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어릴 적에 동네에 쪼매 거시기한(?) 행님이 한 분 계셨는데, 우리 마을 골목대장이었습니다.

고만고만한 것들끼리 대장자리를 놓고 핏대 세워가며 싸우다가도 일단 그 행님이 납시면 일동 ‘얼음’, 부동자세로 경의를 표하며 행님의 그림자가 먼발치로 멀어질 때 즈음에서야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스스로에게 ‘땡’을 치며 해동이 되어 세우다 만 핏대를 다시 세우곤 했었지요.

마을 어르신들은 그 행님이 어릴 적부터 머리가 비상해 공부를 어마무시 잘했고, 커서는 체대에 진학해 운동선수(혹은 체육선생님)가 되려고 했다는데, 어찌되었든 결론은 마을 중앙에 있던 큰 포구나무에 올라갔다 그만 떨어져 머리를 다쳤다는 것이었습니다.

행님의 무용담을 듣고 자란 우리들은 행님의 어눌한 말투와 흐느적거리는 걸음걸이조차 존경의 대상이었으니, 먼발치서부터 엄청난 후광을 발하며 다가오는 행님을 향해 일동 부동자세로 경의를 표하는 것은 어쩌면 숨 쉬는 것만큼 자연스러운 일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어릴 적 저희 가정은 증조할머니, 그냥 할머니, 부모님, 저와 동생 이렇게 4대가 함께 모여 살았습니다. 그땐 4대가 모여 사는 것이 그다지 놀라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다보니 홀로계시는 동네 할매들(할머니들) 집에 반찬이며 과일이며 바리바리 싸들고 놀러 다니는 것은 예사였지요.

지금도 또렷이 기억하는 한 어르신이 있습니다. 여느 할머니와 다르게 머리가 많이 벗겨지고, 이도 시원찮아 늘 잇몸을 쩝쩝거리며 다니셨는데도 말씀은 또 얼마나 청산유수인지, 특별히 동네 사람들 뒷담화까기나 이간질 시키는 데는 정말이지 탁원한 재능이 있으셨던 분이셨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그런 할머니를 ‘씹제이 할매~’라 불렀습니다. 표현이 다소 거시기하지만 어쨌든 마을사람들은 그렇게 불렀습니다. 아무것도 모르던 저 역시도 그게 그 분의 성함인양 “아이고~ 씹제이 할매 오셨는교?”라고 말씀드리다 영문도 모른 채 패대기쳐 지곤 했지만요.

초등학교 때 정말이지 김치가 너무 너무 맛나던 친구가 있었습니다. 그 녀석 집이 우리 집 가는 길에 있었던 터라 제집 드나들 듯 들어가 김이 모락모락 나는 보리밥을 김치 몇 쪼가리 얹어 후딱 해 치우던 기억은 3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저의 머리와 배가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당시 그 친구는 부모님이 계시지 않아 할머니와 단 둘이 살고 있었지요.

세월이 흘러 강산이 세 번도 더 바뀌었습니다. 그 사이 경제는 눈부시게 성장했고, 양변기에 한 번 앉아보는 것이 소원이었던 어릴 적 꿈은 일찌감치 이루어져 지금은 화장실이 두 개나 있는 집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상합니다.

경제도 성장하고, 살림살이도 나아지고, 복지도 발전했는데 어릴 적 영웅과 같았던 그 행님을 ‘발달장애인’이라 부르는 것도 모자라, 반찬 싸들고 동네 어르신 집에 놀러가거나, 부모 없는 친구와 신나게 노는 일이 방문요양이니 자원봉사니 하는 이름으로 불리게 된 것입니다.

사람이 태어나 지역사회와 소통하며 그 속에서 사는 것에 대해 한 번도 의심해 본 적이 없었습니다. 적어도 어릴 적 기억 속에서는 말이지요. 그 행님도 집에서 가족들과 살았고, 연로한 그 어르신도 동네 사람들이 가족과 친구가 되어 어울려 살았거든요. 그러면 세상이 이만치 살기 좋게 변했으면, 그런 사람들이 동네에서 더 잘 살 수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요?

저는 지적·자폐성장애가 있는 사람들과 함께 일하고 있습니다. 편하게 그냥 친구들이라 부르겠습니다. 저는 이 살기 좋은 세상에 우리 친구들이 동네에서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요즘 우리 다섯 살배기 아들놈은 ‘다이노 코어’라는 애니메이션에 푹 빠져 있는데요. 덕분에 아비는 ‘합체로봇’ 사다 바치느라 등골이 휘고 있지만, 어쨌든 거기 주인공은 아버지와 함께 피자가게를 운영하는데 입버릇처럼 이렇게 외칩니다.

“피자로~ 세계 정복~”

(나는 “로봇 때문에~ 등골 휘청~”)

참 맘에 드는 말입니다. 저도 발달장애가 있는 친구들과 세계까지는 아니어도 최소한 우리 동네를 접수하며 살고 싶습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해도 행복하게 나아가고, 너그럽게 받아줄 수 있는 곳. 생의 마지막까지 늘 함께 있을 수 있는 곳. 네 글자로 하면 지역사회요, 두 글자로 줄이면 ‘동네’이지요.

복지를 복지라 부르지 못하는 세상에 사는 것이 아니라, 내가 우리가 살아가는 그 삶 자체가 복지요 복된 삶이 되는 세상. 생각만 해도 행복해집니다.

참, 그러고 보니 그 행님은 지금 어디서 살고 있을까요?

-장애인 곁을 든든하게 지켜주는 대안언론 에이블뉴스(ablenews.co.kr)-

-에이블뉴스 기사 제보 및 보도자료 발송 ablenews@ablenews.co.kr-

제지훈 칼럼리스트 (사)경남지적발달장애인복지협회 거제시지부장으로 재직하면서 인근대학 사회복지학과에서 후배 복지사들을 양성하고 있다. 절대로 포기할 수 없는 장애인복지의 길에 언제나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는 가족과, 좋은 사람들이 함께 있어 오늘도 행복하게 까불짝대며 잰걸음을 힘차게 내딛는다. (발달)장애인들의 사회통합으로의 여정에 함께하며 진솔하게 일상을 그려나가고자 한다.
저작권자 © 에이블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