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바닥으로 하늘가리기 그림. ⓒ은진슬

언젠가, 한 시각장애인복지관에서 진행하는 장애부모 역량강화 프로그램에서 한 엄마로부터 이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본인이 아는 어떤 엄마는, 아이를 데리러 어린이집에 갈 때는 절대로 복지콜택시를 이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마도, 장애부모들 모두가 자신의 장애로 인해 내 아이, 내 아이의 친구들, 그들의 부모에게 엄마, 혹은 아빠로서의 내 모습이 어떻게 비추어질지 늘 고민하고 걱정할 것이다.

나 역시 그런 사람 중의 하나임을 부정할 수 없다. 하지만, 위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내 마음은 같은 장애를 갖고 아이를 키우며 엄마 노릇을 하고 있는 그 이름 모를 엄마에 대한 공감보다는, 그렇게 할 수 밖에 없는 걸까라는 아쉬움이 더 컸던 것 같다.

시각장애엄마인 내가, 아이와 돌아다니다 보면, 낯선 곳에서 무언가를 잘 찾지 못해 어리버리 헤매는 경우도 많고, 정상적인 시력만 가지고 있다면 물어볼 필요조차 없는 멍청한 질문을 불가피하게 할 수 밖에 없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예를 들면, 한참 지하철 출구를 찾지 못해 헤매다가 지나가는 사람에게 3번출구가 어디냐고 물었는데, 15미터 앞에 3번 출구가 있을 때 같은 경우다.

질문을 받은 사람은, 처음에는 그것도 모르냐, 그렇게 당연한 걸 왜 묻느냐는 표정으로 나의 지적 수준까지 의심하는 태도로 내게 대답을 해 주다가는, 나와 눈이 마주치고, 내 도수 높은 안경과 부자연스러운 아이컨택을 알아차리게 되면, ‘아!’ 하면서 무언가 엄청난 도를 깨달은 듯한 애매한 표정을 지으며 길을 알려준다. 그나마 나 혼자 다닐 때라면, 대한민국 장애인 생활 40년으로 단련된 초특급 울트라 강화철판을 이용해 뭐 대수롭지 않다는 듯 시크하게 이런 자괴감쯤은 쿨하게(?) 넘길 수 있다.

하.지.만. …

아이와 함께라면 얘기는 전혀 달라진다.

나의 장애, 내 어리버리함에 대한 사람들의 편견과 평가가 오롯이 나에게만 미친다면 괜찮지만, 대부분의 경우, 옆에 있는 내 아이에게까지 그 편견과 평가가 미친다는 건, 엄마로서 참아내기 힘든 일이다. 이런 자괴감이 마구마구 밀려오는 상황에 직면할 때마다 나는 속으로 생각한다.

저 사람들에게 내 뇌섹녀로서의 프로필을, 아니, 내 복잡다단한 뇌 활동영상을 MRI로라도 찍어서 보여주고 싶다고…

(내가 안 보여서 어리버리하다고 날 그렇게 멍청한 사람 취급 하지 말라고, 나는 소위, 당신들이 ‘오호!’라는 감탄사를 연발하는 학교를 나왔고, 대학원에서는 All A의 아름다운 성적표를 가꾸며 살았으며, 아줌마인 지금도 TOEIC 900점대 중반 이상의 성적을 유지하는 나름 뇌섹녀 아줌마라고 말하고 싶다.)

아마도, 전술했던 엄마의 마음 역시 이런 내 마음과 비슷한 이유 때문에 장애가 극명하게 드러나는 복지콜 이용을 꺼렸던 것이리라.

그런데 말입니다.

내가 한 40년 정도 장애를 가지고 살아 보니, 장애라는 건, 연주메이크업을 할 때 컨실러로 피부결점을 완벽하게 가리듯, 카멜레온이 자신의 몸 색깔을 바꾸어 완벽하게 위장술에 성공하듯, 그렇게 완벽하게 감출 수 있는 것이 아니더라는 거다.

마치, 입에 배인 사투리, 몸에 밴 습관, 행동거지, 걸음걸이 같은 걸 한 순간에 바꾸거나 숨길 수 없듯이, 장애 또한 이미 내 몸에, 내 행동패턴에 깊이 스며들어 있는 나의 일부인지라, 아무리 아닌 척 해도, 아무리 숨기려 해도 감추어지지 않는 다는 것이다.

그걸 우리 스스로 인지하지 못하거나,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감추거나 왜곡하려는 행동이야말로 정말이지 멍청해 보일 수 있는 행동이 아닌가 싶다. 이런 행동을 전문용어로는 ‘손바닥으로 하늘 가리기’라고 하는데, 이런 행동들은 오히려 우리의 장애가 더욱 더 극명하게 잘 보이는 타자에게 인지적 부조화만 가져올 뿐이다.

얼마 전, 신문 기사를 읽다가 빵 터졌던 외계어, ‘있어빌리티’.

남의 시선에 민감하고, 체면이 중요하며, ‘편견’과 ‘참견’이 난무하는 한국 사회의 특성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말이 아닌가 싶다.

나라고 왜 완벽하고 멋진 엄마이고 싶지 않겠나?

나라고 왜 쿨하고 있어 보이고 싶지 않겠나?

나도 캐치볼을 같이 하자고 조르는 내 아이에게 ‘엄마는 날아오는 공이 잘 보이지 않아서 어려울 것 같아.’라고 말하는 거, 없어 보여서 싫다.

호기심이 엄청나게 왕성한 아이가 박물관에 있는 전시물에 대해 깊이 있는 질문을 던질 때, 전시물 옆 텍스트조차 제대로 읽어줄 수 없는 나는 ‘엄마는 글씨가 안 보이니까 이응이가 글씨를 잘 읽으니 한 번 읽어 보면 어떨까?’라고 솔직 담백하게 이야기해 줄 수밖에 없어 서글프고 미안하기 이를 데 없다. 그럼에도, 가슴 아파도, 미안해도 있는 건 있다고, 없는 건 없다고, 되는 건 된다고, 안되는건 안된다고 말해줘야 한다.

꼭 장애 문제가 아니더라도 마찬가지이다. 그것이 부모의 경제적인 제한성이든, 정서적인 제한성이든, 함께 시간을 보내줄 수 없는 물리적인 제한성이든, 신체적인 제한성이든, 그에 대해 솔직하고 담백하고 명료하게 이야기 해 주면, 아이들은 우리의 생각과는 달리 그런가보다 하고 우리 어른들보다 ‘불편함’이나 ‘결핍’ 등을 훨씬 더 잘 받아들이는 것 같다.

이제 우리 손바닥으로 하늘 가리기는 그만 하고, 내 아이에게 탁 트인 하늘을 보여주는건 어떨까?. ⓒ은진슬

이응이가 바로 그 증거가 아닐까?

얼마 전,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데, 노약자석에 두 개의 자리가 생겼다. 아이가 많이 피곤해 해서 앉히고 나는 그 앞에 섰다. 그런데, 아이가 제법 큰 목소리로 이렇게 말하는 게 아닌가?

‘엄마, 왜 안 앉아? 엄마도 앉아. 엄마는 시각장애인이니까 앉아도 되잖아!’

아들의 말을 들은 주변 어르신들의 더없이 어색하고 난감한 표정은 예상이 갈 것이다. 엄마는 눈이 불편한 거지, 다리가 불편한 게 아니니까 안 앉아도 된다고 말하면서, 이걸 웃어야 하나 울어야 하나 싶기도 했다. 그래도 엄마의 장애에 대해 잘 받아들이고 소화시켜 가는 아이의 모습을 보며 그 간의 내 노력이 헛되지 않아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장애를 가진 한 사람이 자신의 장애에 대해 객관적이며 건강한 자아를 갖는 과정도 쉽지 않은데, 하물며 아이에게 장애에 대한 객관적이며 건강한 인식을 심어 주는 건 얼마나 어렵겠는가?

그래도, 우리는 엄마로서, 아빠로서 내 아이를 위해, 이 사회를 위해 그렇게 해야 할 책임이 있다. 그러니 우리 손바닥으로 하늘 가리기는 그만 하고, 내 아이에게 탁 트인 하늘을 보여주자.

그 하늘이 맑았든, 찌푸렸든, 미세먼지가 가득하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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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진슬 칼럼리스트 세상이 너무 궁금했던 나머지 7개월 만에 급하게 세상 밖으로 나오는 바람에 시각장애와 평생의 불편한(?) 친구 사이가 되었습니다. 언어로 연주하고, 음악으로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20년 정도 피아노와 뜨거운 사랑을 했지만 첫사랑은 대게 이루어지지 않듯 그 사랑을 이루지는 못했습니다. 그래서 다시 새로운 사랑을 찾아 헤매던 끝에 지금은 장애, 음악, 보조공학 등에 관련된 글을 쓰고 번역도 하고 있습니다. 유치원, 학교, 기업체 등에 찾아가 장애와 장애를 가진 사람들의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스토리텔러(storyteller) 역할도 하고 있지요. 가끔은 강의의 전달력을 높이기 위해 피아노 앞에 앉기도 한답니다. 다섯 살 아이의 엄마이기도 한 저는 우리 아이가 살아갈 세상에서는 장애와 다름이 좀 더 편안하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으로 더 열심히 글을 쓰고, 강의를 하며, 연주도 하고 있습니다. 눈이 나쁜 대신 세상을 보는 눈이 조금은 더 예민하고, 커피와 독서, 클래식 음악을 사랑하는 다섯살 아이 엄마가 들려 드리는 같은 듯 다르고, 다른 듯 같은 아이 키우는 이야기 한 번 들어 보시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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