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칼럼은, 내가 조직하여 활동하고 있는 한국장애부모연합회 ‘심봉사임당’ 카페에의 시각장애 엄마들의 의견을 참고하여 작성하였음을 밝혀 둔다.

내가 이응이만했을 때, 엄마는 숟가락에 쓰디 쓴 가루약을 털어 놓고 물약을 부어 녹여서 약을 먹여 주셨다. 그때 그 약은, 지금의 아기들이 먹는 약처럼 새콤달콤 매력적인 맛도 나지 않았고, 엄청나게 썼기에, 나는 늘 엄마의 쓰디 쓴 숟가락을 피해 도망 다녔다.

아마도, 나와 비슷한 세대의 엄마들이라면 격하게 공감할 만한 추억이리라.

초보엄마가 된 나는 어린 시절의 쓰디 쓴 경험만을 생각하면서 생애 처음 약을 접하는 아기가 과연 약을 잘 먹어줄까 노심초사하며 아기 입에 처음으로 ‘약’이라는 걸 물렸다.

그런데, 생각과는 달리 약을 너무나도 맛있게 쪽쪽 잘도 빨아 먹는 아기의 모습에 신기했던 나는, 오죽하면 강렬한 궁금증에 그 약을 맛보기까지 했었다. 알록달록 예쁜 색깔, 바나나, 딸기, 오렌지 등의 향긋한 냄새, 꿀처럼 달콤한 맛…

한참 중, 후기 이유식을 먹고 있는 어린 아가들에게 약이란 대부분의 경우, 태어나서 처음 접해보는 강렬한 달콤함, 그리스 신화속의 신들의 음료 넥타를 맛보는 경지의 무아지경일지도 모를 일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 약은 엄마인 나에게도 맛있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미각이나 음식물의 촉감에 지나치게 예민한 아기가 아니고서는 약에 대한 거부감을 가진 아기는 거의 없다고 봐도 될 정도여서, 이응이가 앞으로 약을 먹을 때 어린 시절의 나처럼 도망 다닐 일은 없을 것 같아 천만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점차 아이들에게 매력적인 형태로 진화하는 약병의 모양 ⓒ은진슬

시간이 흘러 이응이가 좀 더 크니 약병의 모양도 유아들에게 좀 더 매력적인 형태로 진화하였다.

숟가락에 약을 타서 먹이지 않아도 된다는 것만으로도 시각장애엄마인 내 입장에서는 너무도 편리하고 고마운 일인데, 약병의 뚜껑 모양마저 펭귄, 곰돌이, 오리 등등, 너무도 귀여운 모습으로 진화하여 아이들의 관심을 끌며 날 좀 먹어 달라고 유혹하니 엄마 입장에서는 더없이 고마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이 멋진 약병에도 단점은 있었는데, 기존의 단순한 모양의 약병에 비해 동물 모양의 특성 때문에 뚜껑이 완벽하게 밀봉되지 못해서 휴대시 약이 새는 경우가 종종 생기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동물뚜껑 약병을 좋아하지 않았는데, 나만 이런 생각을 했던 것이 아니었는지, 최근 들어 좀 더 진화한 약병이 등장했다.

약병 뚜껑의 모양은 잘 밀봉될 수 있도록 기존 방식을 유지하는 대신 약병 자체를 동물모양으로 만든 것이다. 얼마 전, 약국에서 이 약병을 받고는 바로 이것이 궁극의 유아용 약병이다 싶었다.

어떤 분이 발명했는지 몰라도, 스틱형 약봉투로 인해 가루약을 병에 넣어 희석하기 편하다. ⓒ은진슬

그런데, 시각장애엄마들이 투약 문제에 있어서 가장 어렵고 불편하게 느끼는 점들은 무엇일까? 본격적으로 이 주제를 논하기에 앞서 전제해 두어야 할 것이 있다.

아무리 모든 일에 있어 최대한의 독립성과 존엄을 지키며, 웬만한 일은 시간이 더 걸리더라도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고 믿는 나이지만, 투약문제만큼은 좀 다른 시각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투약시 단 1, 2cc의 오차만으로도 아기에게 치명적인 부작용이 생길 수도 있기에, 이 문제만큼은 나뿐만 아니라 모든 심봉사임당 엄마들이 독립의 깃발을 높이든 시각장애엄마의 존엄보다는 아기의 안전을 우선순위에 두고 있었다.

그러니, 기본적으로는 활동보조인이나 가족의 도움을 받아 투약 과정에서의 어려움(대부분의 경우 약물 제조)을 해결하려고 한다.

하지만, 어찌 보면 문제는 나처럼 애매하게 보이는 저시력 엄마들의 경우인데, 약국의 조그마한 배려나 아이디어만 있다면 혼자서 약을 탈 수도 있다 보니, 나름의 방법도 찾고, 타인의 도움을 받을 수 없는 상황에서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이번 논의는 자연스럽게 저시력 엄마들의 사례를 중심으로 흘러가게 되었다.무엇보다도 가장 힘든 문제는, 약물의 제조이다.

‘빨간색 물약 3cc와 투명한 물약 3cc에 가루약 한 포를 희석하여 식후에 3회 먹이세요.’

‘3cc’

내겐 너무 난감한 양이다. 기준이 될 만한 다른 용기에 덜어서 담을 수도 없는 양이다. 15cc만 되도 개량스푼 1큰 술을 활용해 보거나, 한 번 펌핑하면 10cc씩 일정하게 나오는 일본 도쿄점자도서관에서 사온 액체류 양념병을 사용할 수도 있을지 모르지만, 그것도 불가능이다.

이응이가 6세임에도 불구하고, 지사제 투약량이 10cc인 것을 제외하면 다른 건 이보다 투약량이 훨씬 적어서(대부분 6cc 이하) 저시력인 내가 헨들링 하기에는 너무 비현실적인 양이다.

경험적으로, 아기에게 먹였던 가장 최소단위의 투약량은 3cc였다. 약의 양도 너무너무 적고, 약병의 눈금이 너무 작아 보이지 않았던 나는 고심 끝에 그 때부터 약병의 해당 눈금에 네임팬으로 표시를 한 후, 표시한 곳에 클리어 테이프를 붙여 놓고 약을 타서 먹였다.

약병에 테이프를 붙여 두는 이유는, 아무리 유성펜이라도, 약을 먹일 때마다 약병을 세척하다 보면 표시가 잘 지워지기 때문이었다.

가루약을 희석하는 일은 별로 어렵지 않은데, 스틱형 약봉투 때문에 병에 약을 넣기가 너무나도 편하기 때문이다. 누가 발명했는지 엄청나게 감사한 일이다.

그런데, 아이랑 여행을 갔다가 아이가 아프면 타지에서 약을 짓게 되는 경우가 가끔 생기는데, 아이들이 별로 없는 동네나 시골의 경우 종종 옛날에 사용하던 사각형 약봉투를 사용하는 약사님들이 아직 남아 있다.

이런 경우, 좁은 약병에 넓은 사각봉투의 약을 담는 것이 시각장애인들에게는 너무도 불편한 일이어서 정말이지 난감하기 이를 데 없다. 혹시, 이 글을 보시는 약사님들이 있다면 이런 부분은 참고해 주셨으면 좋겠다.

약물 제조 외에 투약에 있어서의 또 다른 어려움은 때 마다 먹는 약이 다른 경우이다.

‘아침, 점심에는 빨간 물약 3cc와 투명한 물약 3cc를 가루약 한 포와 희석하여 먹이시고, 저녁에는 투명한 물약 3cc에 따로 표시해 둔 저녁가루약을 희석하여 먹여 주세요.’

난이도 1레벨 상승이다.

약 중에 점심 약, 저녁 약처럼 먹는 시점에 따른 분류가 필요한 경우, 대부분 약사들은 똑같이 생긴 약 봉투에 조제된 약들에 네임팬으로 표시를 해 주거나, 봉투의 디자인은 같고 점심이나 저녁 등의 별도 표기가 인쇄되어 있는 약 봉투에 약을 조제하여 제공하기도 한다.

그런데, 저시력인 내 입장에서는 봉투의 디자인이나 색깔이 완전히 같은 상태에서 작은 글씨나 네임팬으로 표기된 작은 표시에 의존하여 점심 약 또는 저녁 약을 구별해 내는 게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사실, 이런 어려움은 시각장애인인 나만 느끼는 것은 아닌 듯하다. 왜냐하면, 종종 약국에서 어르신들이 약사에게 복약지도를 받다가 언제 어떤 약을 먹어야 하는지 헷갈려 하시거나, 잘 보이지 않는다고 말씀하시는 경우를 심심치 않게 접하기 때문이다.

어르신들이나 내 입장에서는 저녁 약 봉투에는 달님이나 별님이라도 그려져 있으면 한결 더 구별하기 쉬울 텐데 싶다. 이런 문제를 고민하며, 유니버설디자인에 관련된 강의 준비를 하면서 찾아낸 모범사례가 하나 있다.

'CONTAC'이라는 이 약은 유니버설디자인을 적용해 아침과, 저녁에 먹을 약을 구분하기 쉽게 만들었다.

'CONTAC'이라는 이 약은 유니버셜 디자인을 적용해 아침과, 저녁에 먹을 약을 구분하기 쉽게 만들었다. ⓒCONTAC

우리나라 제약회사의 약품 포장 디자인이나 약국들의 약봉투들도 이런 불편한 부분을 고려하여 시각장애인들이나 어르신들, 어린이나 발달장애인들에 이르기까지, 누구에게나 편리한 유니버설디자인이 적용되었으면 좋겠다.

한편, 약을 구분해서 투약해야 하는 경우는, 투약 시간 외에도 또 있었는데…

카톡방에서 투약문제로 열띤 토론을 하다 보니, 아이가 둘 이상인 엄마들은 아이별로 약을 따로 구별하여 투약해야 하는 것 역시 여간 불편한 점이 아니라는 이야기가 나왔다.

아이 둘을 키우고 있는 저시력 엄마의 경우, 아이 둘이 동시에 아파 약을 지을 때는, 약사에게 미리 부탁해서 색깔이나 디자인이 다른 약봉투를 사용하여 각각의 아이 약을 지어 온다고 했다.

이 얘기를 듣고 있던 우리 멤버 중 최다자녀를 양육중인 애국가정 비장애인 3형제맘이 범상치 않은 약봉투 사진과 함께 던진 한 마디가 유니버설디자인의 필요성에 대한 우리의 열띤 논의를 한 방에 정리해 주었다.

아이가 셋이면, 시각장애가 문제가 아니라, 약이 세 세트나 존재한다는 것만으로도 각각의 아이 약을 구별하기가 힘들단다.

그래서 자기네 단골약국에서는 친절하게 각각의 아이별로 쉽게 구별하여 투약할 수 있도록 가루약 봉투 색깔도 달리 해 주고, 지퍼팩에 따로 넣어서 아이 이름 표기도 꼼꼼히 잘 해준다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볼 때도, 약봉투나 용기에 유니버설디자인을 적용하는 것은, 장애인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에게 가장 편하고 이로운 일이라는 것이 그녀의 의견이었다.

특히나 내 입장에서는, 비장애인인 3형제 맘이 그렇게 말해 주니 우리의 의견에 좀 더 힘이 실리는 것 같은 든든한 느낌이 들었고, 아줌마들의 이런 담론의 장이 새삼 보람되다는 생각을 해 보았다.

일상생활에서 알게 모르게 접하고 있는 유니버설디자인(좌측상단부터 시계방향으로 Citizen, 하이트, Pinterest, Yanko Design, Z-END), 우리나라에도 이를 도입하는 움직임이 더욱 구체적으로 진행되길 바래본다. ⓒ

최근 들어, 음료나 가공식품, 약품류 등에 대한 시각장애인의 정보접근성 및 사용편의를 고려한 점자표기나 유니버설디자인의 도입이 필요하다는 논의가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다.

실제로 뜻밖의 제품에서 뜻밖의 방식으로 이런 시도와 마주치기도 한다. 그 실효성이나 실용성은 논외로 하더라도, 이런 시도가 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시각장애인의 한 사람으로 무척이나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모쪼록 이러한 움직임이 좀 더 구체적이고 실효성 있는 방향으로 전개되어, 최소한 생명의 안전과 건강에 직결되는 의약품에서 만큼은 확대문자나 점자표기, 위에서 제시한 외국 약품의 사례와 같은 유니버설디자인의 적용 등을 어느 정도 강제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가 하루 빨리 마련되었으면 좋겠다.

왜냐하면, 제품명을 볼 수 없어 랜덤 삼각김밥을 먹는 것도, 콜라 대신 홍차를 마시는 것도 나름의 뜻밖의 두근두근 기대와 스릴쯤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초긍정적 멘탈을 가진 우리이지만, 두통약을 먹어야 하는데 지사제를 먹거나 스테로이드 안연고를 넣어야 하는데 상처 연고를 넣는 등의 비상사태는 정말이지 상상하기도 싫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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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진슬 칼럼리스트 세상이 너무 궁금했던 나머지 7개월 만에 급하게 세상 밖으로 나오는 바람에 시각장애와 평생의 불편한(?) 친구 사이가 되었습니다. 언어로 연주하고, 음악으로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20년 정도 피아노와 뜨거운 사랑을 했지만 첫사랑은 대게 이루어지지 않듯 그 사랑을 이루지는 못했습니다. 그래서 다시 새로운 사랑을 찾아 헤매던 끝에 지금은 장애, 음악, 보조공학 등에 관련된 글을 쓰고 번역도 하고 있습니다. 유치원, 학교, 기업체 등에 찾아가 장애와 장애를 가진 사람들의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스토리텔러(storyteller) 역할도 하고 있지요. 가끔은 강의의 전달력을 높이기 위해 피아노 앞에 앉기도 한답니다. 다섯 살 아이의 엄마이기도 한 저는 우리 아이가 살아갈 세상에서는 장애와 다름이 좀 더 편안하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으로 더 열심히 글을 쓰고, 강의를 하며, 연주도 하고 있습니다. 눈이 나쁜 대신 세상을 보는 눈이 조금은 더 예민하고, 커피와 독서, 클래식 음악을 사랑하는 다섯살 아이 엄마가 들려 드리는 같은 듯 다르고, 다른 듯 같은 아이 키우는 이야기 한 번 들어 보시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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