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에 폭염이 한풀 꺾인다는 뉴스는 아직 더위가 한창이라는 말이겠죠. 인철(가명) 씨 일 마치고 10시쯤 출발했으니 더위가 기승을 부리기 시작할 시간입니다. 아스팔트는 충분히 달아올랐고 햇볕은 강렬했습니다. 며칠 전부터 말썽이던 에어컨은 시위하듯 미지근한 바람을 뱉었습니다.

인철 씨는 일주일에 이틀, 한두 시간씩 학원 청소를 합니다. 남에게 한 마디 지지 않고, 자전거를 잘 타고, 길을 잘 익히고, 이름과 전화번호는 한 번 들으면 기억하는 특별한 능력이 있습니다. 신문 배달, 마트 배달, 택배 보조 같은 일을 하려고 4~5년 애썼지만, 도통 일을 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인철 씨, 누구는 일해서…….”

일 이야기 나오면 저만치 달아났습니다.

인철 씨가 큰형님처럼 따르는 한집 사는 아저씨가 취업하자 자기도 일하겠다고 자진했습니다. 기적이었습니다. 지금까지 잘 다니는 것도 기적입니다. 월급은 5만 원을 받는데, 맛있는 것 사 먹고 저금합니다. 첫 월급은 부모님께 드렸고, 월급 모아서 가끔 부모님께 용돈 드리고, 명절에 선물 사서 가고, 부모님 생신에 선물합니다.

오늘은 인철 씨 생일 내일은 아버지 생신, 인철 씨 양력 생일과 아버지 음력 생일이 하루 사이입니다. 이런 날이 드물어 어머니 만류에도 기어이 부모님 댁에 갔습니다.

인철 씨와 인철 씨 지원하는 최희자 선생님 편에 운 좋게 시설장이 끼었습니다. 시설장은 이런 요청이 반갑습니다. 시설장은 입주자의 삶 언저리에 있습니다. 가까이 간다고 애쓰지만 언저리입니다. 애통의 깊이와 환희의 분량이 다릅니다. 그나마 오늘 같은 날은 어울릴 정도는 되니 기쁘고 반갑습니다.

에어컨이 고장 난 차는 찜통으로 변했고 의자에 닿은 등은 축축했습니다. 거창에서 진해까지 두 시간, 땀 닦을 즈음 도착했습니다.

어머니와 옆집 할머니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일어서지 못한 채 앉아서 맞았습니다. 인철 씨 월급으로 산 음료수 한 줄과 복숭아 한 박스를 내려놓자 옆집 할머니가 정리했습니다. 돈도 없을 건데 뭣 하러 사 왔느냐는 여느 부모님의 인사말이 오갔습니다.

아버지는 며칠 전 요양병원에 입원했습니다. 키가 크고 미남인, 누가 봐도 신사인 아버지는 육중한 기계에 빨려 들어가는 직장 동료를 구하다가 손가락 몇 개를 잃었습니다. 세상에는 착하게 사는 사람에게도 알 수 없는 슬픔과 고난이 여지없이 끼어들기 마련입니다.

큰 사고는 한 번 더 찾아왔습니다. 화물트럭이 정차해 있던 아버지의 자가용을 덮쳤습니다. 발목에 큰 흉터를 남겼고 일어서기 어려울 정도가 되었습니다. 사고 후유증으로 한쪽 눈에서 눈물이 그치지 않았습니다. 눈곱이 생기고 불어나서 마침내 꿰맨 것처럼 닫혔습니다. 다른 한쪽은 눈물이 없는 대신 시력을 잃었습니다. 그즈음 주저앉은 것 같습니다. 정신이 온전하다가 흐려지고 다시 돌아오고 흐려지고.

어머니는 병수발에 매달렸습니다. 몸이 지쳤고 무릎이 상했습니다. 성치 않은 무릎만도 성가신데 꼬리뼈 근처에 큰 종기가 생겨 앉지도 서지도 못합니다. 인근 복지관에서 도움을 받다가 여의치 않자 요양보호서비스를 신청했고, 그마저 부족해 사비를 들여 남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그마저 여의치 않자 아버지가 요양병원에 입원했습니다.

아들 도착할 시간에 맞춰 냉면과 탕수육을 미리 주문했습니다. 음식 오기까지 인철 씨 가족 살아온 이야기와 요즘 사는 형편을 자세히 들었습니다. 결국 어머니 혼자 이 집에 남았습니다.

“남에게 피해 안 끼치고 살았는데 왜 이럴꼬…….”

옆집 할머니가 수시로 찾아와서 언니처럼 친척처럼 어머니를 보살핍니다. 인철 씨가 이모라고 부르는 옆집 할머니는 어머니보다 한창 나이 많은, 여든 넘은 분입니다. 인철 씨가 월평빌라로 이사 오던 해에 부모님 댁 이웃으로 이사 왔습니다. 아들 떠난 자리 옆집 할머니가 채웠습니다. 어머니가 많이 의지하고 어머니에게 큰 힘입니다.

작은 방은 지금도 인철 씨가 사는 듯했습니다. 사각모를 쓰고 입을 앙증맞게 다문 유치원 졸업 사진, 인철 씨와 형 내외와 부모님이 나란히 찍은 사진, 한껏 멋을 낸 부모님 젊은 시절 사진들이 걸려있었습니다. 사진 속 부모님은 어머니 말씀처럼 남에게 피해를 줄 분들은 아니었습니다.

아들 돌아올 날을 기다리는지, 아들 대신할 게 없어서인지, 드문드문 찾는 아들을 위해서인지 알 수 없지만, 칠 년 전 집 떠난 아들의 방을 고스란히 간수했습니다. 한쪽 구석에 아들 주려고 장만한 선풍기가 덩그렇게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약 먹느라 미리 밥 한 숟가락 먹었다며 끝내 탕수육 한 점 집지 않고 아들에게, 아들과 함께 온 손님에게 고스란히 냈습니다. 서른한 살 아들의 등을 두드리며 천천히 먹으라 하고, 냉면 양념이 골고루 섞이게 저어 주고, 먹지 않는 달걀은 꺼냈습니다.

“야가 밥은 잘 먹지요. 어릴 때부터 그랬습니더. 군것질 안 하고 밥을 마이 먹습니다. 밥 때 돼서 안 차려주면 성질부리고 그랬습니더.”

지금도 여전합니다. 밥을 고봉으로 먹고 군것질에 욕심이 없습니다. 먹다가 배부르면 즉시 멈춥니다.

갈 시간이 이르자 어머니가 서랍에서 오만 원 지폐를 꺼냈습니다.

“생일인데 맛있는 거 사 묵어라.”

밥 때 지나면 성질부리는 아들에게 미역국 끓여 먹이고 싶지만 남에게 국 끓여 달라는 형편에 생일상은 엄두를 못 내고, 중국집 냉면과 탕수육으로 생일상 대신한 게 아쉬운지 미안한지 두 번 접은 지폐를 아들 손에 쥐였습니다. 인철 씨가 덥석 받아 바지주머니에 넣었고, 어머니는 잃어버리지 말라고 신신당부했습니다.

아들 왔을 때 어머니도 같이 병문안하자고 권했습니다. 당신 몸도 몸이지만 아버지가 집에 오겠다면 말릴 자신이 없어 손사래를 쳤습니다. 가고 싶고 보고 싶은데 머뭇했습니다. 거듭 권했지만 사양하고, 대신 인철 씨에게 세 가지를 부탁했습니다.

“아버지한테 가면 내가 시키는 대로 해라. 아버지 얼굴에 니 얼굴 대거라, 알았제? 아버지한테 ‘내가 있으니 걱정하지 마이소’ 하거라, 알았나? 아버지 눈곱이 마이 끼었을 거라. 물수건 있을 테니까 잘 닦아드려라, 알았제? 내가 뭐라 카더노. 한번 말해 봐라.”

“아부지 얼굴에 내 얼굴 대라 했지요. 그라고 내가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라, 이렇게 말하고. 아버지 눈곱 요래 닦아주라 했지요. 뭐, 그래 하면 돼.”

아버지 눈곱 닦아드리라 할 때 어머니 목소리가 떨렸습니다.

아버지에게 갈 시간입니다. 인철 씨가 어머니에게 만 원 지폐 다섯 장을 봉투에 담아 드렸습니다. 낳아주셔서 고맙다는 인사는 빠뜨렸지만 큰절 올리고 집을 나섰습니다.

요양병원은 집에서 자가용으로 십 분 거리, 시내 한 가운데 있었습니다. 빌딩 숲과 요양은 어울리지 않았습니다. 병원 1층 빵집에서 빵을 샀습니다. 병원 직원들이 인철 씨를 못 알아봤지만 이름은 잘 알고 있었습니다. 며칠 전부터 아버지가 아들 이름을 하루에도 여러 번 불렀다고 합니다.

인철 씨가 아버지 손을 잡고 인사드리자 적잖이 놀랐습니다. 이내 눈물을 흘렸습니다. 설움과 반가움 섞인 진짜 눈물이었습니다. 닫힌 한쪽 눈에서도 굵은 눈물이 흘렀습니다. 인철 씨가 인사하고 자기 얼굴을 아버지 얼굴에 맞대었습니다. 한 번 더 아버지 얼굴에 자기 얼굴을 비볐습니다.

“아버지, 제가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시고예.”

어머니 당부대로 말씀드렸습니다. 딱 그렇게만 말했습니다.

어머니 당부대로 말씀드렸습니다. 딱 그렇게만 말했습니다. 최희자 선생님이 물수건으로 눈곱을 닦았습니다. 정신이 흐릿하다고 했는데 잠시 머무는 동안 아버지는 온전했습니다. 말씀이 없다고 했는데 인철 씨 안부를 묻고 함께 간 시설 직원들에게도 말을 건넸습니다.

음료수에 빨대를 꽂아 드리니 손가락 몇 개가 뭉툭한 왼손으로 쥐었습니다. 엄마 젖을 빠는 아이처럼 깊게 마셨습니다. 빵은 먹기 좋게 얼마쯤 봉지 밖으로 밀어내서 드렸습니다. 손가락 몇 개가 뭉툭한 오른손으로 움켜잡았습니다. 느리게 가져가던 빵이 입술에 닿자 크게 한 입 베물었습니다. 빵 안에 있던 크림이 옆으로 툭 튀어나왔습니다. 두 번째 베물던 아버지가 흐느꼈습니다.

스무날 있다가 추석 앞두고 집에 오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어머니와 한 약속을 아버지에게도 했습니다.

“그날 꼭 오거래이. 꼭 오거래이.”

아버지는 또 한 번 흐느꼈습니다. 입가에 묻은 크림을 닦아드렸습니다. 인철 씨는 꼭 오겠다고 다짐했고, 퇴원해서 집에 있을 거라고 장담했습니다.

음료수 한 병 빵 한 개 드실 동안 곁에 있었습니다. 아버지를 뒤로 하고 나설 때 ‘꼭 오거래이’ 하는 말이 뒤따랐습니다. 엘리베이터 안에 메아리쳤습니다.

고향 진해에 온 김에 몇 군데 들렀습니다. 고등학교 졸업하고 줄곧 다녔다는 장애인복지관에 갔습니다. 입구부터 인철 씨를 알아보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어, 인철이 아이가. 잘 지냈나?’ 어, 어, 하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렸습니다. 금의환향하는 개선장군 같습니다. 사무실에도 아는 직원이 몇 사람 있었습니다. 음료수 한 잔 마시고 누구 누구 만난다며 자리를 떴습니다.

인철 씨를 아는 직원이 지난 이야기를 들려주었고, 최희자 선생님이 지금 사는 이야기를 전했습니다. 전 직원이 <<월평빌라 이야기 2015>> 책을 읽었다며 반가워했습니다. 어머니와 아버지 형편을 복지관에 전했습니다. 무슨 부탁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주제넘는 것 같아 형편만 전했습니다.

유년 시절에 함께했던 사람들이 여전히 복지관에 많습니다. 누구는 복지관 부설 작업장에서 일하고, 누구는 프로그램 참여하고, 누구는 놀러 오고…. 몇 사람은 시설에 갔고요. 고향 떠나 거창에 정착한 인철 씨는 주중에 직장 다니고, 도서관 극장 시장 이웃집에 놀러 가고 방문하고, 주일에는 교회에 갑니다. 그가 오늘 금의환향했습니다. ‘인혜(가명) 인혜…’ 하던 인혜 씨도 만났습니다.

어릴 때부터 인철 씨를 봐 온 원장님과 국장님이 있는 장애인시설에 들렀습니다. 친구 두 명이 거기 삽니다. 인철 씨는 잠시 인사하고 이내 친구 만나러 갔습니다. 인철 씨 기다리는 동안 원장님에게 시설 소식을 들었습니다.

이번 여름 2박 3일, 어느 교회 중고등부 학생 30명과 시설 입주자 30명이 연합 수련회를 했습니다. 60명이 함께 성경공부 하고 먹고 자고 했습니다. 참가한 학생들이 쓴 ‘장애인을 이해했다’는 소감문을 소개하며 뿌듯해 했습니다. 인근 중학교 학생이 학교 벌칙으로 시설에 봉사활동 왔다가 변화되었다 합니다. 외부 사람이 시설에 머무르며 변하는 것을 보고 시설에 게스트하우스 같은 것을 지을 계획입니다. 친구 만나러 갔던 인철 씨가 돌아왔습니다.

친구 만나러 갔던 인철 씨가 돌아왔습니다.

“우와, 집이 와 이리 큽니까. 친구는 뭐, 거, 수영장에서 수영하대요. 진짜 좋네요.”

월평빌라보다 세 배는 큰 건물이니 입주자의 집도 세 배는 크겠죠. 풀장도 있습니다. 저녁 메뉴가 연어초밥에 샐러드였는데, 꼭 먹어 보라 해서 몇 점 먹었습니다. 월평빌라 식당보다 세 배 큰 식당에서 해군 장교식당 요리사였던 조리원이 만든 연어초밥을 먹던 인철 씨가 이사 오고 싶다 했습니다. 초가삼간에 살다가 궁전을 본 거죠.

가는 길은 동남쪽이라 오르는 해를 맞으며 갔고, 오는 길은 북서쪽이라 저무는 해를 안고 왔습니다. 다행히 에어컨 냉매를 채워 돌아오는 두 시간은 시원했습니다. 마음은, 글쎄요.

입주자의 가족을 만나면, 부모형제 얼굴 보고, 십 년 이십 년 오십 년 가족사를 듣고, 혹여 눈물이나 아픔, 염려와 안타까움, 한탄이라도 들으면 마음이 어지럽습니다. 안타깝고 슬프고, 어떤 때는 죄송합니다. 그럴 입장인지 모르겠지만 위로하고 싶고, 당신 아들 딸 형님 동생을 잘 보살피겠다며 마음으로 다짐할 때도 있습니다.

누구나 가슴에 불덩이 하나씩 안고 산다는데, 장애 있는 부모형제를 둔 사람에게 불덩이는 그 부모형제일 겁니다. 시설에 갔다더니 살았는지 죽었는지 소식도 없이 그저 그렇게 잊히는 존재, 꺼내지도 끄지도 못한 채 가슴 한구석 불덩이로 남은 존재, 그런 존재라면 얼마나 애통할까요.

인철 씨가 효자라고 했습니다. 생일 맞아 부모님 찾아뵙고, 아버지 생신이라고 찾아뵙고 인사드리니 효자죠. 월급 타서 부모님께 용돈 드리고, 명절에 선물 사서 찾아뵈니 효자죠. 수시로 전화해서 안부 여쭈니 효자입니다. 직장 다니고 교회 다니고 이웃과 어울려 살며 사람 구실하고 아들 노릇하는 모습 보며 대견해 하지 않겠습니까. 어머니 한탄 아버지 눈물 생각하면 지금처럼 아들 노릇 하며 살게 잘 돕고 싶습니다.

인철 씨는 친구들이 다니는 복지관에 가고 싶고 친구들이 사는 시설에 살고 싶다는데, 그곳에서도 직장 다니고 마실 다니며 사람 구실하고 아들 노릇하며 살 수 있다면 기꺼이 그리하겠습니다.

* 이인철 씨와 최희자 선생님과 인철 씨 부모님 뵙고 온 날을 돌아보며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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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시현 칼럼리스트 ‘월평빌라’에서 일하는 사회사업가. 대학에서 사회복지를 전공하고 줄곧 사회복지 현장에 있다. 장애인복지시설 사회사업가가 일하는 이야기, 장애인거주시설 입주 장애인이 사는 이야기를 나누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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