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여 년 전에 필자는 한국번역가협회 과학기술 2급 자격증 시험에 통과한 후 ‘ㅈ’회사의 영한, 한영번역 프리랜서를 했다. 번역을 잘 하는 편은 아니지만 재미있었다.

그런데 당시 번역이 한 장에 최고 4000원, 최저 1000원이라 노동착취나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번역 시 1장당 가격을 올려 달라 요구했지만 ‘ㅈ’회사는 안 된다고 했다.

이 말에 나는 그만 두었지만 ‘ㅈ’회사 사장은 ‘당신 말고도 잘 하는 사람이 많아!’라는 모욕적인 느낌의 말을 했다. 이 말에 나는 노동착취로 고소해볼까 생각했었다.

하지만 계약서에 한 장당 1000~4000원이었다는 사실을 모르고 동의한 터라 노동착취로 고소해도 ‘ㅈ’회사에서 내가 동의한 계약서를 증거자료로 내놓으면 소용없다는 말을 들었다. 근로계약서가 얼마나 중요한지 뼈저리게 경험한 순간이었다.

연구소에 입사 후 ‘알기 쉬운 장애인권리협약 제작위원회’에 참여해 우리 발달장애인 당사자 위원들과 함께 권리협약을 알기 쉽게 만드는 작업을 한 적이 있었다. 고용 관련 이야기를 나누던 도중 한 위원이 근로계약서에 대해 이런 말을 했다.

‘갑과 을이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요.’

이 말을 듣는 순간 근로계약서를 발달장애인이 볼 때 이해가 어려운 말이 다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이해하기 쉽지 않은 근로계약서에 서명할 시 사용자 입맛에 의해 노동착취를 당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우려가 들었다. 그러다 보니 필자가 십여 년 전 ‘ㅈ’ 회사로부터 노동착취 당한 일이 함께 떠올랐다.

발달장애인이 이해하기 어려운 말들이 다수 있는 고용노동부 표준근로계약서의 한 예. ⓒ고용노동부

발달장애인이 알기 쉽게 근로계약서를 바꾸면 어떨까? 발달장애인이 회사업무의 내용을 이해함은 물론 임금, 복리후생 등 모든 조건, 회사에서 누릴 권리 및 반드시 해야 할 책임, 의무를 제대로 아는데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다.

더 나아가선 발달장애인이 근로계약 내용을 알고 난 후 임금, 복리후생 등에 있어 문제가 있다고 판단하면 이에 대해 협상하며 자신의 노동권을 지키려고 최선을 다하지 않겠는가? 협상한 후 회사의 모든 조건이 맞으면 발달장애인은 보호자 도움 없이도 스스로 근로계약에 서명할 수 있을 것이다.

근로계약을 말로 할 경우엔 사용자와 발달장애인이 예측하지 못한 분쟁이 발생할 시 크고 작은 법적 문제가 발생할 수 있어 근로계약 내용을 문서로 알기 쉽고도 분명하게 해두는 것이 필요하다.

결국 발달장애인에게 알기 쉬운 근로계약서란 자신의 노동권을 정당하게 행사해 정당한 보수를 받고 복리후생을 제대로 누리는 등 당당하게 직장생활을 하기 위한 중요한 기초인 것이다.

얼마 전 발달장애인의 정보접근 평등을 위한 비영리 민간단체 ‘피치마켓’에서 재단법인 ‘동천’의 지원으로 ‘발달장애 근로자를 위한 쉬운 근로계약서’사업을 하게 됐다는 소식을 접했다.

피치마켓에 문의해보니 발달장애인 당사자가 스스로 계약서에 서명하고 당당한 직장생활을 누리기 위한 계기를 만들려는 취지에서 이 사업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피치마켓의 ‘알기 쉬운 근로계약서’가 발달장애인 당사자 참여 속에 잘 만들어지고 차후 전국에 있는 직업재활시설, 복지관, 일반회사, 관공서 등에 배포돼 발달장애인에게 필요한 도움이 되는 문서가 되길 당사자의 한 사람으로서 바란다. 이를 통해 알기 쉬운 근로계약서 관련내용을 장차법 고용분야에 녹이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그래서 알기 쉬운 근로계약서를 통해 발달장애인이 직장생활에서 차별받지 않고 노동에서 당당해져 다른 사람과 함께 제대로 직장생활을 즐기도록 하는 게 현실이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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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과 팝송 감상, 월드컵 등을 즐기고 건강정보에 관심이 많은 반백년 청년이자, 자폐성장애인 자조모임 estas 회원이다. 전 한국발달장애인가족연구소 정책연구팀 간사였으며, 유엔장애인권리협약 정부심의 대응을 위해 민간대표단의 일원으로 2번 심의를 참관한 경험이 있다. 칼럼에서는 자폐인으로서의 일상을 공유하고, 장애인권리협약, 장차법과 관련해 지적장애인, 자폐성장애인과 그 가족이 처한 현실, 장애인의 건강권과 교육권, 접근권 등에 대한 생각을 솔직하게 나눌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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