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각장애 맘인 은진슬씨. ⓒ은진슬

현재 나 은진슬의 사회적 프로필을 간단히 적어 보자.

‘풀타임 마미’이며, ‘파트타임 다양성컨설턴트(Diversity consultant)’이자 ‘작가’이다.

독해에 예민한 사람이라면, 위의 자간의 의미를 통해, 내가 현재 육아와 커리어 중 어느 쪽에 무게중심을 더 두고 있는지 금방 알아챌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 나는 현재 엄마라는 일에 더 많은 무게중심을 두고 살고 있다. 처음부터 그렇게 하려고 가열차고 굳건한 마음을 먹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래도, 장애를 가지고 남들보다 더 많은 고민 끝에 아이를 낳고 키우기로 한 장애부모로서의 무거운 입장도, 출산 직후 찾아온 암도, 나의 이런 결정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어쩌면, 일 욕심도 많고, 공부하는 것도 좋아하는 내가 하느님이 주신 소중한 생명을 보듬고 키우는 육아라는 중차대한 일에 소홀할까 하는 걱정에 하느님이 내게 암을 보내신 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종종 해 본다.

엎어진 김에 쉬어간다고 했던가? 나로서는 어차피 갈등하고 고민할 여지도 없었기에, 오히려 육아에 전적으로 집중할 수 있음에 감사하며 아기가 기고, 걷고, 생애 첫 단어를 말하고, 처음으로 기관생활을 하는 소중한 순간들을 오롯이 지켜보았다.

이 경이롭고 신비한 기억들은, 앞으로 내 아이가 자라나면서 그 어떤 말썽을 부리며 나를 힘들게 할지라도 내가 아이를 사랑하며 함께 걸을 수 있는 밑거름이 되어줄 거라고 굳게 믿는다.

아이와 일 사이에서 나는 갈등하고 번민하였고, 지금도 그렇다. ⓒ은진슬

내가 본격적으로 다시 일을 시작한 건, 이응이가 36개월에 접어들었을 때부터였다.

3년여만에 처음으로 잡지사에 내 이름으로 다시 글이 실리던 날, 처음으로 3년전까지만 해도 내게 가장 익숙하고 편안했던 단정한 스커트 정장(음대생들이나 강의하는 사람들은 이런 옷을 작업복이라고도 부름)을 입고 강의를 하던 날은 정말이지 너무나도 기쁘고 행복했었다.

하. 지. 만.

그 후로 지금까지 풀타임마미이자 프리랜서로 살고 있는 내 삶은, 늘 사랑하는 아이와 사랑하는 나의 일, 나의 공부 사이에서 갈등하고 번민하며, 그야말로 우왕좌왕, 좌충우돌, 갈팡질팡 중이다.

어쩌다 내가 프리랜서라고 말하면, 주위에서 아이 키우는 엄마들은, 아이도 맘 편히 돌보면서 일도 할 수 있으니 얼마나 좋냐고 너무 부럽다고들 말한다.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는 그냥 웃지만, 속으로는 속 모르는 소리라고 쓴 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다.

영유아기 아이들은, 특별히 엄청나게 건강한 체질이 아니고서는 늘 아프다. 여름이 되면 수족구에 두 번씩 걸리고, 수족구에 연달아 장염까지 와서 3주간 유치원을 못 가게 되기도 한다. 심한 뇌수막염이 찾아와 입원 치료를 받기도 하고, 엑티브한 남자 아이라면 뇌진탕이나 경추염좌 등은 덤으로 따라다닌다.

아픈 아이 앞에서 일의 상대성은 늘 무너져 내린다. ⓒ은진슬

당장 어제만 해도 급작스레 열이 오른 아들을 업고 아침부터 병원행에, 결국 유치원도 못 간 아들을 간병하면서 프리랜서맘의 하루 업무는 휴업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날, 전업맘이라면 갈등할 것 없이 아이를 집에서 정성껏 돌볼 것이다.

이런 날, 워킹맘이라면, 가슴이 무너져 내리겠지만, 나의 물리적 실체를 요구하는 회사라는 절대성 앞에 아픈 아이를 유치원에 맡기고 출근을 선택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런 날, 프리랜서맘은?

의사선생님께 묻는다.

‘선생님, 아이 상태가, 오늘 등원해도 될까요?’

‘어머님이 사정이 되신다면 하루 정도는 집에서 쉬는 게 좋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등원해야겠죠?’

애처로운 프리랜서맘의 질문의 의도는, 내가 이 아픈 아이를 유치원에 등원시키고 내 일을 할 수 있는 강력한 명분을 달라는 뜻이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하나마나한 이 질문을 아이가 많이 아파 병원에 갈 때 마다 꼭 하는 나를 보면 말이다.

전업맘에게는, 아이를, 육아를 최우선으로 두고자 한 멋지고 용감한 선택이 이럴 때 굳건한 지지대가 되어줄 것이다.

워킹맘에게는, 엄마로서의 ‘나’도, 커리어우먼으로서의 ‘나’도 포기하지 않고 힘들어도 견디며 지켜 가겠다는 굳건한 의지와 독한(?) 마음이, 이럴 때 강력한 버팀목이 되어줄 것이다.

하지만, 프리랜서맘인 나는, 이럴 때가 너무 힘들다. 사랑하는 나의 아이는 그 존재만으로도 우선시 되며 절대적이다. 아이의 존재의 절대성만큼이나, 아이의 마음도, 아이의 건강도, 아이의 성장도 너무나도 절대적이다.

아이는 열이 펄펄 불덩이가 되어 아프고, 첫 기관생활에 적응하지 못하여 마음이 아프다. 부족함 투성이인 엄마가 무엇이라고, 최선을 다 해 놀아주고 안아주고 사랑한다 말해 주어도 아직도 부족하다며 끊임없이 엄마를 찾는다. 하지만, 나의 일은 늘 부차적이며 상대적이다.

프리랜서의 최대 장점은,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싶을 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그마저도 누군가가 내 역할, 내 일을 기다리고 있다는 전제가 있어야 하지만 말이다. 약속된 강의 날이 아닌 다음에야, 그 어디에서도 나의 실체를 절대적으로 요구하지 않는다.

일보다 우선시되는 절체절명의 그 무언가가 있다면, 나를 옥죄는 절대적 의무는 없으니 내 일을 내려놓고 수입도 포기하고 그 절체절명의 일을 하면 된다. 그러니 아이의 절대성 앞에 내 일의 상대성은 늘 무너져 내린다.

전업맘, 워킹만 그리고 프리랜서 맘, 각자의 자리에서 자신만의 시간을 새겨가고 있다. ⓒ은진슬

이로 인해 안정적인 수입을 포기해야 한다는 것, 커리어의 발전은 더디게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는 건 당연한 결과이다.

엄마의 시계는 절대적이며 빠르게 시간을 새겨가고, 프리랜서의 시계는 상대적이며 느리게 시간을 새겨간다.

전업맘과 워킹맘 사이의 그 어디쯤, 지극히 모호한 지점에 프리랜서맘이 있다.

법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일반적으로나 그들의 일, 그들의 육아, 그들의 커리어에 대해 제대로 이해받고 존중 받지 못하는…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풀타임마미에 파트타임 프리랜서로 살고 있는 현재의 내 선택을 후회하지는 않는다.

그저 나는 나의 일, 내가 좋아하는 공부를 내던질 만큼 아이에게 전적으로 내 삶을 올인할 수 없는 사람임을 알기에, 그런 나와, 나의 선택으로 이 땅에 태어난 소중한 내 아이의 필요와의 타협점을 최대한 수학적, 공학적으로 찾아내어 살고 있는 것뿐이다.

또한, 엄마의 빠르고 절대적인 시계와 프리랜서의 느리고 상대적인 시계가 언제까지나 늘 똑 같은 시간을 새겨가지 않을 것임을 나는 알고 있다. 아이가 자람에 따라 엄마가 필요한 절대적 시간은 줄어들 것이며, 그에 따라 나의 일, 나의 공부에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은 점점 더 늘어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면, 언젠가는 프리랜서의 시계가 엄마의 시계보다 더 빠르고 절대적으로 시간을 새겨갈 날도 반드시 올 것이다. 나는 그 날을 대비하여 지금처럼 밤마다 내 연장을 갈고 닦고, 주어지는 일들에 최선을 다하며 잠잠히 기다리리라.

세상의 모든 프리랜서맘 파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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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진슬 칼럼리스트 세상이 너무 궁금했던 나머지 7개월 만에 급하게 세상 밖으로 나오는 바람에 시각장애와 평생의 불편한(?) 친구 사이가 되었습니다. 언어로 연주하고, 음악으로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20년 정도 피아노와 뜨거운 사랑을 했지만 첫사랑은 대게 이루어지지 않듯 그 사랑을 이루지는 못했습니다. 그래서 다시 새로운 사랑을 찾아 헤매던 끝에 지금은 장애, 음악, 보조공학 등에 관련된 글을 쓰고 번역도 하고 있습니다. 유치원, 학교, 기업체 등에 찾아가 장애와 장애를 가진 사람들의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스토리텔러(storyteller) 역할도 하고 있지요. 가끔은 강의의 전달력을 높이기 위해 피아노 앞에 앉기도 한답니다. 다섯 살 아이의 엄마이기도 한 저는 우리 아이가 살아갈 세상에서는 장애와 다름이 좀 더 편안하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으로 더 열심히 글을 쓰고, 강의를 하며, 연주도 하고 있습니다. 눈이 나쁜 대신 세상을 보는 눈이 조금은 더 예민하고, 커피와 독서, 클래식 음악을 사랑하는 다섯살 아이 엄마가 들려 드리는 같은 듯 다르고, 다른 듯 같은 아이 키우는 이야기 한 번 들어 보시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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