언제까지나 삐에로 엄마로 살 수는 없었다. 그것이 지워지는 가짜라는 걸 딸아이가 알게 될테니 말이다. 더디고 힘들었지만 삐에로 분장을 지우고 밝고 당당한 엄마로 아이와 함께 세상 밖으로 나왔다. 다시 대학에 들어가 공부를 하고 초중고교의 장애공감교육 강사로 활동하기 시작했고 2019년 직장내장애인식개선 강사로 공공 및 민간 기업의 의뢰를 받아 교육강사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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