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렌체 대성당. 브루넬레스키의 돔. ⓒ한국어 위키백과

이 글에서 설명하는 원근법은 정확히는 선 원근법이다. 르네상스시대 건축가 브루넬레스키(Filippo Brunelleschi. 1377~1446)가 발견한 선 원근법은 회화에서 2차원의 평면에 3차원의 환영을 만들 때 효과적으로 쓰인다.

원근법의 원리는 간단하다. 이는 공간 속의 물체가 보는 사람에게서 멀어질수록 작게 보이며 평행하는 선과 면도 무한히 먼 하나의 소실점으로 수렴되어 사라지는 듯이 보인다는 사실의 실제적 관찰에 바탕을 두고 있다. 쉽게 말해 우리가 외부세계를 시각적으로 지각하는 바를 2차원 평면에 수학적으로 그리는 방법이다.

원근법의 종류는 여러 가지가 있다. 멀고 가까운 색의 농도변화와 공기의 투명도에 따라서도 멀고 가까운 것 사이의 공간감을 표현할 수 있다. 동양에서도 이러한 원근법이 쓰였고 색의 농도변화로 멀고 가까운 공간을 표현했다.

그런데 앞에서 설명한 수학적 원리에 의한 선 원근법의 성립 배경에는 좀 더 깊은 의미가 있다. 그것은 서양문명의 발생 초기로 거슬러 올라가 고대 이집트 문명의 측량술과 건축술에서 시작된다.

나일 강의 범람으로 인해 발달한 측량술은 건축을 위한 측량에도 사용되었고 거대한 건축물의 축척을 위해 공간과 사물의 크기를 일정하게 나누어서 계산하는 방법을 개발하였다. 쉽게 설명하면, 종이에 일정한 간격으로 모눈을 그리고 그 위에 설계도를 그리면 커다란 건물의 실제크기를 재지 않더라도 모눈의 일정간격만 계산하면 건물의 크기를 알 수 있는 방법이었다.

우리가 지금 격자, 그리드(Grid)라고 부르는 것은 이렇게 고대 이집트 사람들이 나일강의 범람에 맞서 자연을 예측 가능하고 유용하게 만들려는 노력이었다. 이러한 노력으로부터 그리스 사람들은 기하학을 발달시켰고 고대 그리스 자연 철학자들은 기하학을 철학과 종교로 발전시켰다.

피타고라스학파는 수를 만물의 기원으로 여겼으며 그 영향은 플라톤(Plato. BC 427~347),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 BC 384~?)를 거쳐 서양문명을 과학적 합리성의 토대위에 세운 기초였다.

원근법은 이렇게 보이지 않는 수를 이용하여 보이는 세계를 만드는 데 사용되었다. 그러나 원근법은 단순히 보이는 것을 그대로 2차원으로 옮기게 해주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브루넬레스키의 원래 목적대로 아직 지어지지 않은 건축물을 실제처럼 보여주는 것이었다.

브루넬레스키는 그가 짓고자 하는 건축물의 조감도를 원근법을 이용해 그의 고객에게 보여 주었다. 그것은 2차원의 작은 종이위에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공간을 인간이 창조한 것이었다.

그것은 세상의 창조주가 신이었던 세계에서 인간이 그 역할을 대신 할 수 있는 세계를 만든 시각 패러다임의 전환이었다. 그 시점에 지중해 세계에 머물러 있던 유럽인들의 세계관은 원근법 체계의 지평선 저쪽, 수평선 너머의 세계를 상상하기 시작했다.

그 뒤, 콜럼버스(Christopher Columbus. 1451~1506)가 대서양을 횡단했으며 브루노(Giordano Bruno. 1548~1600) 와 코페르니쿠스(Nicolaus Copernicus. 1473~?)가 지동설을 주장하였고 케플러(Johannes Kepler. 1571~1630)와 갈릴레이(Galileo Galilei. 1564~1642)가 망원경으로 행성과 달을 관찰하였다.

마사초의 '삼위일체'. ⓒ한국어 위키백과

서양미술에서 이러한 시각 패러다임의 전환은 여러 가지 관점에서 활용되었다. 그것은 우선 종교적 이미지를 상징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토대를 확장했다.

브루넬레스키의 원근법을 최초로 회화에 도입한 것으로 알려진 마사초(Masaccio. 1401~1428)는 피렌체의 산타마리아 노벨라(Santa Maria Novella)성당에 <삼위일체(The Trinity)>를 그리며 로마 카톨릭의 철학적 종교적 세계관을 원근법을 이용해 그대로 상징화해 놓았다.

마사초의 삼위일체는 벽을 뚫어 놓은 듯한 착시를 일으켰다. 그림은 완전한 대칭을 이루며 그 한가운데 그리스도의 얼굴을 위치시켰다. 그것은 그림의 소실점으로부터 퍼져 나오는 하느님의 빛을 상징한다.

또 그것은 대화편에서 플라톤이 비유한 동굴과도 같다. 플라톤에 따르면 우리는 인간이 지각할 수 있는 세계로 비유된 동굴의 바깥쪽에서 들어오는 빛으로 생긴 그림자를 실재 세계라고 착각한다.

그러나 그것은 허상이고 참된 진리를 보기위해서는 무지의 사슬을 끊고 그 빛을 봐야만 한다. 이런 도식은 이후의 다른 르네상스 대가들에게서 반복적으로 나타난다. 그 대표적인 것이 레오나르도 다 빈치(Leonardo da Vinci. 1452~1517)의 최후의 만찬이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최후의 만찬'. ⓒ한국어 위키백과

서양미술사에서 이러한 원근법의 도식이 깨지기 시작한 것은 후기인상파 미술에 들어서면서 부터다. 폴 세잔(Paul Cézanne. 1839~1906)은 선 원근법의 원리를 정면으로 의심한다. 실제로 선 원근법은 인간의 시각원리와 맞지 않는다.

인간의 시각은 시야(視野)가 존재한다. 인간의 시야는 평면이 아니며 원호를 그린다. 그것은 안구와 망막이 구형에 가까운 것과 일치한다. 사실 이러한 인간의 시야를 이해하고 있었던 것은 폴 세잔이 처음은 아니다.

중세의 성상화가들과 동방정교회의 성상제작자들은 이미 선 원근법 이전에 역원근법이라고 하는 인간 시야특성을 반영한 원근법을 사용하고 있었다. 폴 세잔은 이것을 이용해 전통적인 선 원근법에서 벗어나 시각 패러다임을 다시 한 번 바꾸는 계기를 만든다.

뒤를 잇는 피카소(Pablo Picasso. 1881~1973)와 입체주의, 몬드리안(Piet Mondrian. 1872~1944)과 말레비치(Kazimir Malevich. 1878~1935)의 추상과 절대주의는 현대미술을 시각의 굴레에서 벗어나도록 재촉했다.

현대미술은 이제 보이는 세계에 집착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 보이는 것을 믿는다. 아니 믿으려고 한다. 브루넬레스키의 시대에도 그러했듯이 환영은 상상력을 자극하고 만족시킨다. 선 원근법은 아마도 마법 같은 환영을 연출했을 것이다.

그보다 훨씬 선배인 조토(Giotto di Bondone. 1266~1337)가 아래나 예배당(Arena Chapel. 1305) 벽면을 온통 연극무대 같은 극적 그림들로 채워 놓았을 때도 사람들은 그 환영의 사실성에 연신 감탄사를 터뜨렸을 테니 말이다.

지금으로 치면 3D영화를 능가하는 효과를 낳았음에 틀림없다. 그러나 우리는 이제 무엇이 실제인지 구분할 수 없을 정도에 이르렀다. 영화나 TV에서 보는 특수효과나 3D영상 외에도 각종 미디어에서 생산하는 리얼리티 프로그램들은 사실과 허구의 경계가 언제나 모호하다. 그러므로 보이는 어떤 것도 그대로 믿을 수 없다.

장 보드리야르(Jean Baudrillard. 1929~2007)가 지적했듯이 이제 실재 없는 이미지가 실재를 대체한다. 그와 더불어 복재된 이미지가 실재가 되어 인간의 장기가 되고 세포가 되며 지능이 된다. 원근법의 효과가 낳은 시각의 패러다임은 이렇게 우리 문명과 함께 변화되어 왔다.

우리는 이제 자본주의 아래에서 대량생산되는 기호화 된 이미지를 소비하며 살고 있다. 원근법이 시각 패러다임을 확장하는 도구였고 동시에 시각을 수학법칙에 묶어버린 도구였던 것과 같이 이 이미지들이 실재에 부합하는 것이건 가상에 머무는 것이건 그것이 구조화되어 우리 삶을 억압하는 것으로 변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우리가 흔히 갖는 편견의 대부분이 이미지와 시각이 만들어내는 환영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생각해 볼 때 원근법이 만들어낸 환영의 역사를 이해하는 것은 중요하다. 원근법은 수학적 황금비례를 가진 가상의 인간을 실제처럼 보이게 함으로써 실제 인간을 주눅 들게 만든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실제 세계에서는 볼 수 없는 실재를 관찰 할 수 있게 함으로써 더 잘 볼 수 있게도 만든다. DNA나선 구조와 원자와 전자의 운동을 입체적으로 사고 할 수 있었던 것은 평면에서도 입체를 구성했던 원근법적 사고 덕분이었을 것이다.

우리는 이제 급격한 환경의 변화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 그 가운데는 공간개념의 변화도 예상된다. 전 지구적인 네트워크의 발달은 이미 지구라는 공간이 얼마나 협소한지 체험하게 한다. 보이저 2호가 보내온 지구사진을 보면 인간의 존재는 무의미해 보인다.

이렇게 천문학적으로 확장된 공간의 개념은 정신의 차원으로 다시 수렴된다. 이러한 가운데서 우리는 인간과 환경, 인간과 이미지, 인간과 문명의 관계를 다시 조망하도록 요구받을 것이다.

여기서 필자는 앞에서 언급한 원근법의 시각 패러다임 속에서 환영과 그 구조가 사회와 사회적 소수자, 장애인의 이미지를 어떻게 변형시켰나를 말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낸시 버슨(Nancy Burson)의 사진에서 보듯 모호하게 중첩되어있다. 그것은 마치 정신분석학에서 말하는 양가감정(兩價感情)과도 같다. 즉 우리는 원근법적 환영의 법칙에 따라 문명을 만들지만 그 이미지는 소수자 장애인에게 억압적으로 작용하는 것과 동시에 원근법으로 가상의 공간을 만들듯이 가상의 자아를 만들어 공간적 신체적 제약을 뛰어 넘는다.

그러나 이미지가 만든 가상공간은 정체성을 가지는 사적공간도 완전히 열린 공적공간도 아니다. 그 안에서 장애인이 가지는 가상의 자아는 실존 없는 실존이 된다. SNS라는 가상공간에서 활동하는 실존이 그렇다.

공간개념이 정신의 차원으로 수렴된다면 그것은 무의식의 차원일 것이다. 우리는 무의식의 동굴에서 실존의 환영을 실존으로 착각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 빛을 인식하는 것은 여전히 숙제로 남는다. 그 빛의 지평너머로 모험하는 일은 여전히 위험하다. 그러나 소실점에서 사물과 공간이 실제로 사라지는 것이 아닌 것처럼 나(장애인인 나)의 실존도 사라지지 않는다. 모험은 해볼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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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업작가로 활동 중이며 선사랑드로잉회, 뇌성마비작가회 날 등에서 장애인 문화예술행사와 전시기획을 해오고 있다. 칼럼에서는 장애인예술을 현대미술이론들과 동시대 담론들을 통해 조명하고, 역할과 발전 방향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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