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나이 마흔셋, 이 나이까지 살아오면서 가장 처절하게 반복적으로 장기간 치열하게 싸웠던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은 바로 남편이다. 10년이 넘게 연애를 하면서 누구보다 그 사람을 잘 안다고 생각했고 긴 연애 기간 동안 마냥 행복하고 좋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조금씩 맞춰 살아간다면 소설이나 영화에 나오는 그런 이상적인 부부까지는 아니더라도 고만고만 알콩달콩 살 꺼라 생각하고 결혼을 했다.

하지만 우리 신혼집의 깨소금은 너무 오래되었는지 고소한 냄새는 온데간데없었고 누군가와 맞춰 살아간다는 것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힘들고 버거웠다. 하물며 급기야는 남편에게 배신감마저 느꼈다. 사실 특별히 나를 속이거나 거짓을 말한 적도 없었고 ‘나는 이런 사람이야’ 하고 나를 세뇌시킨 것도 아니였지만 나는 왠지 연애한 10년 동안 속아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배신감과 기대에 미치지 못함에 대한 실망감은 사소한 것에 들러붙어 곧잘 말싸움으로 이어지기 일쑤였다.

30년을 넘게 다른 환경에서 생활했고 집집마다 가정 분위기나 생활패턴이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고 이해는 하지만 그래도 이제 우리의 가정이 생겼으니 우리의 생활 규칙과 방식을 만들어가야 하는데 남편의 생활방식은 요지부동이었다. 기본적인 생활습관도 엉망이었고 아들이라고 귀하게 키우셨는지 모든 행동이 수동적이라 시키는 것에 대해서만 내 잔소리 포화를 막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어기적거리며 할 뿐이었다. 그런 행동에 화가 나서 잔소리를 하면 거기서부터 또 싸움이 시작되곤 했다.

어르고 달래도 보았고, 설명하고 설득도 해보았고, 화가 나서 며칠 동안 말도 안해 보았고, 울면서 하소연도 해보았다. 정말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 보았지만 남편의 행동은 뱅뱅 도는 팽이 같았다. 더 화가 나는 것은 본인이 잘못을 인정하고 고쳐보겠다고 약속을 해놓고서도 똑같은 행동과 실수를 반복한다는 사실이었다.

그런 남편의 모습을 보면서 고치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다고 생각했고 진정성도 없어보였다.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는 속담처럼 남편의 잘못된 습관들은 좀처럼 고쳐지지 않았지만 그래도 2-3년간의 치열한 사투 끝에 얻은 것이 있었는데 그전에는 자신의 행동이 잘못되었다는 인식조차 하지 못했다면 나중에는 습관처럼 행동은 하더라도 그것이 잘못된 행동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게 되었다는 점이었다. 그러면서 남편과 나는 조금씩 맞춰가며 변하기 시작한 것 같다.

습관이 고치기 어렵다는 사실은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사실이다. 오랜 시간 반복적으로 한 행동이 자연스레 몸에 익으면서 어느 순간에는 무의식적으로 행동하게 되는데 습관이 좋은 것일 때에는 괜찮지만 잘못된 습관은 자신 뿐 아니라 타인에게까지 피해나 불쾌감을 주기도 한다. 습관이 행동의 반복적 경험에 의해 형성되었다면 인식은 생각의 반복적 학습이나 경험에 의해 형성된다고 생각한다. 누가 특별히 가르치거나 주입시키지는 않았지만 일상생활에서 보고 듣고 경험하며 머릿속에 내재되었기 때문에 인식도 습관처럼 좀처럼 바꾸기가 어려운 것은 아닐까?

그런 면에서 비장애인의 장애인식은 아직 갈 길이 멀고 험하다. 예전에 비해 장애인식이 많이 좋아졌다고 하지만 비장애인의 말과 행동에서 장애인에 대해 잘못된 인식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가령 장애인을 무조건 지적, 정신적으로 이상이 있는 것처럼 대하는 사람도 있고 장애인을 피해의식과 열등의식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 그리고 장애인은 혼자서는 아무것도 못하는 사람으로 생각하는 비장애인들이 부지기수이다.

장애인에 대한 인식은 수 세기 전부터 수세기 동안 비뚤어진 오해와 편견으로 사람들의 말과 행동을 통해 세대에서 세대로 이어져왔다. 과거 장애를 낙인으로 간주하고 가족에게 조차 수치스럽고 부끄러운 존재로 사회에서는 무가치하고 거추장스러운 존재로 시설에 수용되어 생활했으며 이런 삶을 장애인 스스로 당연한 운명처럼 받아들이고 살아왔다.

우리나라의 경우 80년대 후반부터 장애인 인권과 장애인 복지가 제도화되기 시작했지만 사람들의 장애인식은 습관처럼 좀처럼 바뀌지 않았다. 장애인으로 살아가는 우리는 기껏 수십 년 동안 살다가지만 사람들의 머릿속에 내재된 장애인식은 수 세기 전부터 뿌리 깊이 박혀 내려왔으니 현재의 우리에게는 부당하고 억울하다 하더라도 그들을 한순간에 변화시키는 것은 무리일 것이다.

그러나 습관도 인식도 변화할 수는 있다. 내 남편의 잘못된 습관을 고치기 위해 나나 내 남편은 한때 무수히 싸우고 힘겨운 시간을 보내야했지만 그 과정이 없었다면 지금 우리는 함께하지 못했을 것이다.

장애인식은 비장애인의 머릿속에 들어있지만 그것을 바꿔줘야 하는 것은 우리의 몫이다. 비장애인이 아무리 공감하고 이해한다고 해도 그들은 장애인이 아니며 장애인으로 살아가며 느끼는 다양한 정서적 감정까지는 속속들이 알 수는 없다.

장애에 대한 편견을 벗고, 다름을 인정하고, 공동체의 일원으로 배려하고 함께해야 한다며 장애인식개선 교육이나 프로그램이 진행되고 있으며 이러한 노력들이 장애인식개선에 도움이 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말보다 행동이라는 말처럼 우리 스스로 비장애인의 삶과 다른 우리의 삶을 직접 보여주면서 우리의 삶도 또 다른 삶의 방식임을 일깨우고 비장애인의 일방적인 배려가 아닌 우리가 원하는 진정한 배려가 무엇인지 알리고 사회공동체의 일원으로 지역사회와 국가에 공헌하기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당당하게 요구해야 한다.

이러한 일들은 비단 한두명의 장애인만으로는 일시적이고 한정적일 수밖에 없다. 우리가 세상 밖으로 내딛는 발 한걸음, 작은 몸짓 하나하나가 당장은 보잘 것 없고 무의미하게 느껴질지도 모른다. 그러나 당장은 아니더라도 이러한 작은 행동들이 세월에 따라 쌓이고 쌓이다보면 수십 년 혹은 수 세기 뒤의 장애인들은 ‘장애인 편견’이나 ‘장애인인식개선’이라는 단어가 사라진 사회에서 평범하게 일상을 살아갈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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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미 칼럼니스트 9년 전 첫아이가 3개월이 되었을 무렵 질병으로 하루아침에 빛도 느끼지 못하는 시각장애인이 되었다. 상자 속에 갇힌 듯한 공포와 두려움 속에서 나를 바라볼 딸아이의 모습을 떠올리며 삐에로 엄마가 되었다. 그러나 언제까지나 삐에로 엄마로 살 수는 없었다. 그것이 지워지는 가짜라는 걸 딸아이가 알게 될테니 말이다. 더디고 힘들었지만 삐에로 분장을 지우고 밝고 당당한 엄마로 아이와 함께 세상 밖으로 나왔다. 다시 대학에 들어가 공부를 하고 초중고교의 장애공감교육 강사로 활동하기 시작했고 2019년 직장내장애인식개선 강사로 공공 및 민간 기업의 의뢰를 받아 교육강사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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