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다니는 학교에는 만학도들의 모임이 있다. 나름 각자의 생활을 하며 학업을 하는 만학도들이 모두 모이기는 싶지 않다. 나 역시 가사와 육아를 하며 학업을 하는 중이라 모임이 있어도 자주 참석하지 못하였다.

그런데 중간고사를 마치고 만학도들의 모임에 나가게 되었다. 서로의 안부를 묻고 이런저런 이야기로 수다 삼매경에 빠졌다. 그러다 내 칼럼에 대한 이야기가 오고가게 되었다. 그리고 지난달에 기재된 ‘장애로 인해 발생되는 추가 생활비’에 관해 쓴 내 칼럼을 보고 한 지인이 이렇게 말했다.

“넉넉하지 못한 서민층인데도 복지혜택을 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들은 세금을 내는 것도 버거워하는데 그런 세금으로 장애가 있다는 이유만으로 장애인에게 경제적 혜택을 준다는 것은 그들의 입장에서는 억울할 수도 있다.”

복지를 위해서는 돈이 든다. 국민연금이나 국민건강보험과 같은 사회보험정책을 제외한 거의 모든 복지정책은 국가의 재정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물론 국가의 재정은 국민들의 세금이 주요 원천이므로 복지 혜택을 받는다는 것은 국민들의 세금 덕분이라고 할 수 있다.

교수님 한 분이 자신이 복지 현장에서 근무하며 경험한 일화를 들려준 적이 있었다.

당시 교수님은 노인복지 관장으로 계셨는데 하루는 관장실로 어르신 한 분이 찾아 오셔서 형평성에 맞지 않는 부당한 부탁을 했고 이를 거절하자 그 어르신은 탁자를 내리치며 “네가 누구 덕분에 밥벌이를 하는데 이 따위로 처신하냐?” 이렇게 고래고래 고함치며 삿대질을 하는 어르신은 자분자분 설명하는 교수님의 꼴이 더 보기 싫었는지 급기야 멱살잡이에 이르셨단다.

일이 이렇게 되자 교수님은 목에 걸려 있던 패용을 풀며 한마디 하셨단다.

“저는 이제 관장 아닙니다. 이제 어르신은 저 덕분에 이렇게 생활하시는 겁니다. 맞죠?”

복지는 과연 권리일까? 혜택일까?

복지국가의 시초라고 할 수 있는 영국의 경우 근대시대 이전에는 빈곤, 무지, 질병 등을 개인의 문제로 간주하여 국가 차원의 복지정책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산업혁명으로 도시 빈민층이 늘어남에 따라 그들의 빈곤이 개인의 문제가 아닌 사회의 책임으로 인식하면서 국가 차원의 복지정책이 시행되었는데 그것이 엘리자베스 구빈법이다.

구빈법은 1601년에 제정되었고 그때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서구의 복지정책은 400년의 역사를 통해 현재 선진복지 국가로 발전해 왔다. 그에 비해 우리나라는 해방 이후 공무원 연금법을 시초로 복지정책이 제도화되었으니 우리의 복지 역사는 50년 정도 밖에 되지 않는다.

게다가 장애인 복지는 80년대 후반부터 사회적으로 시행되어 왔으니 장애인 복지의 역사는 30년 정도 밖에 되지 않는 것이다. 급속한 경제성장과 더불어 우리나라의 복지정책도 급속하게 제도화되었고 확대, 발전하였다. 그러나 국민들의 복지에 대한 시민의식은 복지의 제도적 성장 속도를 따라가지 못한 것 같다.

우리나라의 복지정책은 시행 초, 요보호 대상자를 위주로 선별적 복지가 이루어져 왔다.

그러나 이러한 선별적 복지는 복지 수혜자에게 스티그마(stigma)를 남겼다. 예를 들어 과거 형편이 어려운 아이들에게만 선별적으로 무상 급식을 시행하였을 때 무상 급식을 받는 아이들은 못 살고 가난한 아이, 도움을 받아야 하는 아이로 낙인 받았고 아이들은 그 낙인으로 인해 또 다른 마음의 상처를 받기도 하였다.

이런 맥락에서 복지로 인한 스티그마를 제거하기 위해 제도적으로 복지의 권리성을 부여하게 되었다. 즉, 도움을 받아야 하는 수혜자가 아닌 누려야 하는 권리를 대상자에게 부여한 것이다. 그 대표적인 예가 기초수급권자이다. 과거에는 기초수급대상자라고 칭하였으나 오늘날에는 기초생활수급권자로 칭하며 권리로서 복지 혜택을 요구하라는 의미이다.

현재 우리나라의 거의 모든 복지제도에는 이러한 권리성과 국가의 책임을 포함하고 있다. 그렇다보니 제도적으로 부여된 권리에 대하여 앞서 언급한 그 어르신처럼 복지를 모든 것을 허용하는 만능통행권처럼 행사하는 이들도 있다. 이런 부분에서 복지 수혜자의 의식 변화가 필요하기도 하다.

한편 나에게 혜택이 있는 복지만을 정당하고 합리적이라고 생각하는 의식도 바뀌어야 한다. 가령 국민건강보험의 경우 소득이 많은 사업가는 수십만 원의 보험료를 100% 본인이 부담한다. 사실 막대한 부를 가진 사람들은 굳이 건강보험료를 내지 않더라도 민간보험이나 자력으로 병원 치료비를 충당할 수 있다.

또한 어떤 이들은 본인은 잘 아프지 않아서 병원갈 일도 없는데 건강보험료를 많이 납부한다며 억울해 하는 사람도 있다. 복지는 사회적 연대의식을 바탕으로 소득 재분배를 통해 부의 불균형을 최소화하기 위한 노력이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우리나라는 요보호 대상자를 중심으로 복지정책이 시행되어 왔다. 여기서 요보호 대상자라고 하면 주로 아동, 노인, 장애인을 일컫는데 현재 복지정책을 보면 아동이나 노인복지에 비해 장애인 복지는 재정적 제도적으로 매우 취약한 상황이다.

취약한 이유에는 여러 가지가 이겠지만 국민 여론 자체가 장애인 복지의 필요성을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아동복지는 내 가정, 내 자녀, 내 후손을 위한 복지이고 노인복지는 내 부모 혹은 언젠가는 내가 누릴 수 있는 복지라는 생각으로 정책에 대해 많은 관심을 기울인다.

또한 급속한 가족 변화에 따른 사회문제가 공론화 되면서 다문화나 한부모가정 그리고 장기요양보험 등과 같은 정책들이 제도화되고 확대되어 가고 있다. 그러나 장애인 복지는 나와는 상관없는 특정 소수만을 위한 혜택이라는 생각이 팽배한 것 같다. 그렇다보니 사회적으로 공론화 되는 것도 힘든 것이 현실이다.

불과 6년 전, 장애인 복지는 나와는 아무 상관없는 복지정책이었고 죽는 날까지 그럴 거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나는 장애인이 되었고 장애인 복지 서비스를 받고 있다.

장애인 복지 정책으로 경제적, 물리적으로 서비스를 제공받기도 하지만 나에게 장애인 복지는 장애가 있지만 나 역시 이 사회의 구성원으로 보호받고 있다는 정신적 든든함이 더 컸던 것 같다.

장애인이기 때문에 누릴 수 있는 것보다 장애인이기 때문에 부당하고 불합리한 차별적 처우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는 권리가 있었기에 나는 좀 더 자신 있게 세상 밖으로 나올 수 있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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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미 칼럼니스트 9년 전 첫아이가 3개월이 되었을 무렵 질병으로 하루아침에 빛도 느끼지 못하는 시각장애인이 되었다. 상자 속에 갇힌 듯한 공포와 두려움 속에서 나를 바라볼 딸아이의 모습을 떠올리며 삐에로 엄마가 되었다. 그러나 언제까지나 삐에로 엄마로 살 수는 없었다. 그것이 지워지는 가짜라는 걸 딸아이가 알게 될테니 말이다. 더디고 힘들었지만 삐에로 분장을 지우고 밝고 당당한 엄마로 아이와 함께 세상 밖으로 나왔다. 다시 대학에 들어가 공부를 하고 초중고교의 장애공감교육 강사로 활동하기 시작했고 2019년 직장내장애인식개선 강사로 공공 및 민간 기업의 의뢰를 받아 교육강사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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