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인으로 살아가다 보면 일신의 불편함보다 더 견디기 힘든 것이 있다. 그것은 내 일신의 장애로 가족들이 짊어져야 하는 마음의 상처들이다.

특히 부모와 자식 사이에는 그 아픔과 상처가 고스란히 전이되는 것 같다. 부모가 장애가 있든 자식이 장애가 있든 부모는 부모로서 자식은 자식으로서 상대의 장애와 더불어 안쓰러움과 애절함을 가슴에 담고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엄마로서 자식으로서 장애를 가지고 있는 나로서도 마음 한 켠에 항상 미안함이 떠나지 않는다. 장애로 인해 어쩔 수 없이 내려놓아야 하는 것들을 내려놓으며 그만큼 엄마로 자식으로 내 몫이 부족하다는 생각에 내려진 만큼 마음은 더 무거워진다.

받는 것 이상으로 주는 것에 더 큰 기쁨과 행복이 있다는 사실을 더 이상 넉넉히 해주지 못하게 되어서야 비로소 깨달은 어리석음에 자책하고 후회하며 마음의 무게는 더 늘어간다.

노쇠해지는 부모님과 커가는 아이를 보며 내 마음의 저울은 내기라도 하듯 시소처럼 오르락 내리락 한다. 아이의 성장에 안도와 감사함으로 미안함의 무게가 덜어진 만큼 날로 쇠약해지는 부모님들을 챙겨드리지 못함에 죄송스러움으로 마음의 무게는 늘어난다.

어른이 되어가는 아이와 아이처럼 돌봄이 필요해진 부모님 사이에서 내 몸은 아이 곁에 내 마음은 부모 곁을 맴돈다. 마음처럼 달려갈 수도 없고 곁에 있어도 제대로 챙겨드리지 못하고 오히려 도움을 받아야 한다는 현실에 내 몸에 들어붙은 장애가 한스럽기도 하다.

나는 딸아이가 100여일이 되었을 무렵 갑자기 쓰러졌고 20여일간 혼수상태로 중환자실에 있다가 구사일생으로 살아났다. 의식을 차렸을 때 눈은 이미 실명 상태였고 당시에는 하반신 마비로 걸을 수조차 없었다.

세상을 다시 보기 위해 수개월 동안 유명하다는 병원들을 입퇴원하며 치료에 매달렸지만 나는 한줄기 빛조차 들지 않는 어둠에 갇혀 버렸다. 의사로부터 이제 영원히 세상을 볼 수 없다는 진단을 받았을 때 엄마는 당신의 눈을 빼서 나에게 주겠다 하였고 아빠는 고쳐내라며 의사의 멱살을 부여잡았다.

엄마의 눈물 섞인 애원과 아빠의 절규 속에서 나는 내 아기를 생각하며 울었다.

내리사랑이라고 하였던가?

그때는 몰랐다. 다만 온전한 엄마의 돌봄과 눈길을 받지 못하게 된 내 아기만이 불쌍하다 생각했고 아이의 자라는 모습을 지켜볼 수 없다는 사실만이 슬펐었다.

애지중지 귀하게 키워 결혼을 시키고 이제 어엿한 한 가정의 엄마가 된 딸을 보며 감사하고 부모로서의 소명을 다했다고 생각했을 부모님이 세상을 보지 못하게 된 딸을 보며 느꼈을 그 아픔과 고통을 그때는 몰랐었다.

100여일 밖에 엄마 노릇을 못하였는데도 내 자식이 누리지 못할 것들에 마음이 찢어질 듯 아팠었는데 수십년을 키워온 자식이 하루아침에 세상을 보지 못하고 누군가의 도움을 받으며 살아야 하는 장애인이 되었다는 사실에 부모님은 하늘이 무너지고 억장이 무너졌을 것이다.

자식의 아픔을 지켜봐야 하는 부모의 마음을 엄마가 되어 아이를 키우며 이제야 조금씩 알아간다. 몸이 아파 힘들어하는 아이를 지켜보는 것이 부모로서 얼마나 안쓰러운지 대신 아파줄 수 있다면 하는 간절한 마음에도 그렇게 해주지 못하는 부모의 마음이 얼마나 안타까운지 이제는 안다.

내가 세상을 보지 못하고 산지 벌써 6년이 되었는데도 부모님은 아직도 나에게 '미안하다' 하신다. 내 장애가 당신들의 탓도 아닌데 부모라는 이유만으로 '미안하다' 하신다. 지켜주지 못하고 대신해주지 못하는 부모의 마음에 '미안하다' 하시는 것을 알고는 있지만 그런 마음을 평생 짊어지게 한 내 장애가 원망스럽다.

갑작스런 장애로 몸서리치며 울부짖는 딸을 보며 부모님은 얼마나 가슴으로 통곡을 하셨을까? 더듬거리는 내 몸짓을 보며 부모님은 얼마나 눈물지었을까? 예쁜 손녀딸을 보며 제 자식을 보지 못하는 딸 생각에 얼마나 가슴이 저미셨을까?

내 아이가 커가고 내가 부모가 되어가면서 이제야 부모님의 사랑과 아픔을 알아간다.

보지 못하는 딸을 보며 가슴속에 마르지 않는 아픔을 담고 사시면서 부모님은 오히려 내게 '고맙다' 하신다. 내 곁을 지켜주시는 당신들인데 오히려 나에게 '고맙다' 하신다. 아낌없이 주고 싶은 게 부모의 마음이라지만 아무것도 해드리지 못하게 만든 내 장애가 미워진다.

언젠가는 죽어 흩어질 몸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나의 부재로 슬퍼하며 이 험난한 세상에 남겨질 딸아이를 생각하면 가슴이 에이는 듯하다. 살아온 날 만큼 살아갈 날이 많은 내가 이런 마음인데 부모님의 마음은 어떠하실까?

온전치 못한 딸을 보며 그 아이를 두고 먼저 가야할 발걸음이 얼마나 무거우실까? 아무것도 해드리지 못했는데 가시는 그 마음마저 편하게 해드리지 못한다는 생각에 내 장애가 너무 싫어진다.

억울했었다. 왜 나냐고 수천번을 하늘에게 물었었다.

나는 세상을 볼 수 없는데도 변함없는 세상이 싫었었다.

그래도 살아야 한다고 부모님은 말씀하셨다. 그래서 살았고 이제 억울하다 생각하지 않고 다시 살게 해주신 부모님께 감사하며 살아가는데 부모님의 아픔은 변함이 없어서 그게 또 마음 아프다. 그 아픔과 걱정을 덜어드리려고 해도 내 장애가 사라지지 않듯이 부모님의 마음에 난 생채기는 완전히 아물지 못할 것이다.

장애는 한 사람의 신체적 기능을 손상시킴으로서 그 사람의 삶을 바꾸어 버렸다.

그러나 장애는 당사자 뿐 아니라 그 가족들의 마음에도 영구적인 손상을 준 셈이다.

자식의 효가 아무리 지극하다 하여도 부모의 내리사랑만 할까?

이 세상 모든 부모의 내리사랑에 더하고 덜함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장애를 가진 자식에 대한 내리사랑에는 지워지지 않는 아픔과 안쓰러움이 덧대어 있음을 장애를 가진 자식으로 그리고 부모가 되어서야 비로소 가늠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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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미 칼럼니스트 9년 전 첫아이가 3개월이 되었을 무렵 질병으로 하루아침에 빛도 느끼지 못하는 시각장애인이 되었다. 상자 속에 갇힌 듯한 공포와 두려움 속에서 나를 바라볼 딸아이의 모습을 떠올리며 삐에로 엄마가 되었다. 그러나 언제까지나 삐에로 엄마로 살 수는 없었다. 그것이 지워지는 가짜라는 걸 딸아이가 알게 될테니 말이다. 더디고 힘들었지만 삐에로 분장을 지우고 밝고 당당한 엄마로 아이와 함께 세상 밖으로 나왔다. 다시 대학에 들어가 공부를 하고 초중고교의 장애공감교육 강사로 활동하기 시작했고 2019년 직장내장애인식개선 강사로 공공 및 민간 기업의 의뢰를 받아 교육강사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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