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존감이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자존감은 자기 자신을 존중하는 마음 즉, 자아 존중감을 일컫는 단어로 자존감은 자신의 행동이나 결과에 대한 성취감, 타인으로부터의 인정이나 칭찬에 의해 형성되고 높아진다.

가령 자격증을 취득하거나 원하는 대학에 진학했을 때, 직장상사로부터 칭찬을 받거나 좋은 평가를 받았을 때 자존감은 높아진다. 그러나 자존감이 제일 처음 형성되기 시작하는 시기는 영유아기 때부터이다.

혼자서는 아무것도 못하고 주양육자의 돌봄에만 의존하던 아기가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고 혼자 걷기 시작하면서 성취감을 느끼고 자신의 행동을 보며 좋아하고 칭찬하는 가족들의 반응에 자신이 뭔가를 할 수 있는 존재, 대견한 존재로 인식하며 자존감을 갖게 된다.

즉 우리의 자존감은 자조능력이 생기기 시작하는 순간부터 우리 마음에 내재되는 것이다. 이렇게 내재된 자존감은 성장과정을 거치면서 더욱 높아지기도 하고 낮아지기도 한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갑작스런 장애는 이러한 기본적인 자조능력을 일부 또는 상당 부분 수행할 수 없게 함에 따라 자존감도 낮아지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5년 전 갑자기 세상을 보지 못하게 되었을 때 나는 정체성 혼란과 함께 자존감을 잃어갔다. 비장애인일 때 누구보다 독립적이고 자주적인 삶을 살았던 나는 당연하게 해오던 일상을 혼자서 하지 못하고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만 한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싫었다.

그것도 남은 평생을 가족이나 누군가에게 의존하며 살아야한다는 사실이 끔찍했다. 그래서인지 누군가의 도움을 나에 대한 동정심이라 여기며 거부하였고 누군가 나에게 어떤 것을 부탁하면 “아무것도 보지 못하는 내게 너무한 것 아니냐”며 상대방에게 화를 내곤했다. 나는 자존감을 상실하면서 자존심을 내세워 나의 상황과 입장을 관철시키려고 했던 것이다.

자존감과 자존심은 얼핏 보면 비슷한 의미를 담고 있는 것 같지만 내포된 의미에는 상당히 큰 차이가 있는 것 같다. 자존감은 자신을 직시하여 수용하면서 자신 스스로가 자신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마음가짐이라면 자존심은 자기수용이 결여되어 있으면서 타인으로부터 자신이 인정받고 존중받으려는 마음이 아닐까 생각한다.

당시 자존감을 회복하겠다는 어떤 목적의식이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나는 내 장애를 받아들이고 도움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 조금씩 변해갔던 것 같다. 기초자립재활교육을 통해 보행과 점자를 배우기 시작하면서 혼자서도 할 수 있음에 자신감이 생겼고 나 자신이 대견스러웠다.

장애를 가지면서 모든 일상을 포기하며 지내던 나는 더듬거리며 집안일을 하나하나 하기 시작했다. 장애를 가진 이후 제일 처음 한 음식이 죽이었다. 갑자기 탈이 난 애기아빠는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아파했는데 밖에 나가 약을 사다줄 수도 없고 그렇다고 넋 놓고 지켜볼 수도 없었다.

정안인일 때 내가 해준 야채죽을 좋아했던 남편에게 죽을 해줘야겠다는 생각으로 주방에 섰을 때 막상 칼을 쓰고 불을 사용해야 한다는 사실에 전맹인 나는 두렵고 무서웠다. 하지만 내안 어디선가 ‘넌 할 수 있어. 한 번 해봐’라는 울림이 들렸고 나는 그 말을 믿었다.

그리고 나는 야채죽을 완성했다. 비록 시간은 엄청 많이 걸렸고 주방은 엉망진창이 되었지만 오로지 나 혼자의 힘으로 해냈다는 사실에 대단한 성취감을 느꼈다. 남편은 내가 음식을 했다는 사실에 놀라워하면서도 맛있다며 한 그릇을 깨끗이 비우고 잠이 들었고 한결 좋아진 상태로 깨어났다.

장애인의 삶을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살지 못하는 삶 그래서 가족에게 짐 밖에 안되는 존재가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나도 가족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이 기뻤다.

그날을 계기로 내가 할 수 없을 거라 생각했던 것들에 대해 미리 포기하지 않고 도전하였고 서툴면 반복하고 부족하면 연습하다보니 나의 자조능력은 자연스레 향상되었고 그에 따라 자존감도 회복되어 갔다. 그리고 어느 순간 내가 많이 변하고 달라졌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중증 시각장애인이고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외부활동을 전혀 할 수 없다. 그러나 나 뿐 아니라 이 사회를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은 자신이 지각하지 못할 뿐 직간접적으로 누군가의 도움을 받으며 살아간다.

다만 신체적 불편함으로 도움을 받는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그것을 부끄러워하거나 수치스러워 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장애가 있다고 도움 받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며 그것을 장애인의 권리인 양 행동해서도 안된다고 생각한다.

비장애인에게는 너무나도 평범하고 당연한 일상이지만 우리에게는 노력하고 도전해야하는 일상이기에 힘들고 지쳐 포기하고 싶어지기도 한다. 그럴 때면 나는 걸음마를 시작하는 아기를 떠올려본다.

한걸음을 때기위해 아기는 얼마나 많이 엉덩방아를 찧고 주저앉아야 했을까? 아기가 힘들다고 주저앉아 버린다면 아무리 옆에서 일으켜 세워줘도 걷지 못할 것이다. 아기가 겨우 한걸음 두걸음 걷고도 환하게 웃을 수 있는 것은 수차례 엉덩방아를 찧고 쓰러져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아무런 어려움 없이 일상을 살아오던 우리는 자신의 장애에 맞춰 새로운 생활방식을 배우고 익혀야하는 아기와 같다. 아기가 그렇듯 장애를 가진 우리는 예전에 비해 모든 것이 서툴고 부족하다. 하지만 ‘장애가 있으니까…’ 하는 생각으로 모든 것을 미리 포기하고 주저앉지는 말았으면 좋겠다.

겨우 한걸음을 걷기 위해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이 넘어지고 부딪혀야 하겠지만 넘어지고 쓰러진 만큼 성취감과 자존감은 더 커지고 높아질 것이다. 아기가 위험할 때 엄마가 손을 뻗어 잡아주듯이 힘들고 지칠 때는 손 내밀어 잡아달라고 부탁하고 아기가 비틀거리며 흔들릴 때 벽을 짚고 버티는 것처럼 숨이 차고 버거울 때는 잠시 쉬어가도 될 것이다. 그렇게 가다보면 언젠가는 두걸음을 걸으며 웃는 내 모습을 보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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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미 칼럼니스트 9년 전 첫아이가 3개월이 되었을 무렵 질병으로 하루아침에 빛도 느끼지 못하는 시각장애인이 되었다. 상자 속에 갇힌 듯한 공포와 두려움 속에서 나를 바라볼 딸아이의 모습을 떠올리며 삐에로 엄마가 되었다. 그러나 언제까지나 삐에로 엄마로 살 수는 없었다. 그것이 지워지는 가짜라는 걸 딸아이가 알게 될테니 말이다. 더디고 힘들었지만 삐에로 분장을 지우고 밝고 당당한 엄마로 아이와 함께 세상 밖으로 나왔다. 다시 대학에 들어가 공부를 하고 초중고교의 장애공감교육 강사로 활동하기 시작했고 2019년 직장내장애인식개선 강사로 공공 및 민간 기업의 의뢰를 받아 교육강사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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