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물이 새로 들어서고 도로가 새로 나면 이전은 어땠는지 기억조차 가물가물할 때가 있습니다. 사람도 그런 것 같습니다. 오랜만에 만나면 어색하고 궁색합니다. 오래 만나지 못하면 추억 속에 머물다가, 사라지고 없는 옛 건물처럼 잊히죠.

요즘 좀 바빠서요, 요새 몸이 좋지 않아요, 가까우면 자주 찾아갈 건데, 늙은이가 가면 짐만 되지. 바빠서, 아파서, 멀어서, 나이 들어서, 아직 어려서… 부모형제, 친구, 이웃과 함께하는 시간을 누가 자꾸 훔쳐갑니다.

시설 입주자의 형편도 비슷합니다. 장애가 있고, 장애인시설에 사는 처지가 얼마 안 되는 시간마저 모조리 빼앗는 건 아닌가 싶습니다. 시설에 살아도 여느 사람들 소식하고 왕래하는 정도로 오가면 좋겠는데.

갈 형편 아니면 오게 하고 올 형편 아니면 찾아 가고, 아프니까 오게 하고 아프니까 가서 보고, 언제 또 볼까 해서 만나고 언제까지 기다려 줄까 해서 만나고. 바쁜 거 지나면, 날이 좀 좋아지면, 아픈 거 좀 나으면 만나겠다는데 그때가 언제일지, 기약 없이 기다리지 말고 지금 만나면 좋겠습니다.

바쁜 사정, 아픈 사정, 거리 사정, 나이 사정… 이때는 사정 봐주지 말고 지금 연락하고, 지금 만나고, 지금! 함께하게 주선하기 바랍니다.

1

어머니가 수술 앞두고 전화했다. 내일 입원해서 모레 수술한다.

“내가 수술하게 되었어요. 하도 다리가 아파서 수술하는데, 인철(가명)이한테 말 좀 해 주세요. 설에 집에 온다는데 그때까지 기다릴 수가 없어서 수술을 해요.”

아픈 다리보다 집에 올 아들을 더 걱정한다. 수술하고 안정되었겠다 싶어서 연락드렸더니 한쪽 다리도 마저 수술한단다.

“수술은 잘 됐다는데 아직 잘 모르겠어요. 수요일에 다른 다리도 한다고 하네요. 내가 이렇게 아프니…, 아이고 안 되겠어요. 인철이가 설에 오기는 어렵겠어요.”

작년처럼 아버지 생신에는, 추석에는 갈 수 있을지 물었다.

“저 아버지도 병원에 있으니….” 「2017년 1월 15일 일지, 최희자. 발췌 편집」

인철 씨 아버지는 작년에 요양병원에 입원해서 여태 병원 신세를 지고 있습니다. 어머니는 엉덩이에 종기가 나서 제대로 앉지도 눕지도 못해 남의 손 빌려 집안일을 했습니다. 그 무렵 아버지가 요양병원에 입원했고요. 이제 무릎까지 말썽입니다. 두 분, 언제까지 병원 신세를 질지 끝은 있을지 막막합니다.

인철 씨는 작년 아버지 생신 즈음 부모님 댁에 다녀왔습니다. 집에서 어머니 뵙고 병원 가서 아버지 뵈었죠. 이번에도 어머니 수술 소식 듣고 당장 찾아뵈면 좋겠는데, 어머니는 어쩐 일로 아들이 오는 걸 말렸습니다. 설에도 오지 말라고 했습니다. 평상시에는 뜸해도 아프면 오가는 게 가족인데, 어쩐 일로 오지 말라는지 어머니 마음을 다 알 수는 없습니다.

명절 지나 한산할 때, 어머니 찾아뵙고 인사드릴 겁니다. 아버지 병문안도 하고요. 아버지 어머니 병원 신세도 남은 생도 기약 없으니 오히려 더 자주 찾아봬야죠. 어머니는 기어이 말리겠지만, 어머니 한숨 돌리면 간곡히 부탁드리겠습니다.

2

경아(가명) 씨 어머니는 명절마다 딸 집, 월평빌라 307호에 꼭 다녀갔습니다. 10년째 그랬습니다. 이번에도 꼭 오겠다고 딸에게 직접 말했고, 직원도 그리 설명했습니다. 경아 씨가 알아듣는지 모르겠지만, 어머니 목소리 들을 때나 어머니 이야기에 눈동자를 고정하고 주시하는 걸 보면 알아듣는 것 같습니다.

경아 씨에게 설명하고 어머니 선물까지 준비했습니다. 그런데 추석 코앞에 무슨 사정이 생겼는지 어머니가 못 온다고 했습니다.

“어머니, 경아 씨와 병원에 왔어요. 지난주 처방받은 약 다 먹어서 왔는데, 온 김에 피 검사하고 엑스레이 찍자 하네요.

어머니, 결과 나왔어요. 폐도 괜찮고 체내 염증도 없다고 하네요. 밤에 가래가 많다고 말씀드리니, 지난주부터 먹던 약을 추석 연휴 동안에 계속 먹자고 했어요. 다행입니다.

걱정하지 마시고 추석 잘 보내세요. 추석 다음날 어머니 오실지도 모른다고 따님에게 이야기했어요.” 「2016년 9월 13일 일지, 최희정. 발췌 편집」

추석 연휴 전, 약 타고 진료도 받을 겸 병원에 들렀을 때는 아주 좋았습니다. 그런데 하루 상간에 일이 났습니다. 잘 지내던 경아 씨가 열이 오르고 가래가 끓고 호흡이 자주 가빴습니다. 추석 전날, 응급실에 갔고 그 길로 입원했습니다.

딸이 입원했다는 소식에 어머니는 한걸음에 왔습니다. 혼자 오지 않고 경아 씨 이모들과 같이 왔습니다. 어머니가 오고 한나절 만에 거짓말처럼 열이 내리고 안정되었습니다.

경아 씨가 어머니를 부른 겁니다. 경아 씨는 말을 못 합니다. 손가락조차 움직이기 어렵습니다. 그러니 온 몸을 흔들어 열을 내고 끙끙 앓으며 어머니를 부른 겁니다. 그렇게 생각합니다.

“어머니, 딸 걱정에 한걸음에 오셨죠. 와서 얼굴 봐야 안심하고, 안 보면 걱정하고 또 궁금해 하시잖아요. 따님도 어머니 마음 알 거예요. 어머니 보고 싶으면 어떻게든 부르고, 그러면 언제든지 이렇게 달려오시잖아요.

미안하다 하지 마시고 자주 목소리 들려주고 얼굴 보여 주세요. 따님에게 지금 필요한 건 그게 아닐까 싶어요.” 「2016년 9월 19일 일지, 최희정. 발췌 편집」

3

경아 씨 큰 동생에게 보낸 문자 : 이제 봄이 오나 봐요. 날이 풀리니 경아 씨 컨디션도 조금씩 나아져요. 겨울보다는 기침을 덜하고요. 잘 지내시죠? 언니가 동생 안부 궁금해 하겠다 싶어서 연락드려요.

경아 씨 큰 동생의 답장 : 안녕하세요? 위관 교체한다는 이야기를 엄마에게 들었는데, 교체했나요? 기침이 줄었다니 다행이네요. 옛날에 언니랑 비토섬 놀러 갔던 게 요즘 많이 생각나요. 언니가 깨어날 수 있다면 같이 여행 다니고 싶네요.

동생이 보낸 문자를 경아 씨에게 천천히 읽어주었다. 경아 씨는 가만히 듣고 있다. 아, 동생 마음이 이랬구나. 먹먹하다. 가족의 심정은 감히 헤아릴 수 없다.

큰 동생에게 보낸 문자 : 언니도 같은 마음일 거예요. 언니한테 문자 읽어줬어요. 가만히 듣고 있네요. 언니와 갔던 비토섬, 다시 갈 수 있으면 좋겠네요. 위관은 지난주에 교체했어요. 부모님 오셔서 같이 갔어요. 「2016년 3월 22일 일지, 최희정. 발췌 편집」

비토섬에 갈까요? 경희 씨 집에서, 고향에서 멀지 않네요. 비용이 얼마가 들든, 사람이 얼마나 필요하든 그게 문제겠어요? 갑시다. 언니 깨어나면 간다 했는데, 경아 씨 형편 잘 알잖아요. 경아 씨 떠나면 그때는 뭐라 할까….

그래서 여행을 계획했는데 며칠 앞두고 사정이 생겨 미뤘습니다. 올해는 꼭 가기 바랍니다. <토끼와 거북이>의 무대 비토섬에서 언니와 동생이 경주하는 꿈을 꿉니다.

4

어진(가명)이 동생 재균(가명)이한테 문자가 왔다.

‘선생님, 저 재균이에요. 내일 누나한테 놀러 갈 건데, 저 데리러 집에 올 수 있어요? 10시쯤 오시면 좋겠어요.’

재균이를 데리러 어진이 부모님 댁에 갔다. 재균이와 다른 아이 한 명이 더 있었다.

“넌 누구니? 재균이랑 많이 닮았네.”

“사촌 동생이에요. 태희(가명) 누나 동생 태균(가명)이요.”

“아, 이종사촌이구나. 그런데 너희 둘 정말 많이 닮았다.”

“네, 남들도 그래요.”

재균이와 태균이가 누나 보러 누나 집, 월평빌라에 왔다. 고등학생 태희는 공부하느라 못 왔다. 어진이가 두 동생을 보고 좋아서 어쩔 줄 모른다. 휠체어에 앉아 몸을 흔들고 소리를 지르는데, 곧 넘어갈 기세다.

친동생 재균이는 물론 이종사촌 태균이도 어릴 때부터 어진이와 함께 자라서 누나가 무얼 좋아하는지 잘 안다. 누나에게 최신형 묵찌빠를 가르쳐 주고, 누나가 예전에 즐겨 봤던 만화 영화 줄거리를 알려줬다. 어진이는 기억나는지 간간이 까무러치도록 좋아했다. 「2014년 8월 16일 일지, 임경주. 발췌 편집」

어진이가 열다섯 살에 월평빌라에 입주했고, 그때 재균이는 열 살이었습니다. 어진이가 월평빌라 입주할 때 중학생이던 오빠가 벌써 군대에 갔으니, 동생 재균이도 금방일 겁니다.

지금처럼 오갈 날이 얼마나 될까요? 곧 고등학교 대학교 진학하고 직장 다니겠죠. 지금처럼 가까이서 왕래하기 쉽지 않을 겁니다. 동생은 몸도 마음도 자라는데, 누나는 스물 살에 여전히 ‘디지몬’을 찾습니다. 지금처럼 허물없이 대하기 쉽지 않을 겁니다.

그래서 더 욕심이 납니다. 하루라도 더 만나고 한시라도 더 붙어있게 하고 싶습니다. 묵찌빠 가르쳐 주고, 만화 영화 이야기할 날이 얼마나 될까 생각하면, 한때라도 더 만나게 하고 싶습니다.

시설에 부모형제 둔 심정을 헤아리기 어렵습니다. 집집마다 그만한 형편과 사정이 있고요. 그럼에도 주말, 방학, 졸업, 생일, 기일, 출산, 입원, 초상, 명절… 일마다 때마다 소식하고 왕래하기 바랍니다. 장애가 있어도, 시설에 살아도 말입니다. 가족에게 잊히는 존재가 되는 게 두렵습니다.

시설에서 잘 돕는다며 부모형제, 친구, 이웃의 손길 거두고 그들의 몫을 빼앗는 도둑이 될까 두렵습니다. 부모형제, 친구, 이웃에게 잊히는 존재가 되도록 방조하는 꼴이 될까 두렵습니다.

지금, 미루지 말고! 지금 소식하고 지금 만나게 주선하고 거들고 싶습니다.

* 월평빌라 최희자 최희정 임경주 선생님의 말과 글을 정리했습니다.

-장애인 곁을 든든하게 지켜주는 대안언론 에이블뉴스(ablenews.co.kr)-

-에이블뉴스 기사 제보 및 보도자료 발송 ablenews@ablenews.co.kr-

박시현 칼럼리스트 ‘월평빌라’에서 일하는 사회사업가. 대학에서 사회복지를 전공하고 줄곧 사회복지 현장에 있다. 장애인복지시설 사회사업가가 일하는 이야기, 장애인거주시설 입주 장애인이 사는 이야기를 나누고자 한다.
저작권자 © 에이블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