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실미도’에는 ‘조중사(허준호분)’와 박중사(이정헌분)라는 상반된 인물들이 등장합니다.

평소 대원들은 독사와 같이 냉철하고 엄격한 ‘조중사’와 달리 동네 형처럼 살가운 박중사에게서 더 많은 인간미를 느끼고 따르게 됩니다.

그러나 대원들 모두를 사살해야하는 절체절명의 순간 두 사람의 본성이 드러나게 되는데요. 대원들을 끝까지 책임지기 위해 위험을 감수하려는 ‘조중사’와 자신이 살기위해 대원들을 사살하려는 박중사의 본심을 파악한 대원들은 결국 엄청난 거사에 앞서 ‘조중사’를 살려주기로 하고 그에게 진심어린 경의를 표하게 됩니다.

결혼 후 청소를 하다 우연찮게 두툼한 대(大)봉투 하나를 발견하였습니다.

아내의 것이겠거니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봉투를 열어보았는데 기절하는 줄 알았습니다.

물리치료사 면허증, 교원자격증, 각종 상담 및 행동치료사 자격증, 추나·활법·테이핑 지도자 자격증 심지어 합기도 단증까지. 아뿔싸, 특수교사인줄로만 알았던 아내의 화려한 과거에 오금이 저렸습니다.

그제야 아무렇게나 휘두른다고 생각했던 주먹이 어째 급소에만 딱 딱 꽂힌다 싶었는데 그것이 기분 탓이 아니었음을 비로소 알게 되었습니다.

수많은 아내의 자격증 중 일부 ⓒ제지훈

전설 같은 아내의 일화 하나를 소개하겠습니다.

출산 한 달 전, 만삭의 몸으로 떨어지는 낙엽도 피해 다니던 때에 일어난 사건입니다.

(아내의 말을 빌리자면) 겁 없고, 개념 없는 중3짜리 남학생 하나가 장애학생들을 위해 설치된 엘리베이터를 보란 듯이 아내 앞에서 타고는 3층으로 올라가더랍니다.

‘이 쉑히가 겁도 없이...’

불타는 정의감에 딸딸이를 질질 끌고 만삭인 것도 잊은 채 1층에서 3층까지 단숨에 뛰어 올라가서는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마자 그 쉑히 목덜미를 잡고 패대기를 쳤다는 거 아닙니까.

상상해 보십시오.

만삭의 임산부가 슬리퍼가 벗겨질까봐 열 발가락에 잔뜩 힘을 주고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은 시뻘건 얼굴로 숨을 헐떡이며 3층까지 쫓아가고, 문이 열리자마자 영문도 모르는 개념 없는 학생 하나가 멱살이 잡힌 채 질질 끌려 나와 패대기쳐 지는 상황을요.

교육도 중하고, 정의도 좋지만 뱃속의 아기를 위해서라도 어지간하면 참으라고 신신당부했건만 그놈의 불같은(지랄 같은) 성격은 육아휴직을 하기 전까지 늘 남편인 저를 긴장하게 만들었습니다.

출산 후.

출산했다고 그 성격이 어디 가겠습니까마는 그래도 학생들을 대하는 자세에 있어서는 많은 변화가 찾아왔습니다. 사고뭉치들이라 해도 부모의 입장에서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된 것이지요. 어지간하면 이해하고 넘어가더란 말입니다.

특수교육대상자였으나 경계선에 있던 준영이(가명, 당시 중2)는 늘 사고를 몰고 다니는 아이였습니다. 다른 지역의 쪼매 거시기한 학생들과도 얼마나 교류가 잦은지 교복입고 길거리에서 담배 정도는 기본으로 빨아주시고, 가끔씩 부모님의 노고를 덜어드린답시고 며칠씩 집에도 들어가지 않았지요.

그날도 집을 나와 몇 날을 친구들과 놀다 뭔 짓을 했는지 파출소에 잡혀갔더랍니다.

아내에게 연락이 와 파출소에 가보니 준영이가 해맑은 얼굴로 아내를 맞이하는데, 그때까지만 해도 아내는 준영이가 특수교육대상자라 담임선생님 보다 자기에게로 먼저 연락이 왔나보다 하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을 했다네요.

안 그래도 준영이가 집을 나가 있는 사이 어머니께 연락이 와서는 못 된 친구들하고 어울려 다닌다고 걱정을 많이 하더랍니다. 잘 됐다 싶어 그 녀석들 신상파악 차 휴대폰 통화기록을 확인하는데...

씨.발.년.

기가 찬 아내가 “야, 암만 그래도 사람 이름에 '씨X년'이 뭐고? 얘가 너하고 어울려 다닌다는 걔들 중 하나가? 이것들을 그냥~”

평소 아내의 성격을 아는지라 얼굴이 새파랗게 상기된 준영이. 금방이라도 그 년을 잡으러 갈 기세로 덤벼들던 아내가 전화번호를 확인하는 순간 얼음장이 되어버렸습니다.

맞습니다. 그 '씨X년'이 바로 아내였던 것입니다.

집 나가면 잡으러오고 못 된 짓하다 걸리면 호되게 야단치니 준영이에게 아내는 여태껏 만나보지 못한 강적 중에 강적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니 오죽했으면 선생님을 ‘씨X년’이라 저장해 뒀겠습니까. 암요, 그 나이 학생들 입장에서는 충분히 공감이 가지요.

놀란 가슴을 겨우 진정시키고 파출소에서 데려나와 무사히 집으로 인계해 주고는 오만 생각을 다 했다고 합니다. 뭐, 남들은 다 알고 있는데 정작 본인만 몰랐다가 늦게라도 알게 되었으니 참 다행이다 싶었지만요. 하하.

몇 달 후 아내와 길을 가는데 우연히 길거리에서 준영이와 그 패거리들과 마주하게 되었습니다.

“어이, 준영아~”

저를 잘 모르는 준영이와 패거리들은 적잖이 당황하며 누구시냐고 묻습니다.

“나? 씨X년 남편아이가”

그때 그 녀석들의 표정을 찍어두지 않은 게 참 후회가 되네요. 하하하.

그 후로 준영이는 별 탈 없이 중2, 3 과정을 잘 마무리하였습니다.

졸업을 앞두고 성적도 그렇고 가정 형편도 있고 해서 실업계 고등학교로 원서를 넣게 되었나봅니다.

면접을 며칠 앞 둔 어느 날 준영이가 아내에게 정중하게 부탁을 하더라네요.

“선생님, 학교에 면접 보러 가야하는데 같이 좀 가주시면 안 될까요? 잘 모르는 것도 많고 긴장도 돼서요.”

누군가의 도움이 절실할 때 다른 누구도 아닌 아내에게 도움을 청했던 준영이와 군말 없이 함께 동행 해 주었던 아내의 모습을 통해 참 많은 것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사랑의 가장 확실한 표현은 어쩌면 마지막까지 책임져주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조중사’처럼 말이지요.

그러고 보면 아내의 진심을 학생들은 진작 파악했나 봅니다. 저만 눈치 없이 모르고 있었던 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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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지훈 칼럼리스트 (사)경남지적발달장애인복지협회 거제시지부장으로 재직하면서 인근대학 사회복지학과에서 후배 복지사들을 양성하고 있다. 절대로 포기할 수 없는 장애인복지의 길에 언제나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는 가족과, 좋은 사람들이 함께 있어 오늘도 행복하게 까불짝대며 잰걸음을 힘차게 내딛는다. (발달)장애인들의 사회통합으로의 여정에 함께하며 진솔하게 일상을 그려나가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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