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 전, 나는 여성의 성비가 절대적으로 우월한 집에서 살았다.
여성과 남성의 성비 4:2. 그나마 대학생 때 아빠가 돌아가시고 나서는 4:1. 그러니 우리 집 문화는 다분히 여성중심적이었다.
화장실문화도 예외는 아니어서, 우리 집의 유일한 아들인 남동생이 변기 앞에서 생각 없이 남성성을 과도하게 발사하기라도 하면, 세 명의 누나들에게 그보다 더 센 속사포 같은 잔소리를 귀가 따갑도록 들어야만 했다. 그런데, 이렇게 여성중심적인 가정에서 성장한 내가 결혼을 하고 아들까지 낳았다. 그러니 지금의 우리 집 문화는 다분히 남성중심적일 수 밖에 없다.
남녀 성비 2:1.
나는 이 집의 유일한 여자다. 남성 성비가 이렇게 높은 곳에서 살아본 적이 없던 나는 이 상황을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다. 나란 사람이 딱히 여성적인 성향을 가진 것도 아니고 오히려 중성적인 편이라 다른 건 다 맞출 수도 있고, 어떤 면에서는 편하기도 한데…
문제는 화장실이다.
아이가 태어나기 전에도 남편이 화장실에 들어갔다 나오면, 변기 주변에 튀어 있는 사자의 영역표시와도 같은 동물적 흔적과 불쾌한 향기에 아연실색한 것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그런 마음을 입 밖으로 표현한 적은 없었다. 목구멍까지 튀어나오는 잔소리를 애써 삼키며 욕실 세정액을 뿌리고 닦아가며 화장실을 사용했다.
‘그래. 저 방식은 인류 탄생 이래 남성들이 유구한 세월 동안 지속해 온 그들의 자연스러운 방식이다. 우리 남편도 적어도 35년 이상 저 방식으로 소변을 보았을 것이다. 그런데, 내가 일방적으로 갑자기 바꾸라고 하는 것도 쉬운 요구는 아닐거야.’
얼마 후, 우리 집에 또 다른 남자인 이응이가 태어났고, 아기가 자라나 배변훈련을 시작하게 되니, 우리 집 욕실에는 유아용 소변기까지 자리하게 되었다. 이 때쯤 나는 이 집안의 성소수자로서의 일종의 고립감 내지는 외로움을 처음으로 느꼈던 것 같다. 아이는 뽀로로 캐릭터가 붙어 있는 파란색 소변기로 쉽게 소변 보는 법을 익혔고, 이응이도 서서 소변 보는 남자로 키워졌다. 이제 와 생각해 보면, 이 때 내 사심을 가득 담아 이응이를 유아변기에 앉아서 소변을 보도록 훈련시켜서 ‘앉아서 소변보는 남자’로 키웠어야 하는 건가 싶기도 하다.
얼마 전, 독일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는 나의 절친이 한국 우리 집에 왔을 때 이런 고민이야기를 했더니, 독일 남자들은 거의 모두 앉아서 소변을 본다는 것이 아닌가?
(이참에 나도 확 바꿔 봐?)
시간이 갈수록, 이응이는 점점 씩씩하고 활동성 높은 남아로 자라났고, 남편과 더불어 화장실 변기 앞에 서서 자신의 남성성을 힘껏 뿜어대기 시작했다. 그만큼 우리 집 화장실의 쾌적도는 점점 더 악화되어 갔고, 급기야 인내심이 바닥나기 시작한 나는 화장실의 불결함에 대해 지나가는 신음소리처럼 한 두 번 내뱉게 되었다.
이 때부터, 평소 민감하고 깔끔한 성향의 남편은 내 소심한 찰나의 컴플레인에 반응하여 자신이 소변을 본 후나, 이응이와 목욕을 한 후에는 변기를 깨끗이 닦고 나오기 시작했다. 남편의 나름의 배려(?) 내지는 노력 덕분에, 나의 우리집 화장실 문화에 대한 대대적인 개혁 의지는 지푸라기에 붙어 확 타오르다 꺼지는 불길처럼 사그라져갔다.
그러던 어느 날…
우리 집 화장실의 남성중심적 환경 내지는 불결함에 대해 강한 거부감과 불만을 본격적이고 지속적으로 표출한 것은 뜻 밖에도 이응이였다. 최근 한 두 달 사이에 갑자기 아이는 화장실에 갔다가 변기에 아빠 쉬가 튀었다며 지저분하다, 냄새가 난다, 닦아야 한다며 소리치거나, 강한 불쾌감을 표하는 것이 아닌가?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심지어는 마지막에 쉬 한 사람이 자기인데, 그것도 잊어버리고는 변기에 묻은 쉬만 보면 더없이 불쾌한 표정으로 이건 무조건 아빠 쉬라고 우기기까지 하는 것이었다.
(이거 니 쉬거든!)
그럴 때마다, 남편이나 나는 얼른 화장실로 출동하여 변기를 닦아야만 아이는 쉬를 했다. 그렇게 이응이의 불만은 계속되었고, 나는 어쩌면 이 때가 우리집 화장실문화를 개혁해 볼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는 생각에 아이를 살살 꼬드기기 시작했다.
‘그래. 너도 지저분해서 싫은 모양이구나? 사실, 그 동안 말은 안했지만, 엄마는 너무 지저분해서 많이 힘들었거든. 이런 게 불쾌하다면, 방법이 하나 있는데, 한 번 들어볼래? 너도 아빠도 엄마처럼 앉아서 소변을 보면 문제는 간단히 해결되거든. 어떻게 생각해?’
이렇게 미끼를 던진 나는, 아직 어린 이응이가 크게 생각하지 않고 덥석 물어줄 줄만 알았다. 그러나, 의외로 그렇지가 않았다. 자기가 왜 앉아서 쉬를 해야 하느냐는, 조금은 당황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것이 아닌가? 아직 나와 이 문제로 논쟁을 버릴만큼 언어적 인지능력이 성숙하지 않아서 본격적으로 말로 논쟁을 하지는 못했지만, 아이는 ‘왜 내가 앉아서 쉬 해야 돼?’라고 물으며 내 제안을 산뜻하게 받아 들이지 못했다.
(흠! 너도 역시 남자구나! 역시 서서 쉬 하는 건 남성적 본능?)
아들의 이런 반응으로 인해 나는 더 이상 앉아서 쉬 하라고 권하거나 강요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아들의 화장실 청결상태에 대한 자가당착적 불만 제기는 계속되었고, 급기야 어느 날 밤, 나는 남편에게 협조를 구할 수 밖에 없었다. 이응이에게는 당신이 강력한 성 역할모델일 테니, 당신이 앉아서 쉬 하기에 솔선수범해 주면 어떻겠느냐고. 다행히 남편은 흔쾌히 그렇게 하겠다고 했고, 다음날부터 아이에게 보여주며 변기에 소변이 튀는 것이 거슬리면 너도 함께 이렇게 하자고 권유했다. 역시 아들에게 있어 남편의 영향력은 컸다.
아빠가 손수 역할모델이 되어 도와주니 아들은 순순히 그러겠다고 했고, 일주일이 지난 지금은 가끔 잊어버리기는 해도, 우리 집 두 남자의 앉아서 쉬 하기는 거의 안정기에 접어들었다. 덕분에 나는 화장실에 갈 때마다 깔끔하고 냄새 없는 화장실에 만족감과 행복감마저 느끼고 있다. 이렇게 해서 이응이네 화장실문화 개혁 프로젝트는 성공했다고 자평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런데,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내 마음이 아주 산뜻하고 가뿐하지만은 않다. 왜냐하면, 편견과 참견이 난무하고, 남과 나의 다름을 잘 받아들이지 못하는 우리 나라 문화의 특성상, 아이가 자라면서 계속 이런 식으로 소변을 보는 것이 장차 또래 아이들로부터 놀림의 대상이 되거나, 이상한 아이라는 낙인효과로 작용하지나 않을까 하는 걱정도 되기 때문이다.
또한 이번 일을 계기로, 4, 5세 때와는 달리 점점 성적 다양성과 성 역할 등에 대한 사고가 조금씩 경직되어가는 아이에게 어떻게 유연하고 열린 가치관을 갖도록 도와 주어야 할지에 대한 고민도 한층 커졌다.
70세가 넘으신 친정 엄마는 외손자에게 달님이 냉장고, 마트놀이, 콩순이 도넛가게 등을 직접 선물해 주는 것에 아무런 거리낌이 없는, 지극히 세련된 사고의 소유자다. 우리 남편 역시 프로모션으로 아이들에게 나누어 주는 풍선 중에 핑크색을 고르는 아이에게 아무런 저항감도 없으며, 오히려 장려하는 쪽이다.
세상의 다양한 다름에 대해 이야기 하고 글을 쓰는 나야 더 말할 것도 없다.
그래서일까? 어릴 때부터 이응이가 가장 좋아하는 색은 주황색, 신발은 실버칼라에 주황색 배색이 들어간 걸 고르고, 빨강이나 인디언핑크 티셔츠를 입는 것에 아무런 거리낌이 없었다. 그런데, 그랬던 이응이가 또래 친구들과 유치원에서 지내는 시간이 길어지고, 사회적 교류도 많아짐에 따라 종종 이런 말들을 하곤 한다.
‘**는 여자 친구인데, 왜 터닝메카드를 좋아하지?’
‘핑크색은 여자친구들이 입는 거 아니야?’
…
조만간, 아들이 요즘 들어 사고 싶다던 초콜릿메이커나 젤리메이커 같은 장난감을 하나 사 주어야겠다. 그나저나, 아들 키우는 다른 엄마들은 남성적 화장실문화에 따른 불편함을 어떻게 느끼며 해결하고 있는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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