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년전쯤 유치원에 다녀온 7살 된 딸아이가 저녁밥을 먹다가 대뜸 “엄마, 장애인이 뭐야?”하고 물었다. 아이의 느닷없는 질문에 남편도 나도 몇 초간 아무 말도 못했다.

그 몇 초 사이에 남편은 어떤 생각을 했는지 알 수는 없지만 나는 딸아이가 밖에서 엄마에 대해 무슨 말을 들은 건지 아니면 친구들한테 무슨 말이라도 들었나 싶어서 심장이 ‘쿵’하고 내려앉는 느낌이었다.

그러나 아이에게 “그건 왜 묻니?” 하고 애써 태연하게 물었고 아이는 아무렇지 않게 유치원에서 장애인에 대해 배웠다고 했다. 내려앉은 내 심장이 제자리로 돌아오기가 무섭게 남편이 말했다.

“유치원 아이들한테 왜 벌써 그런 걸 가르치지?”

제자리로 돌아오던 심장은 더 큰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남편의 말 중 ‘그러 걸’이라는 말은 결코 좋은 뜻이 아니었다. 중증 시각장애가 있는 아내와 살고 있는 남편조차 장애인이라는 말에 부정적이고 안 좋은 거라는 인식이 박혀있는 것이었다.

그날 딸아이와 장애인에 대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처음으로 “엄마는 시각장애인이란다”하고 말해주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아이에게 ‘엄마는 앞을 볼 수가 없단다.’고 말해줬을 뿐 나 스스로 ‘시각장애인’이라고 말해준적이 없었다.

그리고 비장애인들에게도 시각장애인이라는 말 대신 ‘시각에 장애가 있어서’라든지 아니면 ‘제가 앞을 전혀 보지 못해서요.’하고 내 상태를 설명 했었다. 어쩌면 내가 비장애인일 때 장애인에 대한 불편하고 부정적인 감정들이 내 무의식 속에 잠재되어 있어서 장애인이라는 말을 회피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비장애인일 때 내가 본 장애인은 지하철 계단이나 육교 위 차가운 바닥에서 구걸을 하거나 재래시장이나 지하철 안에서 불편한 몸을 이끌고 물건을 파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들을 볼 때면 측은한 마음에 주머니 속 동전을 털어주거나 일부러 물건을 사주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들에게 측은한 마음이 들면서도 나와 다른 그들의 모습과 행동에 이질감을 느끼기도 하였다. 그리고 그들을 그냥 지나쳐갈 때면 돕지 않는 내가 비도덕적이고 나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였다.

장애인에게 어떤 해코지를 당한 적도 없었고 내 일상에 아무런 해를 끼치지도 않았지만 장애인이라는 존재는 그냥 마음을 불편하게 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일까? 나는 지금 장애인이고 장애인으로 불리지만 나 스스로 장애인이라는 불편한 존재가 되기는 싫었나보다.

나는 장애라는 단어도 썩 내키지 않는다. 장애의 한자어를 살펴보면 ‘막을 장(障)’자에 ‘꺼릴 애(礙)’자를 쓰고 있는데 결국 ‘장애’라는 것은 ‘나아가려는 것을 방해하는 꺼려지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단어를 ‘사람인(人)’자와 결합시켜 만든 ‘장애인’이라는 단어는 어찌 풀이하느냐에 따라 의미를 달리할 수도 있는 것이다. 장애가 되는 물건을 흔히 ‘장애물’이라고 하듯이 장애인도 잘못 풀이하면 ‘장애가 있는 사람’이 아니라 ‘장애가 되는 사람’으로 사회에서 불필요하고 꺼려지는 사람을 의미하게 된다.

결국 부정적 의미를 담고 있는 ‘장애’라는 글자와 장애인을 보며 느꼈던 이질적이고 불편한 마음 때문에 ‘장애인’이라는 말을 더더욱 회피하게 되는 것 같다.

7살이었던 딸아이는 이제 초등학생이 되었다.

며칠 전 딸아이가 새로 다니게 된 학원에 갔다가 평소 딸아이와 친하게 지낸다는 친구를 만나게 되었다. 나는 그 친구의 눈높이에 맞춰 두 손을 맞잡고 말했다.

“안녕, 나는 아현이 엄마란다. 아줌마는 앞을 볼 수 없어서 이렇게 너를 만져봐야 널 알 수 있단다.”

내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딸아이는 두 팔로 내목을 끌어안으며 “우리 엄마는 시각장애인이야.”하고 말했다.

그날도 나는 무의식적으로 ‘장애인’이라는 말을 회피했던 것이다. 그리고 너무나도 당당하고 밝게 ‘장애인’이라는 말로 나를 설명하는 딸아이를 보며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여러 가지 생각과 감정이 스쳐지나갔다.

‘친구에게 엄마가 장애인이라고 말하면 부끄럽지 않을까?’, ‘딸아이에게는 내가 보지 못한다는 사실도 장애인으로 불리는 것도 정말 아무렇지 않은 것일까?’ 당혹스러우면서도 엄마의 장애를 부끄러워하지 않고 당당하게 이야기하는 딸아이가 기특하고 뿌듯했다.

딸아이의 ‘장애’라는 말 속에는 남편과 같은 장애인에 대한 부정적 인식도 나처럼 불편한 마음도 담겨있지 않았다. 딸아이에게 ‘시각장애인’은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이라는 의미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던 것이다.

지금 돌이켜보면 우리는 초중고 교육을 받으면서 한 번도 장애인에 대해 제대로 배운 적이 없었다. 어린 시절에는 장애인을 보고 엄마에게 “저 사람은 왜 저래?”하고 물으면 “장애인이야”하고 한마디로 끝이었고 조금 커서는 얼핏 장애인이라는 말이 나오기는 했지만 입시에 중요하지 않았으므로 그냥 넘어갔다.

아무도 장애가 무엇인지 왜 장애인이 되는 건지 가르쳐주지 않았고 그들도 처음부터 장애인은 아니었다고 우리와 생활하는 방식이 다를 뿐 다른 모든 것은 우리와 같다고 말해주지 않았다.

그래서 장애인은 본래 우리와 다르게 태어난 사람이라고 생각했고 내 눈에 비친 모습으로 장애인의 삶을 단정 짓고 불쌍한 사람이라고만 생각했다.

수십 년을 그렇게 알고 살아온 우리는 아내가 장애인이고 자신이 장애인이 되어서야 장애인에 대해 알게 되었다. 그러나 우리가 알고 이해하는 것은 머리로 이성으로만 받아들였을 뿐 장애인에 대한 편견과 선입견은 우리 어딘가 무의식 속에 잠재되어 있었던 것이다.

딸아이가 장애와 장애인에 대해 아무런 거부감 없이 말할 수 있었던 것은 유치원에서 장애인식교육을 통해 장애인에 대해 알게 되었고 배운 것과 자신이 엄마와 생활하면서 경험한 것들을 비추어볼 때 장애인은 그저 신체적으로 불편한 것뿐이라는 사실을 그대로 이해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장애인식교육을 유치원이나 학교 학생들을 대상으로 진행하는 것은 현재 사회 기성세대로부터는 바람직한 장애인식을 기대하기 어렵기 때문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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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미 칼럼니스트 9년 전 첫아이가 3개월이 되었을 무렵 질병으로 하루아침에 빛도 느끼지 못하는 시각장애인이 되었다. 상자 속에 갇힌 듯한 공포와 두려움 속에서 나를 바라볼 딸아이의 모습을 떠올리며 삐에로 엄마가 되었다. 그러나 언제까지나 삐에로 엄마로 살 수는 없었다. 그것이 지워지는 가짜라는 걸 딸아이가 알게 될테니 말이다. 더디고 힘들었지만 삐에로 분장을 지우고 밝고 당당한 엄마로 아이와 함께 세상 밖으로 나왔다. 다시 대학에 들어가 공부를 하고 초중고교의 장애공감교육 강사로 활동하기 시작했고 2019년 직장내장애인식개선 강사로 공공 및 민간 기업의 의뢰를 받아 교육강사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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