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양쪽 부모님에게서 금전적 도움을 거의 받지 않고 결혼했다. 남편은 회사에 딸린 오래된 사택에서 이미 총각시절부터 살고 있던 터라 쓰던 가구 그대로 사용했고, 나도 처녀시절 쓰던 책상과 재봉틀에 장롱 하나만 새로 구입해서 신혼을 시작했다. 넉넉치 않아도 우리가 선택한 우리만의 보금자리니 행복할 따름이었다.

그리고 아이 둘을 낳으며 방 두 칸 짜리 집으로 이사한 후 십여 년을 그곳에서 살았다. 딸에게는 독방을 주었지만, 아들은 정신연령이 아기 같으니 부모와 한 방에 지내는 게 자연스러워 보였다. 매일 밤 자장가를 불러주며 잠재웠고, 새벽에 자다가 깨면 손을 잡아주며 달래곤 했다. 그 후 아이들이 중학생이 될 즈음 방 세 칸 짜리 집으로 이사를 가게 되었는데, 한 편 걱정이 되었다.

‘자폐아는 낮선 환경을 불안해 한다는데, 새 집을 거부하면 어쩌지? 그래도 꼭 안고 자장가를 불러주면 잠은 잘 수 있겠지.’

이사 가는 전 과정에 아들을 참여시키고, 빈 집의 썰렁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새 집에 가서 아들의 쓰던 물건을 하나하나 말해주며 방 정리를 함께 했다. 그랬더니 우리의 걱정이 무색하게도 거실의 짐들을 제대로 풀기도 전에 자기 방에 들어가 누워서 뒹굴었다. 그 날 밤 아들은 스스로 방문을 닫고 아침까지 편안하고 깊은 잠을 잤다.

의사소통이 서툴고 지능이 낮은 발달장애인들을 대할 때 보호자들, 특히 부모들은 아기처럼 감싸며 모든 것을 다 챙겨주고 도와주려는 습관에 빠지기 쉽다. 내 경우도 마트나 편의점에서 사고 싶은 품목을 선택하는 것까지는 아들에게 맡겼지만, 계산은 대부분 내가 했었다.

그런데, 학교에서 부직포를 바느질해서 지갑을 만들어온 후 아들은 그것을 매일 가방에 챙겨 다녔다. 그 모습이 귀여워 돈을 천 원씩 넣어주니, 어느 날 편의점에서 마이쭈를 사며 부직포 지갑을 불쑥 꺼내는 것이었다. 아뿔싸, 내가 아들의 사회성을 차단한 주범이로구나!

그 후 마트의 남성용 지갑코너에 가서 마음에 드는 것을 고르게 하였다. 그렇게 중학생 때 처음 골랐던 갈색 가죽지갑은 몇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아들의 바지주머니 속에서 유용하게 쓰이고 있다.

몇 년 전부터 재조명된 시설 장애인들의 인권 침해 예방을 위해 2013년 국가인권위원회에서 발행한 ‘장애인복지시설 인권교육 교재’에서는 ‘사생활을 보장받을 권리’로서 나만의 공간, 나만의 시간, 나만의 활동, 나만의 물건 등을 가지게 하도록 제시하고 있다. 그리고 ‘혼자 좋아하는 것을 보면서 조용히 쉬고 싶어요’, ‘혼자 고독을 즐기고 싶어요’라고 많은 시설 이용인들이 이야기하고 있다.

이러한 욕구는 단순히 취향에 따른 선택사항이 아니다. 헌법 제17조에서 '모든 국민은 사생활의 비밀과 자유를 침해받지 아니한다'고 명확히 규정한다.

건축학 연구에서는 심리적으로 안전함을 느끼는 개인공간을 사방 1미터 내외의 범위로 측정한다. 대상의 친밀도와 사회적 상황에 따라서 그 안팎으로 자율적 허용이 이뤄지지만, 원하지 않는 상태에서의 밀착 거리는 정서적 불안과 스트레스를 야기하게 된다는 것이다.

최근 장애인 탈시설 운동과 함께 각 지역 복지관과 부모회 등에서 지역밀착형 그룹홈이나 체험홈과 같은 성인장애인의 자립생활을 위한 모범적인 주거형태 사례들을 개발하고 있음은 매우 고무적이면서도 당연한 인권의 방향이라 볼 수 있다.

사람은 누구나 가족과 함께 살되 자기만의 공간에서 프라이버시를 존중받아야 하며, 자유로운 외출로 교통수단을 이용하고 음식과 의복을 취향대로 구매할 수 있어야 한다. 이는 생존과 행복을 위한 최소한의 권리다.

그 누구도, 사랑의 이름을 내세운 부모도, 안전이나 편리를 내세운 복지관계자도, 경제적 이유를 앞세운 정책관리자도, 함부로 누르거나 무시해서는 안되는 헌법적 권리다. 그리고 이것은 장애인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모든 인간, 바로 우리의 자녀들과 이웃들의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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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석주 칼럼니스트 청년이 된 자폐성장애 아들과 비장애 딸을 둔 엄마이고, 음악치료사이자 부모활동가로서 다양한 유형의 장애인들을 만나고 있다. 현장의 문제와 정책제안, 장애인과 그 가족들의 이야기를 전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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